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1(2011. 10. 28.)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식한 "역사상의 임금님"은 단연 세종, 이도 되시겠다. 책 중독자였던 어린 세종이 앓아 누워 태종이 일부러 세종에게 독서를 금지시켰는데도 기어코 어떤 서간집을 구해다가 읽었다는 일화를 처음 듣고, 당시 같은 또래의 어린이였던 내가 경악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세종은 언제나 옛 전설속의 성군으로, 위엄있고도 온화한 모습의 이상적인 임금으로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런 세종의 치세가 티끌없이 맑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세종 최대의 업적이라고 할 훈민정음의 창제가 결코 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세종의 끝없는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게 다 ㅇㅎ위키(...)와 뿌리깊은 나무(소설과 드라마 모두)의 덕분이다. 다만, 소설 뿌리깊은 나무 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이 훨씬 입체감이 강하다.(작품 자체의 문제의식의 깊이도 드라마가 훨씬 나은 것 같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은 조선의 뿌리를 자처하는 사대부 계층에서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 자명한 훈민정음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시키느라, 또한 자신의 정치 철학을 구현해내느라, 엄청난 짐을 혼자서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 세종은 트라우마에, 수면 부족의 (본질은) 신경질적인 인물로 입체적인 인물로 구현되어 있는데, 이를 제대로 재현해낸 배우 한석규와 송중기의 연기에 감탄하면서 매회 열심히 보고 있다. 아무튼 위 드라마에서는 훈민정음의 창제가 구성원들도 서로를 알지 못하는 점조직에 의한 철저한 비밀 프로젝트(그런데 문신을 새긴다는 것은 좀 웃긴다)로 나오는데, 당시 훈민정음의 창제라는 것이 당시의 세계관에 비추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의 구조를 설명하고, 훈민정음의 세계관이 당시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비추어 얼마나 혁명적인 것이었는지를 설명하는 책, "한글의 탄생"을 읽고 있다. 일본인 학자가 쓴 책인데, 마침 훈민정음의 이론적 사상적 기초가 알기 쉽게 설명된 자료를 찾기가 어려워서 덥석 집어들게 되었다.(인터넷에서는 일본인이 한글 연구를 한 사실 자체를 비판한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것 같은데. 진작에 이런 대중서를 펼쳐 내지 못한 우리나라 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게 아닐까 싶다.)

 

잠시 찾아 읽은 부분은 훈민정음 후서(훈민정음은 이 문자 체계의 제목이자, 이 문자 체계를 설명하는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를 작성한 정인지의 글 부분이었다. 혁명적인 문자 체계의 창조에 참여한 사람의 자긍심이 충분히 느껴져서 재미있었다.(정인지는 우리 하동 정씨의 몇 안되는 슈퍼스타라, 꽤 반갑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드라마에서 연기를 하고 있어서 친근하기도 하고.) 정인지가 작성한 후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바라건대, "훈민정음"을 보는 자가 스승 없이도 스스로 깨우치게 되기를. 그 연원과, 정밀하고 깊은 뜻의 묘미는 소신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구절에서 훈민정음-한글-이 본래 백성들을 어엿삐-여기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 떠올랐다. 쉽게 쓰여진 지식이 넘실넘실 펼쳐지고 전에는 문자체계에서 외면받았던 평범한 백성들이 그 수혜를 받는 모습을 기쁘게 그리면서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했을 세종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분명 그랬을 거다. 세종 개인이 어떠한 고난을 겪고 어떠한 고통을 견디어냈더라도, 그 마음만으로 그냥 세종은 내게 "이상적인 옛 임금님"이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오프닝이 이런저런 장면 마지막에 -한석규가 연기하는 신경질적인 세종으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세종이 인자한 미소를 얼굴 만면에 짓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매우 의미있어 보인다. 참고로, 원작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은-아마도 드라마에서도- 모두 치열한 생애를 정리하고, 그런 인仁한 임금님으로 역사속에 박제될 준비를 하며 결말을 맞는다. 

 메모 2(2011. 11. 2.) 

 현대의 한국어에도 고사성어 등 방대한 한문적 어휘가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며, 이를 제외해도 중국의 고전 한문적인 또는 한국 한문적인 색채를 강하게 보여주는 어휘가 적지 않다.

혹시, 우선, 과연, 가령, 설령, 어차피, 도대체, 하필, 여간, 부득이

이러한 어휘는 문장체=글말 적 문체에서 많이 사용된다. 근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개화기에는, 중국어로 착각될만큼 논설문 등에 한문적인 단어가 많이 등장하였다.

그중에서 혹시(或是)는 오늘날 회화체=입말에서도 아주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다. 원래의 의미 말고도,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대화를 시작할 때, 일종의 말 걸기 표현으로 흔히 사용되기 때문에 드라마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다. 한국어 모어화자에게는 이미 이것이 한자어라는 의식조차 상당히 흐릿하다. 갓을 쓴 양반이 무거워 보이는 장검을 등에 멘 주인공에게 `혹시, 거기 지나가는 양반` 하는 식으로 말을 거는 사극일면 몰라도, 현대의 트렌디 드라마에서 젊은 여주인공이 오랫동안 몰래 짝사랑하던 남자 주인공에게 처음으로 수줍게 말을 거는 가슴 설레는 장면-그때 쓰이는 말이 이 무거운 한자한문의 전통을 등에 멘 한 마디, 바로 그 `或是`인 것이다!

-한글의 탄생, 306쪽, "고유어의 혈맥과 한자한문 혈맥의 이중나선 구조" 중에서

* 위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아마 이 책에 등장하는 언어학적인 내용은 수 일 내에 내 머리속에서 증발될 것이다. 공부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읽은 책이 아니니깐.

그러나 위 책을 읽는 시간은 꽤나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전에 다이어리에 썼었던 훈민정음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책 자체가 "한글 사랑"의 에너지와 정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더불어, 위 인용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다소의 위트도.)

사실 한글이 언어학적으로 어떠한 위상을 가지는지, 한글을 창제한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어떻게 접근을 했는지, 한글이 어떠한 수모를 겪으며 여러가지 차원에서 발전을 이어왔는지, 한글이 시조 등의 문학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등의 문제는, 사실,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의 사실이 절실하고 가슴 벅차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의 저자와 같이(특히, 국적과 상관없이!).

이처럼, 내 삶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사소한 것들에도, 그것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하나하나에 그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직업 군단이 엄청나게 중요시 여기는 것들도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는 사소한 요소일 뿐일 이듯이 말이다. 그런 당연한 점을 깨닫게 해준 독서였다. :)

* 올해에는 독서량도 얼마 되지 않고, 책 자체에 큰 애정을 쏟으며 독서를 한 것도 거의 없다시피 한데, 이 책은 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최고 애정 책(퀄러티나, 감동과 비례하지는 않는 그냥 `애정`) 두 권 중 하나로 임명합니다-두 권 모두 일본 학자가 쓴 인문 교양서다. 확실히 일본 학계가 양질의 대중서 출간에는 앞서나가는 듯.

* 위 책의 독서는 역시 "뿌리깊은 나무"와 관계가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위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한글 반포는 1443년, 그리고 세조가 정권을 탈취한 계유정난은 1453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뜨아...불과 10년 사이의 일이었다. 드라마의 철없는 성삼문과 박팽년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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