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가을산님께, 그리고 처음과 끝님께-2

그렇지 않아도 두번째 글에서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처음과 끝님이 그 내용을 댓글로 달아주셨군요.^^

처음과 끝님이 말한 것처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번역이 엉망이라고 하는데, 막상 어떤 독자들은 그 책을 재미있게 읽고 또 나름대로 감명을 얻는 경우가 있죠. 저의 예를 하나 들자면, 88년인가 89년인가 김현 선생이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푸코가 60년대에 문학에 관해 쓴 이런저런 글들을 묶고, 김현 선생이 긴 해설을 붙인 책이었죠. 그 책을 읽어본 분들은 대개 공감하실 텐데, 푸코의 문학에 관한 글들은, 그가 나중에 쓴 글이나 책들, 특히 [감시와 처벌] 같은 책과는 문체부터 확연히 다르고, 내용들도 상당히 사변적, 철학적이죠. (푸코의 첫번째 주저, 그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인 [광기의 역사](1961)에는 그의 문학론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사변적인 문체와 고고학 저술들에서 볼 수 있는 건조하고 담백한 문체가 모두 공존하고 있죠. 저는 그 점이 특히 매력적이더군요 ) 그래서 저는 당시에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이 책에 아주 매료됐었죠.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푸코의 저작들을 이것저것 찾아 읽었고, 그래서 알튀세르와 푸코는 제가 제일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읽은 첫번째 프랑스 철학자들입니다(그 이전에 저의 철학적 영웅은 물론 루카치와 헤겔이었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그토록 매료되었던 푸코의 글들, 특히 바타이유에 관해 쓴 [위반에 대한 서언]이나 블랑쇼에 관한 글인 [한없는 언어] 그리고 몇몇 사변적인 글들은 어이없는 오역본들이더군요(^^;;;). 그 글들을 번역한 사람들은 김현 선생의 제자, 그러니까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소장 불문학도들이었는데, 푸코에 관해서는 그 책이 국내에 거의 처음으로 번역되는 책인데다가 매우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논의들로 가득 찬 글들을 소장 불문학도들이 제대로 소화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본다면 무리이겠죠. 그래서 좀 허탈하고 어이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재작년에 강의를 하면서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수업교재 중 한 권으로 쓴 적이 있었는데, 기말보고서를 발표할 때 보니까, 학생들 중에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번역본을 참조해서 보고서를 쓴 학생들이 몇 있더군요. 앞의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의 국역본들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번역본들이어서, 들뢰즈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발표하는 학생들의 글을 보니까 상당히 잘쓴 글들이고, 들뢰즈의 논의도 어느 정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학점도 잘 줬습니다.(^^) 처음과 끝님의 경우와 유사한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번역본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감명을 받고 또 내용을 어느 정도 잘 파악하는 경우들이 분명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우선 번역본의 번역 상태를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잘된 것보다는 잘못된 것들에 좀더 치중하게 되고, 특히 철학책의 번역을 검토할 때는 이 책이 원본에 나와 있는 저자의 논의, 그의 논리적 추론과정을 제대로 전달해주고 있는지, 저자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제대로 번역해서 제시해주고 있는지 등을 따지게 됩니다. 그런데 원본을 전혀 참고하지 않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번역된 한글 문장이 전달해주는 의미들을 쫒게 되죠. 이 경우 내용이 잘 이해되다가 어느 순간 잘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독자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가서, 다음 내용을 읽게 됩니다. 다행히 그 다음 문장이나 문단들은 내용이 잘  이해되면 독자는 앞의 내용과 연결해서 계속 책을 읽게 되죠. 이처럼 독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나 문단, 내용들은 모르는 대로 그냥 넘어가고 이해가 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재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형편없는 번역본이 아닌 다음에야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그 책을 읽은 독자는 나름대로 책의 내용을 소화하고 거기에 감명을 받거나 실망하거나 자극을 받거나 혐오를 하게 되죠.

더욱이 형편없는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모든 문장이 오역인 번역본은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최악의 번역본 중에는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고려원)이라는 책과 라비노우/드레퓌스의 [미셸 푸코](나남), 또는 존 레웰린의 [데리다의 해체주의](문학과 지성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절판이 되었지만 이 책들은 모든 문장이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말 지독한 오역 문장들로 가득차 있어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그렇게 고역일 수가 없었습니다(물론 모르고 읽었을 때는 책이 난해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 -_-;;;). 이런 정도의 오역본이 아닌 다음에야,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번역된 문장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러면 독자들은 이처럼 이해되는 문장들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책의 내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게 되지요.

따라서 번역본, 특히 철학책의 번역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논증과 의미전달의 충실성을 염두에 두고 평가를 하는데, 독자들은 이를테면 번역본을 아포리즘과 같은 식으로 읽게 됩니다. 이 문장은 멋있군, 이 문장은 이게 무슨 소리야, 전혀 모르겠는데(문제는 나에게 있겠지만 ... ;;;) 이건 말도 안되는 문장인데, 반어법인가? 어 그래도 이 문장은 좋군, 말하자면 이런 식이죠. (가끔 알라딘 마이 리뷰에 보면 형편없는 번역본인데도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식의 서평이 올라오곤 합니다. 책을 전혀 읽지 않고 쓴 서평일 수도 있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 독자는 형편없는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읽고 실제로 무언가 의미있는, 감동적인 것을 찾아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퍼즐맞추기에 비유하자면, 몇 개의 그림들이 빠진 상태에서 또는 잘못 맞춰진 상태에서 자신이 맞춰놓은 것만 가지고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리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의미 있는 내용들을 정리하고 이끌어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번역본을 평가하는 사람으로서는 최선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그 기준에 맞춰서 문제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되지만, 독자들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어떤 의미있는 내용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하지요. 그리고 사실 일반 독자들로서야 그 책을 완벽하게, 최선의 상태로 이해해야 할 의무도, 이유도 없는 거지요. 자기가 원하는 내용을 찾고, 또 즐길 수 있으면, 기쁘게 읽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죠. 하지만 연구자나 서평자로서는 독자들과 달리 그 책을 최대한 정확히, 최대한 완벽하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죠. 또 사실 그것이 바로 연구자나 서평자의 존재 이유 자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번역본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는 그 평가대로 참조하시되, 자신이 그 책을 읽고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찾아냈다, 재미있게 읽었다 생각하신다면 그걸로 만족하시면 될 듯합니다. 불만족이시라구요??? 그럼 이제 연구자의 길로, 고생문으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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