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드무비 > 엷은 락스 냄새가 풍겨오는 듯...
공허의 1/4 - 2004 제2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수영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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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확실히 나는 뭔가 불안정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는 편인가.
관리사무소 앞 차량에서 영광굴비인지 꽃게인지를 딱 30분 동안 정가의 절반에 싸게 판다는
방송으로 처음 내 귀에 잡힌 우리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 청년의 목소리.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도 그 청년의 목소리는 여전히 듣는 사람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심하게 상기되어 떨리어 나온다.
며칠 전 아파트 주민 무료진료를 알리는 방송에 귀기울이던 나는
순전히 그 청년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하자보수 신청서를 가지고 관리사무소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슬며시 했다.

간결하고 매력적인 제목에 끌려 이 책을 골랐다.
2004년 오늘의 작가상 공동 수상작인 한수영의 장편소설 <공허의 1/4>은 
작은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오래 전부터 앓고 있는 류머티스 관절염 치료약의 부작용으로 그녀는 엄청 비대해져
걷는 것도 힘겨울 정도다.
늙어도 사나움이 조금도 가시지 않은 어머니는 휴지뭉텅이를 얻어오는 재미에
약장수 패거리 주위를 얼씬거리다가  어마어마한 액수의 옥매트를 몰래 사들고 온 날,
난생 처음으로 상냥하고 비굴한 모습을 딸에게 보여준다.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이 월급의 3분의 1을 축내는 먼 도시의 요양소에 있는  언니 등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생활이란 건 한마디로 갑갑함 그 자체이다.

주변 인물은 어떤가!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초로의 관리소장과,
청소와 쓰레기 정리서껀 하루종일 아파트를 돌며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잡역부 김씨,
좀 머리가 모자란 그에게 술을 먹이고 지분거리는 청소부 아줌마들의 골방,
죽은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엄마가 있다는 먼 행성 안드로메다로 떠날 것을 꿈꾸느라
수업을 밥먹듯 빠지는 어린 소년.

어찌 보면 좀 작위적인 설정 같기도 한데 내가 몰라서 그렇지 바로 내 주변에
한 명씩은 꼭 있을 법한 인물들이다.  어쩌면 내가 그들 중의 한 명일 수도.......
유사시 음독을 하기 위한 독약을 몸에 지닌 기분으로 항시 사무실 책상서랍 속에
소주 한 병을 숨겨두는 그녀.

--몇 년 동안 신춘문예에 응모한 적도 있었다.
(...) 해마다 1월 1일이면 나는 가판대에서 사온 신문을 옆에 놓고
목삼겹살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불판 위의 목삼겹살을 보며 나는 울었다.
정말이지 삼겹살 같은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비계와 살코기가 기가 막히게 어울려 있는 조직.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목삼겹만큼만 쓰고 싶었다.
불판 앞에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관절염까지 찾아들었다. 볼펜을 오래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새천년을 몇 달 앞에 두고 나 혼자 절필을 선언했다.(53쪽)

나는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아본 적도 없고 신춘문예에 응모해 본 적도 없지만
락스 냄새가 희미하게 떠도는 어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더러는 마이크를 들고 방송도 하고
온갖 잡무를 처리하고 다니느라 절룩대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내가 꼭 그녀인 듯한
쓸쓸하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공허의 4분의 1'은 류머티즘 관절염에 최고라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쨍쨍한  햇볕, 거기서도
룹알할리라는 사막  이름이다.
그곳에 가서 차도르로 얼굴을 가린 채 평생을 살면서 몸속의 습기를 모두 말리고
어긋난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나도 빨래처럼 바위에 널어  바싹 말려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세상이 너무 완벽해 보여서 내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이는 것이 젊은 날의 고민이었다면,
끼어들고 싶은 곳이 더이상 없는 중년의 날들도 공허의 4분의 1은 차지하지 않을까.
함께 실린 '개와 늑대의 시간'과 ' '십일월' 두 단편도  빨려들어가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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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먹고사는 건 중요하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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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성석제가 동인문학상을 받았을 때, 안티조선 사이트에는 성석제를 비난하는 글들이 여럿 올라왔다.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동인문학상을 왜 받느냐는 것.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성석제는 한번도 안티조선 측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전업작가다. 직장에 다니면서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며, 다른 문인들처럼 문창과 교수 타이틀도 없다. 자기가 책을 써서 밥벌이를 해야 한다. 황석영 쯤 되는 거목이 아니라면, 전업작가가 동인문학상을 거부한다는 건 그 밥줄을 놓아야 한다는 뜻이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상금으로 내걸린 5천만원은 얼마나 큰 돈인가. 그런 사정도 감안하지 않은 채 무조건 “왜 상을 받냐”고 하는 건, 그 대의가 아무리 옳다 해도 지나친 행위다. 공선옥이 동인문학상을 거부했을 때, 안티조선 회원 5천명이 나서서 “우리 저렇게 훌륭한 일을 한 공선옥의 책을 두권씩만 사주자” 같은 일을 한 적도 없다. 1만권만 팔린다면 안티조선을 선언할 동기부여는 충분히 되는데 말이다. 그런 일도 안하면서 작가가 동인문학상을 받을 때마다 “왜 받아?”라고 비아냥대기만 하는 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


