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골드 - 이슬람 제국의 '새하얀 금' 백인 노예들의 잊혀진 이야기 가일스 밀턴 시리즈 5
가일스 밀턴 지음, 이충섭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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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인들은 이주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편에는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신세계 개척에 쓰일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이때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들은 법적 자유를 얻을 때까지 백인들의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이것이 흔히 알려진 흑인 노예들의 이야기다. 여기 알려지지 않은 노예들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백인 노예들이다. 가일스 밀턴은 지금껏 숨겨진 백인 노예들의 이야기를 ‘화이트 골드’에서 펼치고 있다.

17세기 모로코는 알라위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다.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은 잔혹함으로 그 일대 부족들을 모두 통일하여 절대적인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모로코의 서쪽 해안 도시인 살레에는 해적이 들끓었다. 이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다니는 유럽 선박들을 납치해 물건을 약탈하고 사람들은 노예시장에다 팔았다. 물라이 이스마일은 해적들이 잡아오는 백인 노예들을 좋아해 그들의 약탈행위를 장려했다. 왕조의 수도인 메크네스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백인 노예들이 갇혀 있었다. 이들은 살을 태우는 햇볕 아래 하루 15시간씩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유럽의 왕들은 사신을 보내 비싼 값에 백인 노예들을 다시 사왔다. 하지만 변덕이 심한 술탄이 협상을 밥 먹듯 뒤집어 이마저도 결코 쉽지 않았다.

물라이 이스마일이 죽은 후 알라위 왕조의 세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왕위를 이어받은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다. 모로코는 다시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이 틈을 타 영국군은 백인 노예가 가장 많은 알제를 공격해 승리했다. 파수꾼들이 떠나자 수 천 명의 갇혀있던 백인 노예들이 우리에서 뛰쳐나와 환호했다. 영국군은 알제의 태수와 협약을 맺어 백인 노예 제도의 종말을 고했다.

