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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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를 잘 팔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왜 그 의무는 딸에게만 주어지는가?


이주혜는 다른 글에서 자신이 바로 '터를 잘 판' 딸임을 밝힌바 있다.

남동생이 태어난 뒤 친척들이 자신에게 하는 인사는 '네가 터 잘 판 아이냐'는 것이었다.

바로 밑에 남동생을 둔 딸의 존재이유는 다만 '터를 잘 팔기' 위한 것일까?

딸은 바로 밑의 동생의 성별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인데 어른들은 곧잘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한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어떤 어른들처럼.

아이가 선택할 수 없는 부분에 책임을 묻고 비난하며 폭력을 휘두른다.

외모만 보고 자기맘대로 여자아이를 남자아이로 착각한 지휘자는 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여자임을 알게 된 순간 '더럽다'고 말한다.

사업이 망해 도망자가 된 남편을 대신해 시어머니와 딸을 건사해야 했던 엄마는 그 와중에 둘째를 임신하고 '폭폭한' 삶을 견디느라 딸의 상처를 보듬을 여유가 없다.

대대로 살던 집을 빚잔치로 팔아넘기고 이사를 하는 날, 임신부인 엄마와 아이는 엄마의 언니집에 잠시 머문다.

심심해하는 아이에게 이모는 엄마의 사진이 담긴 사진첩을 보여준다.

소녀는 한껏 사랑받고 있었다. 소녀의 미래는 온통 행복으로 도배된 것처럼 보였다. 미래를 향해 반짝이는 소녀의 눈빛을 보고 어느 누가 감히 불행을 점치겠는가? 시옷은 다시 교복 입은 소녀의 사진으로 돌아갔다. 소녀의 골똘한 눈빛에 점점 노여움이 묻어났다. 소녀가 시옷을 노려보았다. 전부 너 때문이야. 소녀가 시옷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말했다. 너만 아니었어도. _235쪽

아이는 가련하게도 엄마가 불행해진 것을 자기 탓으로 여긴다. 엄마가 자기를 왜 미워하는지 이해한다.

열살의 아이가 자기 탓을 하다니.


어른이 된 딸(시옷)은 자기를 배신한 남편과 그로 인해 접어야 했던 사업, 남편과의 별거를 엄마탓으로 돌리고 연락을 끊은 딸 등 여러 상황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

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가는 날 학살자가 침대에서 편안하게 죽었다는 뉴스를 보고 분노에 차서 욕을 한다.

정신과 의사는 시옷의 기분을 묻고, 시옷은 분노라고 답한다.

왜? 학살자가 사과 한마디 없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의사는 "환자분은 사과가 중요한 사람이군요"

라고 말한다.

의사는 불안과 공포를 치료하는 방법의 하나로 일기 쓰기를 권한다.

시옷은 인터넷 검색으로 일기 쓰기를 하는 글쓰기 교습소를 찾아내 등록한다.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두 문장이 한 구절씩 차례차례

화면에 떴다. _16쪽

일기쓰기 교실에서는 서로 별명을 지어 부르기로 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별명을 시옷이라고 정한다.

소설은 시옷이 주마다 써오는 일기의 내용이 주를 이루며 과거와 현재가 섞인다.

시옷의 삶에는 마치 자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는 듯이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옷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할머니, 친구들도 있었다.

일기 쓰기의 장점이라고 해야하나.

매 주 써온 일기를 수강자들 앞에서 읽어가면서 힘든 삶을 스스로 다독이고 긍정하는 마음이 시옷을 불안과 공포에서 서서히 구해낸다.


기억이란 왜곡되기 일쑤지만 그래서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중년의 나이란 그런건지도 모른다. 앞날보다는 지난날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지는.

중학교때부터 꾸준히 썼던 일기를 다 없애버릴 때는 과거를 더이상 돌아보기 싫어서였다.

억압과 의무로 가득찼던 내 삶이 싫고 그렇게 살아온 삶이 후회스러웠다.

습관은 무서운 거라 그후에도 일기를 쓰고 없애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현재의 일기는 이전의 내용과 다르다.

느낌없이 사실만 기록하려고 애쓴다. 늘 실패하지만.


시옷이 받아내지 못한 사과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당연한 것처럼 행사하는 타인의 무례함에 속절없이 당하던 시절의 분노를 품고 있다.

품고만 있고 터뜨릴 기회를 얻지 못한 분노는 매일의 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그러니 살려고, 살아내려고 일기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소설 속 일기교실 홍보글에는 '쓰면 헤어질 수 있다'고 하지만 결코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희석되는 거라고, 세월과 함께 묽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살아야 하니까.

넘어가지 마

시옷이 내 말을 알아들었나? 꿈속의 시옷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순간 나는 깨닫는다. 시옷은 문턱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알면서도 기어이 저 경계를 넘어가려 한다고.······저 너머에 어떤 음험한 세계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_224~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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