성석제는 재치있는 소설들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작가다. 하지만 올해 나온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는 특유의 발랄함이 다소 주춤하고, 진지하고 성찰을 요하는 단편들이 주를 이룬다. 제목부터 무거운 표제작은 물론이고, 먼 친척의 사망을 다룬 <잃어버린 인간>, 그리고 <소풍> 또한 이 범주 안에 든다. 새로 부임한 또라이 서장을 다룬 <만고강산> 정도만이 과거 성석제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 그러고보니 <황만근>에서 극에 달했던 만연체 문장도 이번 책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설의 재미가 떨어진 것은 아닌지라 순식간에 읽어내려갈 수 있었으며, 읽고 난 뒤의 여운도 오래 남는다.


이문열이나 이인화처럼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는 작가도 있지만, 성석제는 그런 작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극중 인물의 입을 빈 다음 구절은 성석제가 올바른 판단력을 가진 작가-적어도 내게는 올바르다는 소리다-임을 말해준다.

“우리는 박정희가 어떤 인간인지 안다. 그 사람, 타까끼 마사오라는 자는 해방 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 때려잡던 일본 관동군에 있다가 해방되고 나서는 여순사건 때 빨개이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같은 빨개이들을 일러바치고 살아남은 사람이다. 형인가 하는 사람도 빨개이로 총에 맞아죽었다. 나중에 빨개이 때리잡는다 카는데 그기 다 지가 뒤가 구린께 하는 수작 아이겠나...중앙정보부 맨들어가이고 간첩 잡는다고 억울한 사람을 얼매나 잡았나”

아전인수인지 모르겠지만, 다음 말은 현재 추진 중인 과거사법에 대한 작가의 지지로도 읽힌다.

“왜정 때 나쁜 짓 한 놈들은 뒤질 때까지 떵떵거리미 살고 독립운동 한다고 굶고 병들고 쫓기댕기던 사람은 죽는 것도 제명에 옳기 죽지도 못하고 말이라”


성석제의 책이 많이 팔려서 돈을 많이 벌기를, 그래서 먹고 사는 고민 없이 열심히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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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힌 > 우리는 모두 달팽이 예비군
달팽이 전선 1
후지카와 카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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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2 시절이라는 것-달팽이 예비군

와카모리 아사코는 고2. 학기 초에 그만 짝사랑에 돌입, 그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중인 여학생. 대상은 순진 무구한 미소의 소유자, 학교 육상부의 사쿠라. 운동장에서 연습 중인 사쿠라를 바라보는 일이 아사코의 하교길 즐거움이다. 그러던 중 마치 허물인 것처럼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 위를 기어 가는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그 달팽이는 학교의 꽃인 카지와라 아츠시였다. 그는 과스트레스 상태가 되면 달팽이로 변신하는 이른바 멀티 인간. 사쿠라와 같은 육상부원으로 성적 우수, 스포츠 만능인 아츠시에게 단 하나의 핸디캡이 있다면 바로 연체동물로 변신하는 그것이었다. 그로부터 아사코는 달팽이 헬퍼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바람에 아츠시의 단짝 친구인 사쿠라와도 친구가 되지만 문제는 너무나 민감한 아츠시와 너무나 둔감한 사쿠라 사이에 끼이게 됐다는 것. 아니 그보다는 사쿠라에게 가는 과정에 아츠시라는 섬세하고 민감하고 생각도 많고 게다가 아사코를 그지없이 좋아하는 달팽이가 곁에서 꼼지락거리게 되었다는 것. 그들의 섬세한 고교생활이 담담하게, 그러나 쉽게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게 그려지는데.

