卓秀珍 탁수진 2003-10-30
중용 사람을 등용하는데 자기의 일족이라고 해서 사양할 필요도 없거니와, 또는 원수라고 해서 그것을 피할 필요도 없다. 모두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발탁해서 써야 한다. -한비자 ----=----=----=----=----=----=----
경쟁사회에서 "적당히"라는 말은 죄악이다. 어떤 한 면이 반드시 특출나야 한다. 그래야 눈에 띄고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쓰러지는 이유가 그 특출난 한 면 때문이다.
칼을 잘써서 흥한 사람은 칼을 잘써서 망하고, 글을 잘써서 흥한 사람은 글을 잘써서 망하고, 돈을 잘써서 흥한 사람은 돈을 잘써서 망한다. 아이러니다.
그러나 자연을 보면 그 모순된 부분이 설명된다. 나무는 물에 뜬다. 그러나 불에 탄다. 돌은 물불에 강하다. 그러나 물에 가라앉는다. 그래서, 거친 바다를 건너온 나무가 장작불에 재가 되고 물불을 견디는 강한 돌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근데 인간은 할 수 있다. 나무에 화재방지 약품처리를 할 수도 있고, 바다까지는 아니더라도 돌로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다.
인간이 머리가 좋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융통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무가 언제까지고 나무여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고, 돌이 언제까지고 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기에.
위에 소개한 한비자의 말을 듣고 생각나서 문득 한 번 적어봤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중용이 아닐까. 중용보다 더 어려운것이 중용의 유지가 아닐까.
어떤 경우에는 적당히 사는것도 필요한것 같다. 한비자의 말대로 친족이건 원수건간에 내가 그 사람을 바로 쓰기 위해서는 지나친 감정개입이나, 지나친 도덕규범 중시는 방해가 될테니까.
학교의 도덕시험 응시중에 틀린 답을 찾아낼 때 "지나친"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답을 금방 알아챘던 그 시절과는 달리 지금의 내 마음, 또는 내 몸은 아직도 답을 찾는 중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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