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경감 듀 동서 미스터리 북스 80
피터 러브제이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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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삼각 불륜에 가까운 전개에서 갑자기 얼토당토 않은 추리게임으로 바뀌는 전환이 너무 기막히다. 전환 이후 얘기는 걷잡을 수 없이 달려가고, 우여곡절 끝에 갖가지 해프닝이 기분좋게 해결되면서 독자의 얼굴엔 미소가 떠오른다...  "이 인물과 이야기는 왜 나왔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 초반부에서 긴장이 좀 떨어지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흥미를 끌게 되는 그 때까지 참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내겐 두번 읽게 될 작품이 될 것 같진 않다. 어쩌면 번역이 한몫하고 있는 것인지도... 툭툭 끊어지는 듯한 문체는 여지껏 들어온 러브시의 명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 밖에, 연애 소설에 빠진 노처녀의 심리에 대한, 길면서도 우스운 묘사를 높이 치고 싶다. 다만 그것만으로 알마의 동기가 성립한다는 것은 별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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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냐가 1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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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 전통의 존속을 위해 인위적으로 환경을 조성한 새로운 행성을 받아 주술사로서 새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프롤로그를 읽고서는 90년대 초에 잠깐 유행했던 '원시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문명 비판을 담은 얄팍하기 짝이 없는 도서들을 떠올리고 별로 재미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로 흘러가서 뜻밖의 기쁨을 누렸다. 신화와 우화를 섞어가며 아프리카의 오지에 와 있는 듯한 전반부의 분위기 묘사도 훌륭하고, 주인공이 그렇게 지키려 하던 전통이 힘을 잃고, 격리된 세계의 자체 모순이 드러나면서, 격리가 어떠한 계기로 인해 허물어지면서 신비롭던 신화와 우화들이 그 힘을 잃어가는 모습까지 무척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얘기가 재미있다. 전통을 옹호하며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응대하는 방법도 흥미진진하고, 사회가 허물어지는 후반부에도 이벤트 중심의 서술을 하여 재미를 잃지 않는다. 케냐의 미래상에 대해서는 조금 과장된 감이 없지 않지만... 마지막 얘기는 어째 남의 얘기가 아닌 듯 해서 좀 서글프기까지 했다. 책 속 케냐인들의 전통에 대한 박물관식 관점은 문화재를 수동적으로만 보존하려 하고 아무도 계승하지 않으려는 태도랑 비슷하다.

'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소녀'와 '자살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에피소드는 정말 무릎을 치며 읽었다. 이상향의 자체 모순이라는 주제를 직접 말하기보다, 현상을 먼저 제시함으로써 설득력을 얻는 것인데, 그들이 가진 문제는 젊은 현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서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도전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

물론 이 사고실험이 아주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자연에 의존하는 부족사회에서 사냥을 하지 않았다는 설정은 약간 이상하게 보인다. 그것이 호전적인 타 부족에 대한 반발이었다 해도 말이다. 마빈 해리스도 지적했듯이, 단백질 섭취 향상의 욕구는 언제나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던가...

파국적 결말에 대해서는 씁쓰레하지만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주술사가 안고 있던 문제는 다른 문명을 무시할 수 없게 된 열린 세계에서, 인간의 행동 반경이 훨씬 작았던 원시 시대의 닫힌 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 것이 아닐까. 엄밀히 말하면 닫힌 계도 아닌데, 그가 행성 통제를 위한 서양 문물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배척하는 그 무엇에 기대어야만 유지되는 사회, 문은 닫혀 있지만 바로 맞닿아 있어 계기가 생기면 바로 열릴 나라, 이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실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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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생일 - 21세기 SF 도서관 1 그리폰 북스 5
어슐러 K. 르 귄 외 지음, 가드너 도조와 엮음, 신영희.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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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도서관이라고 하기에는 그 양이 결코 많다고는 볼 수 없고, 편집자가 잡지-웹진-출판-TV-영화 전반에 걸쳐 친절하게 전해주는 소식은 이미 몇년 지난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 부분을 읽으며 '이런 드라마가, 영화가 있었지, 이런 잡지도'라고 생각하는 씁쓰레한 향수에 빠지곤 했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5-60년대, 영광스런 시대에 쓰여진 구식 명작 SF를 재간 삼간으로 울궈먹으면서 간간이 현대의 수작을 끼워넣는 시도를 하는 추세를 감안할 때 이것은 한국인 독자가 국어로 번역된 걸로 접할 수 있는 가장 최신의 SF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으리라.

사실 그런 이유에서 2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이 하드하기 짝이 없는 [항체]로부터 SF의 경계를 겨우 넘고 있는 가족드라마인 [보보를 찾아서]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다루고 있는 게 맘에 들었기 때문에. 한두편 정도는 좀 진부한 스릴러 같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오랜만에 두툼한 두께에 만족하며 볼 수 있었다.

내용을 보면, 적어도 새 밀레니엄은 SF계에 그다지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진 못한 모양이다. 이렇게 비관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앤솔로지도 드물 것이다. 그 암울함의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 가지 키워드를 고른다면 '오해와 불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뛰어난 중편인 [구세주]를 보면, 인류사 대대로 벌어지는 비극은 인류 자체의 어리석음과 외계에서 떨어진 미지의 물체에 대한 오해로 이끌어져 나가며, 간판작 [세상의 생일]은 전설과 현실이 교묘하게 섞이며 오해를 불러 슬픈 역사를 이끌어낸다. 나머지 작품들에도 황금기에 간혹 보이던, 인류의 발전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희망적 분위기는 거의 찾기 힘들다. (가장 밝은 분위기의 작품이 [암초]니 말 다했다.) 자연은 걸핏하면 오염되고, 가족은 가장 약한 연결이며([노간주나무]), 쾌락만을 좇는 이들과 종말을 외치는 광신자들이 흔해빠진 세상([크럭스]). 우리 시대의 SF작가들은 그런 암울한 미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와졌다고 믿는 것일까?