첫사랑이 있는 시절이라고 해야 되나, 저도 모르게 '내가 왜 이래~~~!' 하게 되는 그 시절을? 그 시절이, 어디에도 속한다 단정지을 수 없는, 일본과 우리 나라의 특수한 상황, 고2 시절이 이 만화 안에서 달팽이 예비군으로 구현된다. 특별히 동감하는 바는 그 시절의 미묘함인데. 프레쉬맨으로서의 흥분도 가라앉고 그러나 아직은 수험생의 마음가짐만은 아니어도 되는,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되는 시절. 갑자기 커버리는 시절이자, 절대고독이라는 생경한 인간의 영역에 발목을 잡히게 되는 순간이 있는 시절. 그래서 그 시절만큼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때도 없는 고2. 사실은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그 여름에 자기 앞날을 결정짓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봤었다. 그래서 이 만화에 각별한 애정이 부어지는지도. 그리고 달팽이가 되어 버리는 아츠시가 그 시절을 그야말로 리얼하게 살아가고 있는 소년으로 보이는지도.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와 보면.....
과연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던가? 사랑에 빠졌었나? 아니면 어떤 결단을 내리기라도 했던가? 과연 나는 좌충우돌했던가?

<회상모드 on ――――――――――――!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그 길과 그 옛 궁궐의 정원과 조용한 평일의 나무들이, 길가에 늘어선 찻집과 커다란 돌로 지어진 화랑들이 떠오른다. 그것들은 모두 지금보다 이십 년 정도 젊은 채다. 열 여덟 살인 주인공들처럼 기억 속 그 때의 나도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왜 그 길을 걷고 있었을까.  

지금도 내 기억 속의 그 길은 가을 속으로 뻗어 있다. 노란 은행잎과 말라서 주글주글하고 어떤 것은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진 플라타너스 잎들이 그 길 위를 바람을 타고 구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예삿길 같지 않은 넓은 보도는 다른 한편의 기억으로는 항상 깨끗하고 밝은 회색빛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택한 길이 항상 가을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회색빛 길은 자꾸 가을 속으로만 들어가 버린다.

나는 언제 주로 그 길을 찾아갔을까.  

학교가 일과를 마쳐야 교문이 열렸다. 그것은 언제나 까맣거나 아주 짙은 흑록색이었다. 그 교문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길게 구부러지는 내리막길을 백여 미터 걷다 보면 왼쪽으로 84라는 번호를 전후좌우에 찍은 시내버스의 회차 지점이 보였다. 당시의 내가 절대 탈 일이 없었던 84번 버스. 대개는 길게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보였지만 어쩌다 가끔, 곧 길을 떠나려는 버스가 그 사람들을 가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띌 때가 있었다. 나는 내 발이 그 쪽으로 방향을 트는 힘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무엇’에나 홀린 듯 돌연히, 마치 습관처럼 당연하면서도 예사롭게 나는 줄 선 사람들을 가리고 선 그 버스를 향해 뛰어가서 사람들의 행렬 끝에 섰다가 그들을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한강을 건너 버스가 용산을 지난다.

집과는 반대 방향. 그 때 서울에서 이십 년째 살고 있던 나의 부모는 일 년에 딱 한 번, 그 길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 기억은 흑백사진 한 장 속에 정확한 형태로 남아 있다. 어린 날의 어린이날. 그 사진 속의 나는 풍선을 들고 창경원 넓은 뜰에 서있다. 이 만화를 읽고 있는 지금으로 따진다면 삼십 년 전의 일이다. 풍선은 하얗게 내 머리의 오른쪽 허공에 박혀 있다. 고궁의 전문 사진사가 찍은 그 사진 속의 우리 가족은 모두 마치 무대화장을 한 사람들처럼 이목구비가 정교하다. 그 안에서 우리가 웃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사실은 웃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때라면 분명 집 안에 웃음이 있었는데, 다른 자리에서, 다른 시간 위에서 우리 가족을 떠올릴 때면 그 웃음이 기억 나질 않는다. 왜일까?

내가 열 여덟의 나이에 혼자서 평일 오후의 고궁을 찾았던, 막 떠나려고 하는 버스를 보면 꼭 타고 같이 길을 떠났던 그 이유와 같은 것일까?

