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러시아, 아랍세력사이의 어느 지역엔가 실존하였으나 어느샌가 사라져버린 하자르 왕국의 9세기 국교 선정 사건을 소재로, 꿈을 쫓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섞어 지어낸 사전식 소설이다.

읽느라 꽤 힘들었다. 알파벳 기준 사전식 소설이라, 순서도 왔다갔다이고, 세 종교의 입장에서 같은 사실이 다르게 적혀있기도 하고. 여러모로 친절한 소설은 아니다.

앞 뒤를 들추어가며 진실을 짜맞추어가는 과정이 마치 사건 기록을 읽는 것과 같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러나 정답도 없고, 가이드도 없어서 찝찝함이 남아있다. 동기와 범행 이익이 아직까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생각을 다시 바꾸어 해보자면, 이 얼토당토 않은 이 책은 불완전한 소설이 아니라, 방대한 규모의 시집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과관계와 서사의 그물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 그림의 한 장면을 공들여 묘사해낸 점에서 말이다. 읽어내는 방법만큼이나 이 글의 심상도 자유로워서, 말도 안되기도 하고 위트가 지나치다싶은 부분도 있지만, 그 말들의 이미지는 너무 강렬해서 쉽게 잊을 수가없다.

각 에피소드에 수많은 사람들이(악마 포함) 등장한다. 그들의 인생은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애처롭고, 처량하며, 허무하다. 모두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운명에서 자유롭지가 못하고, 별로 운명에 대해 저항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를 꿰매고 엮은 한 권의 책으로 읽자니, 그 모든 것이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두번째 재미였다.

그런데 그 실체조차 모호한 결과물을향해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투입하라고 차마 권유할 수가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이 책은 친구들에게 추천해주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높은 별점을 주고싶지만...(독자의 덕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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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교 초년생 시절, 이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당시 초판본의 제목은 "카자르 사전"). 어렵사리 내용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남성판과 여성판을 모두 읽었었다. 그렇지만 결국 기억에 남았던 것은 책의 내용이라기보다 역사와 현실에서 붕 떠있는 기분이었는데, 그것은 아무리 발을 뻗어도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과 같이 오싹한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무심히도 주변 친구들에게 -그들의 취향따위 상관 없이-이 책을 알리고 다녔다. 그때는 나에게 그런 배포가 있었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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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은 처음부터 "김연수의 친구"로 인식을 하게 되었다.(둘이 주거니 받거니 써내려간 에세이집 "대책없이 해피엔딩"을 통해서)

그래서 김중혁은 내심 김연수와 견주어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내 마음속의 그들은 오성과 한음(김중혁-김연수), 도가와 유가(김중혁-김연수), 박지성과 차두리(김연수-김중혁)과 같은 이미지를 가진 콤비이다. 물론 둘 다 좋은 작가겠지만, 김중혁이 덜 진지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김중혁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하고 에세이만 읽어본 후의 인상 비평이다. 그렇지만 김중혁의 소설에서는 김연수와 같은, 뒷통수가 서늘해지는 듯한 감동은 받지 못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있다.

 

한편 상상력과 허허실실 즐겁게 사는 능력에 있어서는 김중혁이 김연수를 앞지르는 것 같다. 하릴없이 미드를 섭렵하며 문화센터강좌를 들으며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열광하는 김중혁ㅋㅋ 자기 책의 글쓰기보다 삽화 그려넣기에 버닝하는 작가 김중혁ㅋㅋ 인생의 가장 중요한 비밀은 '가장 쓸데 없는 것'에 있다고 믿는 김중혁ㅋㅋ (작가님 이름을 호명하면서 뒤에 "ㅋㅋ"를 연이어 붙여보기도 처음이다.)

 

그런 김중혁의 에세이집 "뭐라도 되겠지"를 즐겁게 읽고 있다. 가볍게 쓴 책이라 쉽게 읽히지만 한편 열심히 쥐어짜내듯 고심해서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발견(마치 호연의 '사금일기' 처럼)해낸 흔적도 역력하다. 그리고 가벼운 와중에 의외의 마음을 치는 구절도 여럿 발견했다. 오늘 아침에 읽었던 글의 한 구절은(정확하진 않지만):

 

나이 들어서는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이해해보지도 않고 걍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이하 생략)

 

맞다, 그랬던 거였어ㅋㅋㅋ

 

