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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샤롯 브론테의 <제인에어>.
어렸을 때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기에 스토리는 주루룩 모조리 기억은 나지만, 완역본으로 읽었던 것이 아닌지라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샬롯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제인에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이 떠오르고 <폭풍의 언덕> 때문에 가슴이 두근두근해져서 <제인에어>는 별로 신경을 안 쓰게 된다.
그런데 ‘제인에어 납치사건’이라는 소설이 있단다.
제목만 듣고, ‘아, 재미있겠다!’ 하고 인터넷으로 구입을 해버렸다.
처음엔 다시 쓰는 ‘제인에어’ 형식의 소설로 일종의 메타소설이 아닐까, 생각했었으나 이 소설은 ‘환타지 소설’에 가깝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전제하에 시작된다.
1.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 그러나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80년대와는 다르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봤음직한 온갖 잡다한 소재들이 등장한다. 늑대인간, 타임머신, 특수 수사대 등등
(실제로 이 책으로 처음 데뷔한 작가는 원래 영화판에 있던 사람이다.)
2. 이 안의 사람들은 스포츠나 연예인 보다는 문학과 소설 속 등장인물에 열광한다.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연극이 곳곳에서 공연되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새겨진 스티커 사진이나 문학 박물관 등이 최고의 인기품목이다. 문학작품의 원본이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고가의 가치를 가짐은 물론이다.
3. 기이하게도, 현실의 인물이 소설 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반대로 소설 속 인물이 현실 세계로 나와 활동할 수도 있다.
물론 아주 기발한 착상과 신선한 소재임에는 틀림없으나, 소설 전개 과정은 아주 지루하기 짝이 없다. 기본 플롯을 너무나 충실히 따르기에 쉽게 다음 내용이 예측 가능한 007시리즈를 보는 기분마저 든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무모하기까지 한 용감무쌍한 주인공의 활약, 미스테리한 악당의 카리스마, 조미료처럼 적당히 끼여 맞추어진 싱거운 로맨스. 헐리우드의 종합선물세트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차라리 영화로 봤다면 훨씬 재미있게 보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도 많았다. 액션 장면을 소설로 서술하면 이리도 촌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뭐, 번역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역자가 소설가 송경아였는데?)
카네시로 카즈키의 소설 <Go> 역시 적당한 액션(?)이 들어간 꽤나 활기찬 소설이었지만, 읽으면서 문장이 민망스럽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물론 중간 중간 반짝이는 부분은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쓴 이가 실제로는 베이컨이었다고 주장하는 ‘베이컨주의자’들의 출현이라든지, 제인에어가 결국 마지막 반전을 통해 로체스터와 결혼하게 된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들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이 무거운 책을 낑낑 들고 다니며 지하철에서 그 많은 시간동안 이 책을 읽었던 건지, 정말 후회막급이다.
(사실 1/3 부분부터는 돈이 아까워서 억지로 읽긴 했다.-_-a)
그리고, 역시 절망과 슬픔, 상처가 없는 악역 캐릭터는 매력도 없고 재미도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하데스 말이다. 마치 '난 악역을 위해 태어난 인간이요.'라고 말하는 듯한 인물. 이유 없이 악역을 맡는 인물은 존재감이 절실하게 안 느껴진다고나 할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