그들의 상상에 의한 예언에 전염되긴 싫지만, 2000년 이후의 현실을 보면 이사람들이 미리 앞서 상상한 것보다 다가올 미래가 훨씬 더 힘들 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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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3
사카구치 안고 지음, 유정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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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장석]의 반도 안 되는 두께에다 진슌신의 단편까지 합본되어 있는 판에 무슨 놈의 대작은 대작이냐, 고 반박을 들을지 모르나 책의 1/3 정도에 위치한 저택 조감도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지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리라. 등장인물이 20명도 넘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 하긴 하겠다만서도.

어쨌든 정말로 성실하게 썼다. 20명도 넘는 인물이 등장하고, 개중 반이 죽어나가면서도 그렇다고 인물 소개에 그다지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도 아닌데, 사건이 진행되면서 이름이 나올 때마다 바로바로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었다. 일본 이름 외우기가 그다지 쉬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도 워낙에 서장에서 소개되는 인물들의 관계가 황당한 애증관계로 얼키고 설켜 있기 때문에, 3류 스포츠 신문의 폭로기사를 보듯이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트릭이 엉성하거나 독자가 추리할 증거가 빈약한 것도 아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작가는 이곳저곳에 범인을 맞출 만한 단서를 다 던져 놓고 있었다. 제대로 된 본격물인 것이다.

문제는 너무 많이 죽는다는 점이 읽는 독자의 정서를 산만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느닷없는 죽음에 놀라기도 하고 나름대로 추리하려고 애써보지만, 무슨 연쇄폭발하듯 줄줄이 희생자가 나면서 스플래시 호러 영화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덤덤한 면역에 걸려버린다. 작가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첫 희생자가 나고 독자가 증거를 씹어 삼킬 겨를도 없이 다음 희생자, 그 다음 희생자가 발견되는 센세이셔널리즘이 반복되면서 추리의 흥미가 반감되는 것이다. 탐정과 트릭의 해설이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인듯.

또한 전반에 흐르는 질펀한 묘사나 중간에 들어가는 신문 연재소설 분위기의 삽화는 인물을 외우는 데는 아주 크게 기여했지만, 인간 본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의심하게 됨과 동시에 소설의 격을 무의식중에 낮게 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물론 재미야 있었지만, 통속 소설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고 해야 할까... 우리 나라 정서에 맞지 않는 면도 꽤 있기도 하고.

이런저런 장벽이 높지만 본격물을 좋아하는 어른 독자라면 읽어봐서 그다지 후회를 할 것은 없어 보인다. 두번 읽을 작품인가는 약간 고민하게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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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동서 미스터리 북스 140
도로시 L. 세이어스 지음, 김순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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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세이어즈의 저작이 제대로 번역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지만, 이 단편집을 마친 추리소설 독자라면 그녀가 도일의 열렬한 팬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을 품으리라 생각한다. 단편집 전체가 소위 '기묘한 맛'을 지나치리만치 추구하고 있고, 수기에 의존하는 경향도 확실히 코난 도일 풍이다. 허나 그 사실이 좋은 추리소설을 사장시키지는 못할 것 같다. 지나치게 기묘하고, 대책없이 낭만적이긴 해도 내던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나 할까.

대표단편 '의혹'은 다른 곳에서 많이 읽은 경험 때문에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하긴 했지만 여전히 서늘한 걸작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실린 피터 윔지 경이 활약하는 단편들은 여러 단편집에서 이곳저곳 짜집기하듯 뽑은 것이라는데, 마치 순차적으로 쓴 것처럼 점점 몰입도가 올라가면서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아마도 작가가 탐정에 대한 묘사를 무척 정성들여 쓰기 때문이 아닐까.

제일 흥미롭게 읽은 편을 꼽으라면 '유령에 홀린 경찰관'을 꼽고 싶다. 트릭, 탐정의 인간적 매력, 그리고 코난 도일 풍의 기묘한 맛까지 3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재미. (개인적 경험이 약간 개입해 있다) '구리 손가락 사나이의 비참한 이야기'는 인간관계의 작위적인 면이 옥의 티이나 간담이 서늘하기는 권두의 '의혹'과 맞먹었다.

동 작가의 [나인 테일러스]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아마도 권말을 장식하는 중편 '불화의 씨, 작은 마을의 멜로드라마'의 시골마을 분위기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전체에 흐르던 묘하고 약간은 허황되기까지 한 낭만적 공기가 이 중편에 와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모든 소사(小事)가 하나로 합쳐져 해결되는 결말은 사실만 보자면 끔찍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무슨 시트콤 보는 것마냥 우습기까지 하다. 윔지 경의 위트에 알게모르게 전염된 건지도.

이제 Gaudy Night을 기다려야겠다. 상당히 엄한 제목으로 출판되는 것 같던데...

덧붙임 : 속표지 소제목이 기가 막히게 틀려 있다. 윔지 경 시리즈를 묶은 쪽의 "The Case Book of LPW" 같은 것은 애교로 봐주더라도, '의혹'의 제목이 Five Red Herrings라니 번지수가 틀려도 유분수... 저 이름은 LPW 시리즈의 한 장편 소설 제목이다.  '의혹'의 원제는 말 그대로 'Suspicion' 이며 [In the Teeth of Evidence] 라는 단편집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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