옛 왕들의 놀이터 겸 산책로였다는 화강암으로 만든 길이 둘러싸고 있는 호수, 그 위에 떠 있는 물풀과 수련 잎, 따로 입장료를 내야 하는 박물관.. 그것들을 바라보며 열 여덟 살의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무의 초록색으로 위장한 조악한 시멘트 벤치에 앉아 수백 년을 자라온 나무들과 모서리가 관록으로 으깨진 석탑을 바라보며 내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그것은 단지 형상일 뿐이다. 그 때의 내게는 ‘어디’로부터 혹은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욕구도, 강박감도, 위기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불완전한 형상으로, 분위기나 느낌으로만 기억해낼 수 있을 뿐, 아직까지도 고유의 의미를 부여받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일종의 괄호와도 같은 무의미한 실존일 뿐이다.

내가, 버스를 타고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내가, 커다란 박물관에 들어가 두어 개씩의 전시실을 학자처럼 유심히 관람하고 있다.
내가, 경회루 호숫가에 이젤을 세우고 묽은 수채물감을 찍어 바르는 화가의 굵은 붓끝을 바라보며 멈춰서 있다.
내가, 밝은 햇살과 떨어진 나뭇잎들을 잠깐 휘젓다 사라지는 바람이 있을 뿐인 황량한 고궁의 넓은 정원에 서있다.
내가, 고궁의 여기저기에서 걸어 나온 몇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폐궁 시간임을 알리는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궁 문을 나서고 있다.
내가, 아직도 햇살이 눈부신 고궁의 문을 올려다 보고 서있다.
내가,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려고 세종로 큰길을 걸어가고 있다.
내가, 검은 감색 교복을 입고 칠 킬로그램 정도의 책가방을 들고 있다.
내가, 버스에서 내려 경인국도 그 넓은 도로를 횡단해 흰 연탄재가 넘치는 쓰레기통들이 집 앞 대문 마다 마다에 놓인 동네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내가, 부근의 다른 주택들보다는 그래도 페인트의 유광이 조금은 더 남아있는 짙은 초록색 대문 앞에 서있다.

내가 어딘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타는 버스는 나를 경복궁 앞에 내려 주었다. 서울 외곽에는 호젓하게 혼자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부랑배들을 두려워 했다. 학교에서조차 사색이나 고뇌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은 단선적이고 즉흥적이고 폭력적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때, 오솔길에서 만날지도 모를 부랑배들은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치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시외곽의 오솔길이 아닌 도시 한가운데의, 은밀하게 조종되고 감시되는 조용한 고궁을 선택한 것이다. 그 곳에는 새와 나무와 호수, 수초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주시할 시간도 뜻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러했음을 안다. 나는 그 방임의 절제된 뜰이 좋았다. 방임의 절제된 뜰. 여기, 조용히, 한가하게, 내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아무도 오지 않는,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 않는, 내 집같은.

――――――――――――― 회상모드 off>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에. 그 고궁에 있던 내 시간들이 지금의 나에게 와서 어떤 무늬로 자리하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집으로 가는 길을 거슬러 고궁을 혼자 찾아간 것이 달팽이 예비군의 또 다른 양상은 아니었을까? '그 때'란 그저 내게 '일종의 괄호와도 같은 무의미한 실존'일 뿐이지만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자기만의 양상에 대한 해석이 한 줌이라도 있다면 확실히 그 사람은 혼자라는 것에 면역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자기만의 양상 속을 헤매어 본 사람이라면 혼자임을 견디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것. 그 시기가 바로 열 여덟 살 속에 들어 있다. 그래서 그 시절은 인생에 있어서의 아주 중요한 전기이자 황홀한 여백인 것이다.

그 시기를 생각하게 하는, 지금도 그 시기를 어떻게 견디고 극복했었는지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달팽이 전선>은 또 하나의 세상을 펼쳐 보인다. 마치 추억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는 듯이.  

2. 사람 마음의 결을 느끼는 재미

그들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아츠시는 아사코가 참으로 마음에 들지만 아사코는 친구인 사쿠라만을 좋아한다. 전형적인 삼각 관계. 단정지어 보자면 그렇다. 그러나 그 관계의 전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지겨움이 깃들 틈새가 없다면? 과연 어떻게 그려지길래?

