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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캔디
백민석 지음 / 김영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뭐 이러냐. 캔디라니. 캔디바를 말하는 건가. 만화주인공 캔디를 말하나. 아님 그룹이름인가.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한때 우리를 매혹시켰던 어떤 만화 영화의 주제가'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 누구나 성장기 시절을 겪는 동안 우리를 매혹시켰던, 돌아보면 별 의미도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어느 날 깨몽처럼 사라져 버리고 삽시간에 벗어나면서 우리는 성장하게 된다.
캔디는 주인공 '나'가 고3때부터 사랑해온 동성친구이다. 캔디는 '칫'하는 어떤 의미도 담지 않는 웃음을 갖고 있다. 캔디는 조지 마이클을 좋아하고 긴 속눈썹과 젖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캔디는 거대한 구름기둥 바깥에 있다.
전교조 1세대인 '나'는 이상한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고3의 불안한 시기동안 학교의 모순과 비리를 겪었다. 재수시기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조직과 사회의 부조리와 역겨움을 겪었고 대학에 들어가 데모대에 참여하여 화염병을 던졌다. 캔디를 벗어난 세상은 그에게 전혀 영웅적이지도 아름답지 않았다.
- 나는 가두 투쟁이 있는 날이면 화염병을 들고 대열의 맨 앞에 서곤 했다. 마스크와 생리대 패드가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가투 현장의 그 모든 것들엔 언제나 척, 하는 경향들이 만연해 있었다. 자동소총인 척, 방독면인 척, 추격전인 척, 정의의 사자인 척, 악당인 척...나 역시 늘 총잡이인 척, 했다.
혈연, 학연, 지연이 중요시되는 사회, 조직.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사람들은 갖다 버릴 물건처럼 취급된다. 조금만 손상되어도 폐기처분해버리는 때로는 성한 것보다 상한 것이 더 많은 백화점 창고의 바나나처럼 말이다. 꿈도 희망도 근사한 사랑도 멋진 낙원도 없다. 사랑은 두시간 짜리 비디오 돌아가는 시간만큼이나 짧고 덧없어 보이고 아득했다.
- 우리가 할리퀸 러브로망 문고에서 종종 읽을 수 있는, 그리고 비디오 숍에서 구해 오는 110분짜리 로맨스물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그런 서스펜스와 대모험으로 가득 찬 사랑을 우리도 소유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겪어온 성장기는 어떤 모습일까. 백민석의 '내가 사랑한 캔디'는 슬프도록 솔직하고 날카롭다. 병적 증상을 보이며 버텨야했던 고등학교, 폐기처분의 종말로 치달아 가는 사회인들과 눈 깜짝하지 않는 매정한 자본주의, 허구, 가짜, '척'만이 판을 치는 대학교. 미친 듯이 총질을 해대는 마음의 총잡이를 갖고 있는 '나'는 절규한다.
- 왜 저도 반장도 캔디도 아저씨도 항상 머저리에다 바보일 수밖엔 없는 거죠? 호모가 아니면 발기부전, 아니면 변태일 수밖에 없는 거죠? 왜 항상! 왜 다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채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무너져가는 세상을 향해 절규하고 비난하고 쏘아붙이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매혹되어 몰두하지만 깨몽에서 깨어난 후 휘둘러본 세상은 너무나 황폐하다. '나'는 캔디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지만 그녀는 옛날 애인 얘기만을 들으려고 하고 '나'는 캔디 노래만을 부르려고 한다. 그러니 둘은 연결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성장기를 지나온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이 발전한다고 믿지 않으며 발전하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실현되지 않을 이상을 기다리는 고통보다는 차라리 도끼의 단칼을 아쉬운 것이다. 우리는 과연 성장한 것일까.
- 어쩌면 누군가를 쏘아 쓰러뜨리는 데 혐오감을 느끼고는, 더 이상 그러한 자신을 참아내지 못했던 걸까요. 아니면 어느 정치가의 말처럼,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두려움 그 자체가 두려웠던 것일까요. 또 아니면 주인공은 거기서 자길 죽여 줄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그럴 능력이 있는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실망만 하고 종국에 가선 스스로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