이렇듯 쉽지 않은 문제에 어이없이 간명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책이다. 이 책은 여러번 칭찬을 했지만, 바닥으로 꺼질 것 같은 순간에도, 허공으로 날아갈 것 같은 순간에도, 두 발을 지상에 착! 가뿐히 붙여주는 놀라운 효과가 있는 책이다. 강추까지는 아니더라도, 은근하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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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2011. 10. 28.)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식한 "역사상의 임금님"은 단연 세종, 이도 되시겠다. 책 중독자였던 어린 세종이 앓아 누워 태종이 일부러 세종에게 독서를 금지시켰는데도 기어코 어떤 서간집을 구해다가 읽었다는 일화를 처음 듣고, 당시 같은 또래의 어린이였던 내가 경악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세종은 언제나 옛 전설속의 성군으로, 위엄있고도 온화한 모습의 이상적인 임금으로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런 세종의 치세가 티끌없이 맑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세종 최대의 업적이라고 할 훈민정음의 창제가 결코 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세종의 끝없는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게 다 ㅇㅎ위키(...)와 뿌리깊은 나무(소설과 드라마 모두)의 덕분이다. 다만, 소설 뿌리깊은 나무 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이 훨씬 입체감이 강하다.(작품 자체의 문제의식의 깊이도 드라마가 훨씬 나은 것 같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은 조선의 뿌리를 자처하는 사대부 계층에서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 자명한 훈민정음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시키느라, 또한 자신의 정치 철학을 구현해내느라, 엄청난 짐을 혼자서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 세종은 트라우마에, 수면 부족의 (본질은) 신경질적인 인물로 입체적인 인물로 구현되어 있는데, 이를 제대로 재현해낸 배우 한석규와 송중기의 연기에 감탄하면서 매회 열심히 보고 있다. 아무튼 위 드라마에서는 훈민정음의 창제가 구성원들도 서로를 알지 못하는 점조직에 의한 철저한 비밀 프로젝트(그런데 문신을 새긴다는 것은 좀 웃긴다)로 나오는데, 당시 훈민정음의 창제라는 것이 당시의 세계관에 비추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의 구조를 설명하고, 훈민정음의 세계관이 당시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비추어 얼마나 혁명적인 것이었는지를 설명하는 책, "한글의 탄생"을 읽고 있다. 일본인 학자가 쓴 책인데, 마침 훈민정음의 이론적 사상적 기초가 알기 쉽게 설명된 자료를 찾기가 어려워서 덥석 집어들게 되었다.(인터넷에서는 일본인이 한글 연구를 한 사실 자체를 비판한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것 같은데. 진작에 이런 대중서를 펼쳐 내지 못한 우리나라 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게 아닐까 싶다.)

 

잠시 찾아 읽은 부분은 훈민정음 후서(훈민정음은 이 문자 체계의 제목이자, 이 문자 체계를 설명하는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를 작성한 정인지의 글 부분이었다. 혁명적인 문자 체계의 창조에 참여한 사람의 자긍심이 충분히 느껴져서 재미있었다.(정인지는 우리 하동 정씨의 몇 안되는 슈퍼스타라, 꽤 반갑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드라마에서 연기를 하고 있어서 친근하기도 하고.) 정인지가 작성한 후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바라건대, "훈민정음"을 보는 자가 스승 없이도 스스로 깨우치게 되기를. 그 연원과, 정밀하고 깊은 뜻의 묘미는 소신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구절에서 훈민정음-한글-이 본래 백성들을 어엿삐-여기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 떠올랐다. 쉽게 쓰여진 지식이 넘실넘실 펼쳐지고 전에는 문자체계에서 외면받았던 평범한 백성들이 그 수혜를 받는 모습을 기쁘게 그리면서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했을 세종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분명 그랬을 거다. 세종 개인이 어떠한 고난을 겪고 어떠한 고통을 견디어냈더라도, 그 마음만으로 그냥 세종은 내게 "이상적인 옛 임금님"이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오프닝이 이런저런 장면 마지막에 -한석규가 연기하는 신경질적인 세종으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세종이 인자한 미소를 얼굴 만면에 짓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매우 의미있어 보인다. 참고로, 원작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은-아마도 드라마에서도- 모두 치열한 생애를 정리하고, 그런 인仁한 임금님으로 역사속에 박제될 준비를 하며 결말을 맞는다. 

 메모 2(2011. 11. 2.) 

 현대의 한국어에도 고사성어 등 방대한 한문적 어휘가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며, 이를 제외해도 중국의 고전 한문적인 또는 한국 한문적인 색채를 강하게 보여주는 어휘가 적지 않다.

혹시, 우선, 과연, 가령, 설령, 어차피, 도대체, 하필, 여간, 부득이

이러한 어휘는 문장체=글말 적 문체에서 많이 사용된다. 근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개화기에는, 중국어로 착각될만큼 논설문 등에 한문적인 단어가 많이 등장하였다.

그중에서 혹시(或是)는 오늘날 회화체=입말에서도 아주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다. 원래의 의미 말고도,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대화를 시작할 때, 일종의 말 걸기 표현으로 흔히 사용되기 때문에 드라마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다. 한국어 모어화자에게는 이미 이것이 한자어라는 의식조차 상당히 흐릿하다. 갓을 쓴 양반이 무거워 보이는 장검을 등에 멘 주인공에게 `혹시, 거기 지나가는 양반` 하는 식으로 말을 거는 사극일면 몰라도, 현대의 트렌디 드라마에서 젊은 여주인공이 오랫동안 몰래 짝사랑하던 남자 주인공에게 처음으로 수줍게 말을 거는 가슴 설레는 장면-그때 쓰이는 말이 이 무거운 한자한문의 전통을 등에 멘 한 마디, 바로 그 `或是`인 것이다!