감정의 파고를 간단히 누를 수 있는 아사코와는 달리, 감정의 파고 자체를 쉬이 느끼지 않는 사쿠라와는 달리, 아츠시는 그 감정의 파고라는 것에 따라 몸이 변해버릴 정도다. 이 아이의 마음 속은 안도와 불안 속에서 늘 시계추처럼 흔들리는데. 그 파고의 촉매자이자 그 파고의 종결자인 아사코가 여전히 자신이 곁에 있어 줄 것임을 선언해도 아츠시는 혼자서 불안하다. 그는 가끔, 앞날이 몹시 불안한 연체동물인 것이다. 그 반면 아사코는 혼자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 친구 후미가 있고 사랑하는 사쿠라가 있고 같이 있어줘야 할 아츠시가 있으며 의지할 수 있는 키이치라는 아빠같은 사촌 오빠가 있다. 묻고 대답하고 실천해 가면서 아사코의 나날은 지나간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걱정이 많고, 아츠시가 달팽이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도 받아들이는 포용력의 소유자, 아사코와 같이 있을 때 아츠시는 편안하다. 그리고 불안하다. 아사코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리고 현재 아사코는 아츠시가 아닌 사쿠라를 좋아하고 있다. 아츠시에게 아사코는 가 닿을 수 없는 cozy nest인 것이다. 그들은 과연 한 곳에서 만나지게 될까? ^^;;

<달팽이 전선>의 매력은 사쿠라만 바라보는 아사코에게 아츠시가 다가가는 해프닝들을, 아사코가 사쿠라에게 다가가는 해프닝들을, 둘 다 잃고 싶지 않지만 그 속에서 결국 갈피를 잡아야 하는 사쿠라의 몇 안 되는 해프닝들을 처리하는 작가의 각고에서 발견된다. 삼각관계라는 전형적 재료의 식상함에 낚일 만큼의 여유가 없어진다. 대사나 독백 하나 하나가 깊은 사고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해하고 넘어가기 힘들다. 그것은 그만큼의 각고가 숨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진전되는 단계마다 멈추지 않을 수 없는 컷들이 시선을 잡아 끈다. 그리고 조용히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드러난 마음의 결을 음미하게 한다. 독자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작가가 인물들 마음의 결을 아주 세세하게 건져 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말풍선 바깥의 글들을 읽고 있다 보면 어느새 그 인물의 마음 속을 헤집고 다니게 된다. 이런!

출판만화가 아니라면 드러내기 아려운 효과가 완벽하게 드러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말풍선 바깥의 말에서 한껏 멈춰 서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야기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 동여매 주는 문자의 위력이 있는 것이 바로 출판만화 아닌가? 나는 그래서 에니매이션보다 출판만화를 선호한다. ^^ 출판 만화에선 사람 마음의 결이 정말 천진난만하게 드러난다. 결코 넘치지 않는 문자의 매력. 과장되고 왜곡된 만화적 표정 속에서 삶의 포커스를, 그림 속 표정이 감춘 것을 읽어 주는 말풍선 바깥의 말에서 그 삶의 리얼리티를, 설명이나 비유없이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이야기의 끝점에까지 나름의 진화를 해가는 것이다. 그 진폭의 놀라움이라니.. 가끔 가슴까지 두근거리게 하는... 그것이 풍부한 <달팽이 전선>이라 평가한다면 좀 과도할까? 그림체의 엉성함을 가리는 그 고운 결을 느끼는 데엔 <달팽이 전선>에 부족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효과를 즐기는 데에 <너버스 비너스>가 더불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덤!

 

느린 달팽이의 사랑

유하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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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웃사이더를 꿈꾸며..  2004-04-30 오전 9:44:47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이란...

여러 실용서들이 넘쳐나는 요즈음이다. 그 중 가장 많은 주제는 돈버는 것,

그리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시간을 잘 쓰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그 많은 것들을 보노라면 어지럼증이 난다.

누구나 한 목소리로 한길로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어 버릴 것 같은 위기감..

우리 사회는 이상한 위기감이 팽배하다.

무리지어 '우우'몰려다녀야 할 것 같은..

완전한 아웃사이더도 되지 못하면서 그 속으로 뛰어들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주변을 겉돌고만 있다.

흘끔흘끔 곁눈질이나 하면서..

진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완전한 아웃사이더가 되어보는 것.

아침형 인간이 선풍인 이 세상에서 저녁형 인간들만 모여사는 세상을 꿈꾸는 나.

하지만 꿈은 언제나 꿈일 뿐이다.

