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환상문학전집 13
루돌프 에리히 라스페 지음, 귀스타브 도레 그림, 이매진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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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기대어 감동을 간직하고 있는 책들을 샀다가 그 멋대로 만들어진 환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닌데 예를 들면 교회의 십자가에 말이 걸려 있고 남작은 바닥에 널부러진 추억의 삽화 같은 것이 몇 점 누락되어 있다든가 하는 사소한 사항에서 예전에 읽던 그 책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책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동명의 외국산 토크 게임을 친구들이랑 둘러앉아 하면서였다. 재미있는 것은 다들 책이 재미있었다는 사실을 기억은 하는데, 그 스토리의 완벽한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 그만큼 뮌히하우젠의 거짓말은 기상천외하고,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황당하긴 하다.

그 내용을 일부나마 다시 재확인하게 해 주는 출판물이 나온 건 반가운 일이긴 한데, 글쎄, 가능하면 원판을 번역하는 게 낫다지만 잘 알려진 뷔르거의 판본이 번역되었다면 좀더 두껍고 재미있는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총알보다 빠른 사나이나, 믿을수 없이 힘센 거한 같은 조력자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아프리카 유람 따위보다는 훨씬 재미있었으니까.

시대상을 반영한 통속 문학이니만큼, 남작의 입을 빌려 동시대의 인물들을 저속하게 희화화 하거나 비판한 부분, 단지 용맹을 드러내기 위한 동물에 대한 잔혹함은 추억의 작품에 대한 감동을 매우 많이 깎는 부분이었다. 제국주의의 수법을 풍자한 부분은 시대적인 배경을 감안할 때 획기적이고 날카로운 풍자라고 여겨졌으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작가의 견해에는 아무래도 동의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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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런틴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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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SF의 스펙트럼은 실로 다종다양하다. 스타워즈처럼 과학의 이름만 빌린 우주총과 스타일리쉬한 의상만으로 승부하는 활극부터, 할 클레멘트로 대표되는 야심찬 과학 강의에 이르기까지. 허나 아무래도 시장과 마케팅의 한계가 있다 보니 국어로 번역되는 것들은 한쪽에 치우쳐진 것들이 될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스펙트럼의 다른 한 끝, '소설로 하는 과학 숙제'로 대표되는 하드 SF 종류들은 그 딱딱함으로 인해 거의 접할 수 없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력의 임무> 이래 제일 하드한 소재의 SF이자 나온지 10년 좀 넘은 현대 SF가 기획되고 국어로 완역되었다는 사실은 반갑고도 놀라울 따름이다. 해설에 나온 대로 컴퓨터 공학 학위로 무장한 호주 작가의 야심찬 성실함은 가공할 만하다. 반갑게도 양자역학에서 측정(measurement)이라 불리는 기본 개념의 틈새를 마치 논문 쓰듯 공략해 나가는데, 마침 물리를 아직도 배우는 터라 대부분의 용어를 주석 없이 이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술이 맞는지 판단하기 위해 대학 전공 때 배웠던 책을 들쳐 보고, 간간이 책읽기를 멈추고 주류의 양자 가설과 뭐가 다른지 따져야 했을 정도로 이 책은 하드했다.

인간의 관측으로 인해 수많은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이 하나의 결과로 귀속되면서 가능했던 다른 개체들이 살해된다 - 는 것이나 다름없다 - 는 가설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한다는 면에서 편집증에 가깝긴 하지만 참신하며, 이런 설정으로 인해 주인공이 끊임없이 빠지는 존재의 정체에 대한 고뇌는 별다른 묘사 없이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한다. 1/3 정도 읽을 때는 깁슨 류의 사이버 테크놀로지에 대한 설명과 흔해빠진 '과거 있는 경찰'의 모티프로 무슨 얘기를 만들 수 있었을까 싶었는데, 과학을 원용한 고찰이 나오면서 비로소 무언가 참신한 것을 읽고 있다는 감이 찾아왔다.