-한글의 탄생, 306쪽, "고유어의 혈맥과 한자한문 혈맥의 이중나선 구조" 중에서

* 위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아마 이 책에 등장하는 언어학적인 내용은 수 일 내에 내 머리속에서 증발될 것이다. 공부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읽은 책이 아니니깐.

그러나 위 책을 읽는 시간은 꽤나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전에 다이어리에 썼었던 훈민정음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책 자체가 "한글 사랑"의 에너지와 정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더불어, 위 인용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다소의 위트도.)

사실 한글이 언어학적으로 어떠한 위상을 가지는지, 한글을 창제한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어떻게 접근을 했는지, 한글이 어떠한 수모를 겪으며 여러가지 차원에서 발전을 이어왔는지, 한글이 시조 등의 문학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등의 문제는, 사실,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의 사실이 절실하고 가슴 벅차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의 저자와 같이(특히, 국적과 상관없이!).

이처럼, 내 삶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사소한 것들에도, 그것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하나하나에 그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직업 군단이 엄청나게 중요시 여기는 것들도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는 사소한 요소일 뿐일 이듯이 말이다. 그런 당연한 점을 깨닫게 해준 독서였다. :)

* 올해에는 독서량도 얼마 되지 않고, 책 자체에 큰 애정을 쏟으며 독서를 한 것도 거의 없다시피 한데, 이 책은 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최고 애정 책(퀄러티나, 감동과 비례하지는 않는 그냥 `애정`) 두 권 중 하나로 임명합니다-두 권 모두 일본 학자가 쓴 인문 교양서다. 확실히 일본 학계가 양질의 대중서 출간에는 앞서나가는 듯.

* 위 책의 독서는 역시 "뿌리깊은 나무"와 관계가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위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한글 반포는 1443년, 그리고 세조가 정권을 탈취한 계유정난은 1453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뜨아...불과 10년 사이의 일이었다. 드라마의 철없는 성삼문과 박팽년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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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희랍어 시간"이라는 소설을

작가의 전작도 읽어본 적 없고, 책 내용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제목과 표지에 이끌려(북 디자인의 중요성이란!) 사놓고 있다가, 이번 주 금, 토, 일 삼일만에 다 읽었다.

 

전에 썼던 다이어리의 내용처럼 "이야기의 힘과 재미"에 집착하는 나의 취향과는 많이 다른 소설이었다. 주된 사건은 한, 두개. 대부분 별 것 아닌, 소소한 과거의 사건들에 시선을 향하고 있는 소설인데....난 이 소설이 전혀 싫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함께 천천히 하강하는 느낌이-그것도 밝고 따뜻한 깊은 물 속으로- 들었다. 종종 있다, 이 소설처럼 물 안에서 물 밖의 빛을 바라보는 듯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한 소설들이. 그런데 마침 마지막 직전 챕터의 제목이 "심해의 숲"이어서, 이 소설의 느낌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참고로,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시력을 잃어가는 사람으로, 세상을 깊은 물속에서 바라보는 빛으로 보고 있고, 여자 주인공은 말을 잃은 시인으로, 글과 말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는 삶을 살았으며, 이 사람이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는 발음이 "숲"이었다. 두 사람 모두 심해의 물고기 같은 삶을 살고 있었고.) 

 

이런 소설을 읽으면, 그 직후의 나의 삶도 조금은 뿌연 느낌으로, 내가 바라보는 사물 위에 문자와 문장이 촘촘히 찍히는 기분이 든다. 이럴 때는 조금은 멍하고, 따뜻한 기분이 든다. 이 소설에 대한 리뷰나 평론, 심지어 책 뒷면에 있는 소개글조차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깊은 의미 같은 것 생각 안하고 그냥 느끼기만 해도 좋았던 것 같다.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이 당시 슬럼프에 빠져있었던 작가의 자가치유 과정이었다고 들었었는데, 과연 그랬었겠다 싶기도 하고.

 

p.13

어린 시절 여자는 영민한 편이었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받던 마지막 일 년 동안, 그녀의 어머니는 틈날 때마다 그녀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주었다. 마치 죽기 전에 가장 확실히 해둬야 할 일이 그것이라는 듯이.

언어에 관한 한 그 말을 사실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네 살에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아직 자모음에 대한 인식 없이 모든 글자들을 통문자로 외운 것이었다. 학교에 들어간 오빠가 담임선생을 흉내내어 한글의 구조를 설명해준 것은 그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설명을 들은 순간엔 그저 막연한 느낌 뿐이었는데, 그 이른 봄의 오후 내내 그녀는 자음과 모음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마당에 쪼그려앉아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발음할 때의 ㄴ과 '니'를 달음할 때의 ㄴ이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고, 뒤이어 '사'와 '시'의 ㅅ 역시 서로 다른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합할 수 있는 모든 이중모음을 머릿속에서 만들어보다가, 'ㅣ'와 'ㅡ'의 순으로 결합된 이중모음만은 모국어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적을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년 후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되어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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