백인 노예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유럽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과학 기술과 학문, 문학, 예술, 군사력 등 모든 측면에서 다른 대륙보다 앞섰다. 각 시대를 결정짓는 담론도 유럽의 산물이다. 다른 대륙들은 유럽의 눈부신 성장을 따라 하기 위해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배워야했다. 유럽인들의 기질과 문화의 우수성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백인 노예의 이야기는 생소하고 놀라울 수밖에 없다. 가일스 밀턴은 노예가 된 유럽인들이 무슬림 밑에서 겪은 고초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뿐만 아니라 유럽인으로서 결코 다루고 싶지 않았을 배교자들에 대해서도 충실히 서술한다. 영국인인 저자가 자국의 치욕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어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그러나 저자는 백인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이슬람세계가 아닌 백인 노예들을 다룬다. 모로코에 끌려온 백인 노예들이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하는지 얘기한다. 벌레가 우글거리는 좁은 공간에서 수십 명의 노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잔다. 식량은 기름 한 숟갈, 빵 한 조각이 전부다. 그들은 술탄의 궁전 건설에 동원되어 하루 15시간씩 일한다. 병에 걸리면 의사를 만나볼 겨를 없이 죽는다. 수많은 노예들이 병으로 죽고 새로 잡혀온 노예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술탄에게 자비란 없다. 그는 기분에 따라 옷을 골라 입듯 사람을 다양한 방법으로 처형한다. 변덕이 심해 그 누구도 목숨을 보장받지 못한다. 약속이나 조약도 소용없다. 탐욕도 끝이 없다. 그는 더 크고 화려한 궁전 짓기에 여념이 없다. 일반 무슬림도 그 어느 누구 백인 노예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지배자인 무슬림은 악이고 피지배자인 백인 노예는 선이라는 이분법이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밀턴이 이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백인 노예가 남긴 사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그 자료들은 혹독한 노예 생활을 견딘 백인들이나 모로코에서 그 장면들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 작성했다. 불쌍한 백인 노예의 삶과 이슬람의 잔혹성이 대비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밀턴은 노예들 개개의 이름을 언급하여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토마스 펠로우의 경우 납치당했던 15살부터 가족에게 다시 돌아갔던 해인 38살까지 25년의 노예 살이 과정이 상세하게 언급되어있다. 다른 노예들도 짧게나마 이름과 사연이 있다. 이에 반해 술탄을 제외한 무슬림들은 중성적이다. 그들은 ‘부채를 부치는 신하’, ‘술탄의 총애를 받는 아내’라고 묘사될 뿐이다. 이러한 백인 중심의 서술 방식 때문에 읽는 이는 백인 노예 제도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유럽과 이슬람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가 종교이다. 유럽은 대표적인 기독교 지역이고 중동 및 아프리카는 이슬람지역이다. 유럽과 이슬람의 갈등 바탕에는 늘 종교가 있었다. 모로코로 끌려온 백인 노예들은 개종을 강요받았다. 배교자가 되면 강제 노역에서 해방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로코에서 직업을 갖고 가정도 꾸릴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노예들은 개종을 거부했다. 당시 유럽 각국은 백인 노예들을 되사기 위해 술탄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협상은 결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술탄이 노예들을 비싼 값에 되팔기도 했다. 그러나 배교자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 무슬림이 되면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단념해야한다.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배교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이들은 죽더라도 기독교인으로 남아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육체적인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개종을 거부할 필요가 있었을까. 유럽 국가들은 왜 배교자들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을까. 현재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에 종교는 개인과 국가에게 절대적이었다. 개종은 국가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것이 이슬람이 백인 노예들에게 개종을 강요한 이유다. 변절자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없으므로 이슬람을 배신할 수 없다. 프랑스는 노예 해방 협약을 체결했을 때 가톨릭이 아닌 노예들을 거부했다. 영국의 사제도 배교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구제에 반대했다. 비록 생김새가 달라도 같은 종교인이면 친구나 가족이 될 수 있다. 반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해도 종교가 다르면 가족이 아니다. 즉 종교는 사람들의 관계를 규정하고 사회 제도를 결정, 유지하는 유일무이한 권력이었다.

백인 노예제도는 영국군이 무력으로 이끌어낸 조약으로 폐지되었다. 화려했던 이슬람 제국은 반란으로 더욱 더 분열되고 급기야 유럽의 지배를 받는다. ‘화이트 골드’는 백인 노예들을 다루는 동시에 이슬람 제국의 마지막을 보여준다. 물라이 이스마일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67km에 달하는 거대한 궁전을 건설했다. 이는 세계 그 어떤 궁전보다 크고 화려했다. 그곳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식량과 금, 비단, 무기가 저장되어 있었으며 각국의 아름다운 여성들이 할렘에 거주했다. 수도 마크네스에는 다양한 물건과 상인들로 북적였고 해안가에는 교역을 위해 정박한 배들이 줄을 지었다. 황금기의 모로코는 제국의 분열과 함께 사라졌다. 지금은 건조한 모래 바람과 황량함만 남았다. 나뒹구는 몇 가지 유물과 성곽의 터가 예전의 그 화려함을 짐작케 할뿐이다.

전체적으로 책은 밀턴의 세부 묘사로 채워져 있다. 백인 노예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술탄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의 글을 읽다보면 저절로 영상이 그려진다. 개인의 사적인 자료를 이용해 각색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이야기는 지루하지 않다. 토마스 펠로우라는 영국 출신 노예가 탈출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400페이지 넘는 분량을 관통하는 주요 소재이다. 흐름이 단조롭지 않은 것은 순전히 밀턴의 풍부한 상상력 덕분이다. 픽션도 논픽션도 아닌 애매한 장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논픽션에 픽션을 가미했다고 볼 수도 있다. 백인 노예라는 소재자체가 충분히 흥미로운데다 저자의 픽션이 더해져 책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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