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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돌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상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들어서는
담요 아래로 머리를 파묻고
두 무릎을 끌어당겼다.
나이는 마흔 살가량, 하지만 이 순간엔 아니다.
있는ㅡ 일곱 겹 살갗 너머 엄마 배 속,
보호되는 어둠 속에 있는 동안.
내일은 전 은하계를 비행할 때의
인체의 항상성(恒常性)을 강의할 거지만,
일단은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 쉼보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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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믿어선 안 될 것은  

삶을 부정하는 인간의 나 자살할 거야, 란 떠벌림이다.  그런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알콜릭 정도가 적당하다.   

(...)

물론 이것은 험담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이다, 라는 얘기다.   

담배를 꺼내 문다. 재래식 상가가 이어진 이 골목은 때로 담배연기만큼이나 가늘고 불투명하다.  

 

- 아침의 문, 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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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가능성   

 

                                                                                                             * 쉼보르스카  

 

 

영화관을 좋아한다.

고양이들을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들을 더 좋아한다.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디킨슨을 더 좋아한다.
인류를 사랑하는 자신보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이 지혜 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예외를 더 좋아한다.
일찍 집에서 나서기를 더 좋아한다.
의사와 다른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한다.
빗살무늬로 인쇄된 낡은 그림을 더 좋아한다.
시를 쓰지 않을 때의 해학보다
시를 쓸 때의 해학을 더 좋아한다.
십년마다 맞이하는 기념일이 아닌
나날을 기념일로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
너무 쉽게 믿는 것보다
교활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민간인들의 땅을 더 좋아한다.
약탈하는 나라보다 약탈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의심을 가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 일면보다 그림(Grimm)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들을 더 좋아한다.
꼬리의 일부를 잘라내지 않는 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기 때문에 옅은 눈을 더 좋아한다.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여기 지적하지 않은 많은 것들보다
여기 지적하지 않은 않은 많을 것을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정렬되지 않은
분리된 제로를 더 좋아한다.
별들의 시간보다 곤충들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복이 달아나지 않도록 생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라고 묻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가 자기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그 가능성조차 고려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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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이 되려면 좋은 것들이 흐르게 하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을 받아서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너는 단지 마음을 비우면 된다. 신의 목소리가 네 마음으로 흘러들어 오고, 또 너를 통해 다른 이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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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샐리 헤이스와 함께 이걸 본 적이 있는데, 샐리는 무대 의상이나 장식이 참으로 아름답기 짝이 없다고 계속 말했다. 나는 예수가 이런 호화찬란한 의상 따위들을 본다면 아마 구토를 참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샐리는 나더러 신을 모독하는 무신론자라고 했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좋아할 사람은 그 오케스트라에서 작은북을 치는 단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죽 보아왔는데, 부모와 함께 보러 갔을 때 나와 동생 앨리는 이사람을 더 잘 보려고 자리를 옮기곤 했다. 그렇게 훌륭하게 북을 치는 사람은 일찍 본 적이 없다. 
 

나를 미치게 만든 것은 내 옆 한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는데, 그 숙녀가 영화가 계속되는 동안 줄곧 울더라는 사실이다. 영화가 엉터리로 되어가면 갈수록 더 우는 것이었다. (...) 영화의 엉터리 같은 이야기에 눈이 빠지도록 우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본질적으로 야비한 것들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이덕형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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