물론 약점도 많다. 측정 행위가 인간 뇌내의 작용이기 때문에 신경 나노머신으로 그 개연성을 조정할 수 있다는 기본 논리는 지나친 비약을 넘어 농담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파동함수는 인간의 의지로 교란되는 것이 아니라 측정을 위해 사용되는 광자, 전기장(場), 기타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매체에 의해 교란된다는 것이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코펜하겐 가설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약을 가정함으로써 거시적 객체인 인간이 자유자재로 관측 이전의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으로 돌아가 터널링을 일으키며 모든 확률적 사건을 조작할수 있다는, 양자 신비주의라는 삼천포로 빠져버리는 것은 소설로서는 재미있긴 하나 일면 아쉽다.

[버블]이라는 인류적 재난(disaster)으로 시작해서 또한 재난으로 끝난다는 스토리가 맘에 든다. 재난이라는 점에서는 JG 발라드의 disaster 시리즈랑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른데, 발라드가 자연,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와 투쟁 끝에 불가항력적으로 서서히 무너져 가는 인간의 무력함을 묘사한다면, 그렉 이건의 우주론에 입각한 세계는 설정상 재난적 결말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것에 사이버 펑크의 무정부적 분위기와 종말론 단체 등등이 더해지면서 셰클리나 필립 딕 같은 느낌의 암울함을 만들어낸다 (그다지 참신하진 않지만).

자세한 것은 직접 독서에 도전해 보시길. 이 책의 논리를 따라가고, 거기서 헛점을 찾아내며, 어떤 편집증적 비약이 어떤 말도 안되는 결과를 낳는지 하나하나 찝어가는 것은 훌륭한 지적 유희일 것이다. 잔머리 굴리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독자라면 깁슨 풍(風)의 사이버 펑크 양념에 전념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걸프전의 바스라 학살 등 현대의 사건들이 언급되면서 더욱 있을법하게 느껴지는 미래. (심지어 한국도 짧게 언급된다!) 말초적 영상 예술들이 주장하는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같은 언사는 헛소리다, 라고 생각하는 페시미스트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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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살인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1
프레드릭 브라운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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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짧은 SF 단편으로 잘 알려진 프레데릭 브라운의 것으로는 처음 읽는 장편이다. 예전에 그의 SF 단편들을 읽고 그 깔끔하고 재치있는 마무리에 매혹되었던 기억이 있는지라 기대를 매우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절판된 동서 추리 문고의 '미래에서 온 사나이' 라는 단편집. 재간 목록에 없는 것이 거의 재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 책은 훌륭하다) 기대만큼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단편의 깔끔한 마무리를 장편에 시도한 결과는 왠지 어이없고 허무한 느낌으로 남았다.

그의 소설에는 언제나 특유의 기지와 유머가 넘치는데 이 장편도 예외는 아니다. 애인에게서 받은 돈을 어처구니 없게 털린 대목에선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어쩌면 인생이 이렇게 꼬이는 거지' 하는 느낌이 들어서 쓴웃음이 나오게 하는 서술은 딱 기대한 만큼이었고나 할까... 사전에 면식 없는 사람을 살해하여 맹세를 확고히 한다든가, 막판까지 치밀하게 잔머리를 굴리는 전개도 상당히 특이한 맛이 있고, 무엇보다 밑바닥 배우의 생활을 아기자기하고 지루하지 않게 묘사하는 브라운의 화술에 깊이 매료되어 단숨에 끝까지 갔는데,

어떻게 보면 요즘처럼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발달한 시대에는 있기 힘든 실수로 인한 결말, 그래서 와닿지 않는 결말. 주역들이 모두 한 호텔 방에 모여 겪는 소란스러운 해프닝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인과가 불분명해서, 도서추리물 특유의 주모자들에게 느껴지는 연민도, 모든 것이 얄궂은 운명의 장난 같다는 허탈함도 느껴지기 전에 책은 서둘러 끝을 맺고 만다.

