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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냐가 1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부족 전통의 존속을 위해 인위적으로 환경을 조성한 새로운 행성을 받아 주술사로서 새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프롤로그를 읽고서는 90년대 초에 잠깐 유행했던 '원시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문명 비판을 담은 얄팍하기 짝이 없는 도서들을 떠올리고 별로 재미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로 흘러가서 뜻밖의 기쁨을 누렸다. 신화와 우화를 섞어가며 아프리카의 오지에 와 있는 듯한 전반부의 분위기 묘사도 훌륭하고, 주인공이 그렇게 지키려 하던 전통이 힘을 잃고, 격리된 세계의 자체 모순이 드러나면서, 격리가 어떠한 계기로 인해 허물어지면서 신비롭던 신화와 우화들이 그 힘을 잃어가는 모습까지 무척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얘기가 재미있다. 전통을 옹호하며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응대하는 방법도 흥미진진하고, 사회가 허물어지는 후반부에도 이벤트 중심의 서술을 하여 재미를 잃지 않는다. 케냐의 미래상에 대해서는 조금 과장된 감이 없지 않지만... 마지막 얘기는 어째 남의 얘기가 아닌 듯 해서 좀 서글프기까지 했다. 책 속 케냐인들의 전통에 대한 박물관식 관점은 문화재를 수동적으로만 보존하려 하고 아무도 계승하지 않으려는 태도랑 비슷하다.
'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소녀'와 '자살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에피소드는 정말 무릎을 치며 읽었다. 이상향의 자체 모순이라는 주제를 직접 말하기보다, 현상을 먼저 제시함으로써 설득력을 얻는 것인데, 그들이 가진 문제는 젊은 현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서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도전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
물론 이 사고실험이 아주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자연에 의존하는 부족사회에서 사냥을 하지 않았다는 설정은 약간 이상하게 보인다. 그것이 호전적인 타 부족에 대한 반발이었다 해도 말이다. 마빈 해리스도 지적했듯이, 단백질 섭취 향상의 욕구는 언제나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던가...
파국적 결말에 대해서는 씁쓰레하지만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주술사가 안고 있던 문제는 다른 문명을 무시할 수 없게 된 열린 세계에서, 인간의 행동 반경이 훨씬 작았던 원시 시대의 닫힌 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 것이 아닐까. 엄밀히 말하면 닫힌 계도 아닌데, 그가 행성 통제를 위한 서양 문물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배척하는 그 무엇에 기대어야만 유지되는 사회, 문은 닫혀 있지만 바로 맞닿아 있어 계기가 생기면 바로 열릴 나라, 이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실험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