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열린책들의 책들은 맛있게 생겼다. 유치한 얘기이지만, 고급스럽고 세련된 양장커버는 마치 그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떤 포만감을 가져다 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한다. 아무 계획없이 영풍문고에 들려, 한참을 열린책들의 책꽂이 앞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거렸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번역 소설 중에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일본소설들이다. 적당히 세련되고 적당히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는 일본소설들에 군침이 도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괜히 사는 것은 망설여진다. '일본문화'에 대해 어떤 피해의식이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필요이상으로 우리 문학계가 일본소설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연히 영풍문고에서 황석영의 '작가와의 대화'에서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약간 '노인네 같은 말투'로 요즘 젊은 작가들이 너도 나도 하루키를 흉내내고 있는 거 같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에게 익숙치 않는 나라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결국 그러다가 내가 선택한 것은 신세대 벨기에 작가 아멜리 노통의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소설이다. 안쪽 표지에 작가의 사진이 있는데, 인상이 굉장히 강렬하다. 흑백 프랑스 영화에서 자의식 강하고 말없는 소녀의 역으로 나오면 딱, 일 것 같은 분위기이다.

이 소설은 자전적인 내용의 소설인데, 벨기에 인인 그녀가 20대 초반에 일본인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또 일본이닷!) '두려움과 떨림'은 일본인이 그들의 황제 앞에서 취해야 하는 태도를 말한다. 적당히 두려워하고 부들부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떠는 것이 일종의 예의를 갖춘다고 생각하는 듯 싶다. 주인공 아멜리는 유미모토사라는 일본의 어느 거대 기업에 취직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비합리적이고 권위적이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과 일본인들의 모습을 고발(?)한다.

소설은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나 톡톡 튀는 문장들 사이로 그녀의 시니컬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이 돋보인다. 대기업 안에서 그녀는 벨기에인이라는 특성상 번역일이나 통역, 그 밖의 합리적인 기획안을 작성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시스템의 독특한 성격상, 그녀가 하게 되는 일은 커피 심부름, 달력 정리하기, 세금 계산 검토 하기 등이다. 그녀의 직속 상사에게 미움을 받게 된 그녀가 마지막 7개월 동안 한 일은 화장실에 하루종일 머물면서 휴지를 갈아끼는 일이었다.

그게 정말 사실을 바탕으로 쓴 픽션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스꽝스러운 그 상황에서도 결국 쉽게 웃을수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대기업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나는 정말 창조적(?)인 작업의 일선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것에 감사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조직의 특성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 주변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멜리 노통은 1년이란 시간을 그 끔찍한 곳에서 몽땅 버린다. 그녀가 단순히 그 계약직을 중간에 그만두지 않은 이유가 소설 속에서는 그녀의 상사(후부키)에 대한 반발 때문으로 표현된다. 뭐, 그녀는 손해본 것은 없다. 1년의 시간을 바치고 소설 쓰기의 꽤 괜찮은 소재를 얻었으니까 말이다. 그녀의 앙큼하고 약간은 뻔뻔스런 문장의 말투(?)가 마음에 든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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