해설에 보니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에게 영향을 받았다는데 그것을 읽고 비교해 보고 싶어진다. '낯선...'은 아마도 히치콕의 'stranger'의 원작인 것으로 아는데 어떨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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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앨런 피즈 외 지음, 이종인 옮김 / 가야넷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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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방자함에 대면 '화남금녀'는 양반이다. (물론, 화남금녀 첫 권에 해당되는 얘기) 책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모욕당한 듯한 기분을 금치 못했다. '여성의 90%가 제한된 공간 지각력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적 수치를 자신만만하게 강조하는 저자는, 그 단언으로 말미암아 다른 10%의 여성을 처절하게 모욕한다. 여성뿐만 아니라 십자수를 좋아하는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위험하게 느껴지는 것은, 진화나 호르몬으로 말하는 남녀의 차이는 이해될 수는 있어도 극복될 수는 없다는 측면. 사회화랑 진화를 교묘히 혼동하여 씀으로써 사회화에 의해 생기는 차이까지도 태생적 한계에 가두어 버리는데 정말 혀를 내둘렀다. 테스토스테론이 인식력을 높여준다는 얘기는 사주팔자가 인간의 명운을 결정한다는 얘기만큼 설득력이 없다.

이런 단정적 서술은 마치 점집에 갔을 때 점장이가 '자네 요즘 문제가 있군' 이라고 말하면 자기 입장을 언뜻 떠올리고 뜨끔하는 거랑 비슷한 효과를 낳는데, 덕분에 사람은 넘겨짚기에 불과한 얘기를 진리의 일부가 들어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개인적인 남녀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건 긍정적인 요소지만, 이러한 '남의일이 아닌데' 효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약효는 기껏해야 그뿐이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야 인류 공동의 주제임은 명백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 본서와 같은 '남/녀 일반론을 빙자한 편견의 집합체'가 TV등의 매체에 양서인 양 소개되는 것을 보면 슬퍼진다. 남녀가 생리학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거야 좋다. 남녀가 다르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점장이 넘겨짚기와 방법론적으로 똑같은 기만적 통계 수치로 '남자는 원래 그렇다' '여자는 원래 그렇다' 는 식의 섣부른 일반론에 경도되어 진정한 자기 능력을 인식치 못하는 것은 분명히 사회적인 손실이기 때문이다.

모욕받는 10%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리뷰를 썼다고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다. 맘에 안드는 것은 맘에 안든다고 얘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TV선전까지 탔다는 점도 포함하면 별 0개를 주고 싶은데 옵션이 없는지라 할 수 없이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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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슨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67
S.S. 반 다인 지음, 정광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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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스시리즈의 본질은 열혈이다' 라는 가설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작품. 왜냐면 번스가 탐정놀이에 뛰어들게 된 원인이 매컴을 약올리다가 서로 발끈하는 바람에.. :) 둘도 없는 친구와의 우정 탓에 관계도 없는 일에 뛰어드는 탐정이라니, 성질 한번 화끈하군.

만일 가장 짜증나는 타입의 탐정을 꼽으라면 누굴 꼽을 것인가? 조이스 포터의 도버 경감은 탐정이라고 하기 좀 그러니까 제외한다면 아마 파이로 번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셜록 홈즈형의 만능형 탐정들에게서 나타나는 자부심과 오만을 제쳐두고라도, 닝글닝글하게 돌려 말하는 것 하며, 또한 자기 친구(매컴)한테도 무엇하나 제대로 가르쳐 주는 게 없다. 그렇다고 트릭이 뭔가 기발하냐,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그럼 왜 읽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반 다인의 글재주(?)에 있는 것 같다. 화자이자 작가에, 번스의 대리인이자 조수 역할도 하고 있는 이 사람은 정말로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인물들의 액션에 대한 인간적인 설명을 끼워넣는데, 이런 연출은 사실 요즘 드라마들이 많이 써먹는 수법이다. 무뚝뚝하지만 알거 다 알고 챙겨주는 부모님이라든가, 말로 표현하지 않고도 통하는 동성 친구 같은 클리셰에서 느껴지는 인간적 정서의 울림은 거부하기 힘든 종류의 감성이다.

그런 점에서 번스랑 매컴 검사의 말싸움이 마치 미국 버디무비에서 형사 둘이 티격태격하는 거라든가 좀더 나아가 로맨틱 코미디의 연인들의 슬랩스틱 같은 분위기도 풍기는 것을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쓰여진 순서로 보나, 번스의 성격의 드러남으로 보나, 여러모로 반 다인 시리즈에 입문하기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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