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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정신과 앞에서 머뭇거리는 당신에게 - 마음의 병,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지침서
허찬희 지음 / 그래도봄 / 2024년 4월
평점 :
본론1 --욕망과 흔적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동안 무한에 대한 사념속에서 살아온지가 거의 40년이 되었다. 심한 피해망상과 과대망상과 환청 그리고 텔레파시 속에 살고 있다. 나의 정신병 경험은 환청과 텔레파시를 다르게 취급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환청은 나와 다른 정신병 환우들과 같은 것이지만 텔레파시는 사람들에 따라서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본론--
욕망과 흔적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동안 무한에 대한 사념속에서 살아온지가 거의 40년이 되었다. 심한 피해망상과 과대망상과 환청 그리고 텔레파시 속에 살고 있다. 나의 정신병 경험은 환청과 텔레파시를 다르게 취급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환청은 나와 다른 정신병 환우들과 같은 것이지만 텔레파시는 사람들에 따라서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근래에 와서 정신병이 많이 호전되어 이러한 글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받고 뽐내고 싶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욕망은 해결해야 된다. 욕망을 벗어나야 된다는 것보다 욕망을 해결해야 된다고 본다. 욕망은 타자들에게 기대려는 것에서 나온다. 상대방에게 기대면 상대와 자기가 같이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마음의 상처는 억압으로 자리잡게 되어 병이 더욱 깊어진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생각난다. 욕망은 자기를 살아야 해결된다. 대지의 나무처럼 사바세계를 긍정하고 자기의 힘을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억압하면서 특정한 종교나 철학에 빠져들면 정신병을 치유하기 어렵다. 그리고 자기를 치료하는 것이 동시에 자기와 남을 같이 치유케 한다는 자타일여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대면 억압이 온다. 그 무엇을 자꾸 원해서도 안되고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이 때문에 자기를 스스로 괴롭힌다고 본다. 현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에서 미래의 적당한 꿈을 꾸면서 현존해야 한다. 현존은 비교를 일삼지 말아야 한다. 비교는 결국 타자 때문에 자기를 억압하는 것이다. 욕망해결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고 있는 미래의 꿈에 기대어야 한다. 그러니 사태는 되고 있는 현존이 미래의 꿈에게 의지해야 된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과 미래의 꿈이 우리에게는 항상 이미 존재케 한다. 무의식 때문에 결국 과거나 미래를 경험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흔적이다. 흔적은 은유다. 흔적은 자기동일성이 없다. 실체는 사라지고 흔적만이 남는다. 연결-연기 와중이 흔적이다.
실체와 흔적은 집착의 문제이외의 다른 것은 없다. 실체는 집착이 강하다는 것이다. 흔적은 움직임으로 그보다 집착이 적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데까르트와 헤겔을 넘어서면서 쇼펜하우스의 의지와 표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니체에 이르러 권력의 의지를 말하면서 실체중심주의와 우상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되었다. 니체의 신의 죽음 그리고 푸꼬의 인간의 종언 그리고 데리다의 상호간의 이중 텍스트성을 말하면서 흔적의 건강한 경험에 이르런다. 헤겔의 절대지와 하이데거의 존재자와 사르트르의 즉자를 함께 묶는 실체주의의 퇴보를 말하게 된다. 실체주의의 허상을 흔적이론으로 대체하게끔 되었다. 데리다의 흔적이론은 은유이론으로 봐야 한다. 은유는 실체주의의 플라톤의 계보를 청산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쓰려는 것인가. 그것은 항상 이미 무언가 모자라는 건강한 의지-건강한 집착을 써내려 가는 것이다. 욕망론은 집착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다. 집착의 소멸을 받아들여야 된다. 실존주의의 거두인 사르트르 마저도 ‘지옥 그것은 타자’이라고 말한바 있다. 우리는 헤겔의 ‘원한감정’과 칸트의 물자체와 사르트르의 대자의식의 즉자 불가능성을 말하면서 플라톤과 그의 계보가 만들어내는 우상주의와 이상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에서 항상 우상으로 남게 되버리는 무의식적 텍스트성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무의식적 텍스트는 진리와 신과 헤겔과 칸트의 순수이성,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초월하는 것이다. 아무리 현존의 중심주의도 그 현존은 미래와 꿈을 같이 나눌 수밖에 없다. 꿈과 함께하는 현존과 미래를 목적으로 하는 동양의 이상주의라고 볼 수 있는 서원의 발의가 꼭 필요한 것이다. 니체가 말한바 있는 영원회귀와 같은 그런 꿈을 우리의 존재계는 긍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