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희랍어 시간"이라는 소설을

작가의 전작도 읽어본 적 없고, 책 내용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제목과 표지에 이끌려(북 디자인의 중요성이란!) 사놓고 있다가, 이번 주 금, 토, 일 삼일만에 다 읽었다.

 

전에 썼던 다이어리의 내용처럼 "이야기의 힘과 재미"에 집착하는 나의 취향과는 많이 다른 소설이었다. 주된 사건은 한, 두개. 대부분 별 것 아닌, 소소한 과거의 사건들에 시선을 향하고 있는 소설인데....난 이 소설이 전혀 싫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함께 천천히 하강하는 느낌이-그것도 밝고 따뜻한 깊은 물 속으로- 들었다. 종종 있다, 이 소설처럼 물 안에서 물 밖의 빛을 바라보는 듯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한 소설들이. 그런데 마침 마지막 직전 챕터의 제목이 "심해의 숲"이어서, 이 소설의 느낌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참고로,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시력을 잃어가는 사람으로, 세상을 깊은 물속에서 바라보는 빛으로 보고 있고, 여자 주인공은 말을 잃은 시인으로, 글과 말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는 삶을 살았으며, 이 사람이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는 발음이 "숲"이었다. 두 사람 모두 심해의 물고기 같은 삶을 살고 있었고.) 

 

이런 소설을 읽으면, 그 직후의 나의 삶도 조금은 뿌연 느낌으로, 내가 바라보는 사물 위에 문자와 문장이 촘촘히 찍히는 기분이 든다. 이럴 때는 조금은 멍하고, 따뜻한 기분이 든다. 이 소설에 대한 리뷰나 평론, 심지어 책 뒷면에 있는 소개글조차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깊은 의미 같은 것 생각 안하고 그냥 느끼기만 해도 좋았던 것 같다.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이 당시 슬럼프에 빠져있었던 작가의 자가치유 과정이었다고 들었었는데, 과연 그랬었겠다 싶기도 하고.

 

p.13

어린 시절 여자는 영민한 편이었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받던 마지막 일 년 동안, 그녀의 어머니는 틈날 때마다 그녀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주었다. 마치 죽기 전에 가장 확실히 해둬야 할 일이 그것이라는 듯이.

언어에 관한 한 그 말을 사실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네 살에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아직 자모음에 대한 인식 없이 모든 글자들을 통문자로 외운 것이었다. 학교에 들어간 오빠가 담임선생을 흉내내어 한글의 구조를 설명해준 것은 그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설명을 들은 순간엔 그저 막연한 느낌 뿐이었는데, 그 이른 봄의 오후 내내 그녀는 자음과 모음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마당에 쪼그려앉아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발음할 때의 ㄴ과 '니'를 달음할 때의 ㄴ이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고, 뒤이어 '사'와 '시'의 ㅅ 역시 서로 다른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합할 수 있는 모든 이중모음을 머릿속에서 만들어보다가, 'ㅣ'와 'ㅡ'의 순으로 결합된 이중모음만은 모국어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적을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년 후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되어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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