거실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을 바라보며 뿌듯하고 행복해 하면서도

시간없음이란 어줍잖은 핑계로 바라만보다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만 있다.

 

완전한 나로 자유롭게 있어보고 싶은

꿈은..............

그저 꿈일뿐..

 

오늘 아침의 하늘은................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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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캔디
백민석 지음 / 김영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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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목이 뭐 이러냐. 캔디라니. 캔디바를 말하는 건가. 만화주인공 캔디를 말하나. 아님 그룹이름인가.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한때 우리를 매혹시켰던 어떤 만화 영화의 주제가'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 누구나 성장기 시절을 겪는 동안 우리를 매혹시켰던, 돌아보면 별 의미도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어느 날 깨몽처럼 사라져 버리고 삽시간에 벗어나면서 우리는 성장하게 된다.

캔디는 주인공 '나'가 고3때부터 사랑해온 동성친구이다. 캔디는 '칫'하는 어떤 의미도 담지 않는 웃음을 갖고 있다. 캔디는 조지 마이클을 좋아하고 긴 속눈썹과 젖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캔디는 거대한 구름기둥 바깥에 있다.

전교조 1세대인 '나'는 이상한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고3의 불안한 시기동안 학교의 모순과 비리를 겪었다. 재수시기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조직과 사회의 부조리와 역겨움을 겪었고 대학에 들어가 데모대에 참여하여 화염병을 던졌다. 캔디를 벗어난 세상은 그에게 전혀 영웅적이지도 아름답지 않았다.

- 나는 가두 투쟁이 있는 날이면 화염병을 들고 대열의 맨 앞에 서곤 했다. 마스크와 생리대 패드가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가투 현장의 그 모든 것들엔 언제나 척, 하는 경향들이 만연해 있었다. 자동소총인 척, 방독면인 척, 추격전인 척, 정의의 사자인 척, 악당인 척...나 역시 늘 총잡이인 척, 했다.

혈연, 학연, 지연이 중요시되는 사회, 조직.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사람들은 갖다 버릴 물건처럼 취급된다. 조금만 손상되어도 폐기처분해버리는 때로는 성한 것보다 상한 것이 더 많은 백화점 창고의 바나나처럼 말이다. 꿈도 희망도 근사한 사랑도 멋진 낙원도 없다. 사랑은 두시간 짜리 비디오 돌아가는 시간만큼이나 짧고 덧없어 보이고 아득했다.

- 우리가 할리퀸 러브로망 문고에서 종종 읽을 수 있는, 그리고 비디오 숍에서 구해 오는 110분짜리 로맨스물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그런 서스펜스와 대모험으로 가득 찬 사랑을 우리도 소유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겪어온 성장기는 어떤 모습일까. 백민석의 '내가 사랑한 캔디'는 슬프도록 솔직하고 날카롭다. 병적 증상을 보이며 버텨야했던 고등학교, 폐기처분의 종말로 치달아 가는 사회인들과 눈 깜짝하지 않는 매정한 자본주의, 허구, 가짜, '척'만이 판을 치는 대학교. 미친 듯이 총질을 해대는 마음의 총잡이를 갖고 있는 '나'는 절규한다.

- 왜 저도 반장도 캔디도 아저씨도 항상 머저리에다 바보일 수밖엔 없는 거죠? 호모가 아니면 발기부전, 아니면 변태일 수밖에 없는 거죠? 왜 항상! 왜 다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채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무너져가는 세상을 향해 절규하고 비난하고 쏘아붙이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매혹되어 몰두하지만 깨몽에서 깨어난 후 휘둘러본 세상은 너무나 황폐하다. '나'는 캔디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지만 그녀는 옛날 애인 얘기만을 들으려고 하고 '나'는 캔디 노래만을 부르려고 한다. 그러니 둘은 연결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성장기를 지나온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이 발전한다고 믿지 않으며 발전하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실현되지 않을 이상을 기다리는 고통보다는 차라리 도끼의 단칼을 아쉬운 것이다. 우리는 과연 성장한 것일까.

- 어쩌면 누군가를 쏘아 쓰러뜨리는 데 혐오감을 느끼고는, 더 이상 그러한 자신을 참아내지 못했던 걸까요. 아니면 어느 정치가의 말처럼,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두려움 그 자체가 두려웠던 것일까요. 또 아니면 주인공은 거기서 자길 죽여 줄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그럴 능력이 있는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실망만 하고 종국에 가선 스스로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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