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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런틴 ㅣ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외국 SF의 스펙트럼은 실로 다종다양하다. 스타워즈처럼 과학의 이름만 빌린 우주총과 스타일리쉬한 의상만으로 승부하는 활극부터, 할 클레멘트로 대표되는 야심찬 과학 강의에 이르기까지. 허나 아무래도 시장과 마케팅의 한계가 있다 보니 국어로 번역되는 것들은 한쪽에 치우쳐진 것들이 될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스펙트럼의 다른 한 끝, '소설로 하는 과학 숙제'로 대표되는 하드 SF 종류들은 그 딱딱함으로 인해 거의 접할 수 없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력의 임무> 이래 제일 하드한 소재의 SF이자 나온지 10년 좀 넘은 현대 SF가 기획되고 국어로 완역되었다는 사실은 반갑고도 놀라울 따름이다. 해설에 나온 대로 컴퓨터 공학 학위로 무장한 호주 작가의 야심찬 성실함은 가공할 만하다. 반갑게도 양자역학에서 측정(measurement)이라 불리는 기본 개념의 틈새를 마치 논문 쓰듯 공략해 나가는데, 마침 물리를 아직도 배우는 터라 대부분의 용어를 주석 없이 이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술이 맞는지 판단하기 위해 대학 전공 때 배웠던 책을 들쳐 보고, 간간이 책읽기를 멈추고 주류의 양자 가설과 뭐가 다른지 따져야 했을 정도로 이 책은 하드했다.
인간의 관측으로 인해 수많은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이 하나의 결과로 귀속되면서 가능했던 다른 개체들이 살해된다 - 는 것이나 다름없다 - 는 가설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한다는 면에서 편집증에 가깝긴 하지만 참신하며, 이런 설정으로 인해 주인공이 끊임없이 빠지는 존재의 정체에 대한 고뇌는 별다른 묘사 없이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한다. 1/3 정도 읽을 때는 깁슨 류의 사이버 테크놀로지에 대한 설명과 흔해빠진 '과거 있는 경찰'의 모티프로 무슨 얘기를 만들 수 있었을까 싶었는데, 과학을 원용한 고찰이 나오면서 비로소 무언가 참신한 것을 읽고 있다는 감이 찾아왔다.
물론 약점도 많다. 측정 행위가 인간 뇌내의 작용이기 때문에 신경 나노머신으로 그 개연성을 조정할 수 있다는 기본 논리는 지나친 비약을 넘어 농담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파동함수는 인간의 의지로 교란되는 것이 아니라 측정을 위해 사용되는 광자, 전기장(場), 기타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매체에 의해 교란된다는 것이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코펜하겐 가설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약을 가정함으로써 거시적 객체인 인간이 자유자재로 관측 이전의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으로 돌아가 터널링을 일으키며 모든 확률적 사건을 조작할수 있다는, 양자 신비주의라는 삼천포로 빠져버리는 것은 소설로서는 재미있긴 하나 일면 아쉽다.
[버블]이라는 인류적 재난(disaster)으로 시작해서 또한 재난으로 끝난다는 스토리가 맘에 든다. 재난이라는 점에서는 JG 발라드의 disaster 시리즈랑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른데, 발라드가 자연,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와 투쟁 끝에 불가항력적으로 서서히 무너져 가는 인간의 무력함을 묘사한다면, 그렉 이건의 우주론에 입각한 세계는 설정상 재난적 결말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것에 사이버 펑크의 무정부적 분위기와 종말론 단체 등등이 더해지면서 셰클리나 필립 딕 같은 느낌의 암울함을 만들어낸다 (그다지 참신하진 않지만).
자세한 것은 직접 독서에 도전해 보시길. 이 책의 논리를 따라가고, 거기서 헛점을 찾아내며, 어떤 편집증적 비약이 어떤 말도 안되는 결과를 낳는지 하나하나 찝어가는 것은 훌륭한 지적 유희일 것이다. 잔머리 굴리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독자라면 깁슨 풍(風)의 사이버 펑크 양념에 전념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걸프전의 바스라 학살 등 현대의 사건들이 언급되면서 더욱 있을법하게 느껴지는 미래. (심지어 한국도 짧게 언급된다!) 말초적 영상 예술들이 주장하는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같은 언사는 헛소리다, 라고 생각하는 페시미스트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