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은 사람 - 비디오테이프 1개 - 우리말녹음
장 지오노 원작, 프레데릭 백 감독 / 성베네딕도수도원 / 1987년 1월
평점 :
절판


2002년 8월작성

여름 방학이 되면 꼭 아이들(가르치는 아이)과 함께 보는 비디오가 있다. 그건 '나무를 심은 사람'이다.산하를 가졌을 때 태교삼아 본 책 한 권이 나를 감동케 하였으며 다시 비디오를 구해서 보면서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생각과 그것이야말로 '참 행복의 길'임을 깨닫기도 했다.그당시 내가 본 가장 큰 위인이었기에 산하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그의 삶을 통한 가르침을 전해 주고 싶었다.

줄거리는 이렇다.책 뒤에 실린 글을 옮김

한 청년이 어느 마을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황폐하기 짝이 없던 그 마을은 어서 바삐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어두웠다. 그곳에서 청년은 '나무를 끊임없이 심는 사람'을 만난다.

오랜 뒤에 다시 방문한 그는 그곳에서 하나의 놀라운 기적을 만난다. 바로 나무 심는 사람이 평생토록 심은 나무들에 의해 그 비참했던 땅이 축복받은 생명의 땅으로 부활하게 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장 지오노의 이 아름다운 소설은 프레데릭 백에 의해 한편의 영상 시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더욱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무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나무를 심는 것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 나는 이 작품을 썼다."는 장 지오노의 말은, 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생생히 살아나는 자연의 기적을 본 사람이라면 굳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십번도 더 본 그의 삶은,여전히 매력적이며,현재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한다.그런데 이 책이 최근에 그림책으로 다시 나왔다.반갑기도 하면서 원작에 충실하였을까 내심 염려가 된다.
실제 비디오와 책은 고학년용이다.몇 면 전에는 초등학년 교과서에 짧게 실렸었는 데 지금은 바뀌었다.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에는 사실 초등5학년 이상은 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

그때도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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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내 동생
빌리 슈에즈만 지음, 김서정 옮김, 민은경 그림 / 크레용하우스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03.3.21 작성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죽음에 관한 책들이 요즘 꽤 나오고 있다. 특히 죽음이라는 주제를 아주 자연스레 아이들이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책들이 많다. 아이들에겐 무조건 밝은 주제만 들려주어야 한다는 오랜 생각이 무너지면서 다양한 주제의 책들이 더더욱 출판되어지는 듯하다.그런 가운데 오늘 난, 아주 잔잔하게 아주 고요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제목은 '잘가라 내동생'이다.

벤자민이라는 열 살 짜리 주인공 남자아이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그런데 그 영혼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투명인간처럼 가족들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자신의 죽음이 처리되는 과정과 가족들의 아픔을 지켜 본다.아주 편안하게 그리고 아주 고요하게.

난, 내 어머니의 죽음이 닥쳐와서야 알게 된 주검의 처리 과정을 이 책에서는 열 살 아이의 눈높이로 잘 표현해 두고 있다. 주검이 닦여져서 냉동실에 보관되어 땅에 묻히기까지 벤자민은 자신의 육신이 어떻게 처리되어지는 가를 지켜 본다.

그리고 벤자민은 자기처럼 죽은 자들의 영혼을 만난다.그들의 세계에서는 살아있는 가족들 기억 속에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한 영원 속으로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지상을 떠돌게 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에게서 이들이 잊혀져 갈 수록 몸은 점점 엷어(투명해지며)지며 슬픔이 아닌 또 다른 추억으로 남겨질 때만이 완전한 영혼의 세계로 떠날 수가 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서 빨리 영원 속으로 이슬이 되어 간 자도 있지만,가족들의 아픔이 너무나 커서 7년 째나 지상을 떠도는 영혼도 있었다.그러나 그 어느쪽도 행복하지는 않았다. 벤자민은 가족들이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또한 맘이 아프다.그리고 서서히 자신을 잊어 가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이 엷어져 가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가족들 역시 아들의 죽음을 가슴 안에 담아두기보다 털어버리려고 노력할 때만이 이별의 고통은 줄어들고 슬픔은 잦아들게 된다. 살아남은 자들에겐 상처를 치유할 유일한 방도는 하나 뿐이었다. 바로 죽은 이를 향한 그리움을 쏟아내고 드러내는 것이었다.웃으면서 죽은 자를 회상할 ‹š까지 말이다.

이 책은 이이들 보다 어른들이 먼저 눈물을 흘릴 것이다.내가 그런 것 처럼. 또 책 속의 한 노파는 이렇게 말한다. '늙은이의 죽음은 그의 과거와 함께 그에 대한 추억도 묻어 버릴 수가 있지만, 어린 아이의 죽음은 미래를 함께 묻어야 하기에 더욱 힘들고 가슴아픈 일이다.' 맞는 말이다.그래서 '부모는 땅에다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다 묻는다'고 하는 가보다.

내일이면 엄마의 두 번째 기일이다. 그런데도 아직 난, 친정엄마 이야기만 해도 눈에 눈물부터 고이고, 엄마의 제사를 앞두고서는 2월 3월 수시로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시전 너무나 고생하신 엄마 생각에  지금 내가 편하게 지내는 게 늘 죄스럽고,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다 보지 못하고 가신게 너무나 서러워져서 좋은 일 앞에서도 가장 먼저 엄마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타인 앞에서 눈물을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던 나였기에 언제나 혼자있을 때면 참았던 설움이 북받쳐 나온다. 그리고 다른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눈물이 쏟아진다.

성당에 한번씩 갈 때면 눈물이 줄줄 흘러 나오고, 엄마를 떠올릴 만한 무언가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그것도 혼자 있을 때만. 이런 내 맘을 아셨는지 언젠가 시어머니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니가 자꾸 엄마 생각에 맘을 상하면 너희 엄마도 슬퍼서 하늘나라 못 들어가고 지상에서 떠돈데이~그러니 니도 얼른 맘을 다잡고 울지만 말고 기도 열심히 해서 엄마를 어서 좋은 곳으로 떠나가시도록 도와 드리라."

벤자민이 가족들의 슬픔을 지켜보면서 영원의 세계로 떠나지 못하고 슬퍼하는 걸 보면서 나는,예전에 내게 하신 시어머니의 말씀이 더욱 생각이 났다. 꾹꾹 누르려고만 하고, 나 자신을 괴롭히려고만 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 자신 안에 갇힌 슬픔을 비워 낼 수 있는 그릇을 찾지 못한채 내 안으로만 상처가 덫나게 하고,염증이 곪아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저절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며...'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는데 왜이러나'하면서 스스로 강해지라고만 소리지른다.

벤자민의 가족들이 '애도의 모임'을 찾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지닌 가족들을 만나 서로를 어루만지고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었듯이 나는 내 안의 것들을 비워 낼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오늘 난, 삶의 지혜와 용기를 동화 속에서 찾는다. 역시 세상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은 동화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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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 시대의 법과 윤리
박은정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생명공학의 광범위한 적용으로 야기되는 법적. 사회적.윤리적 문제점들을 다룬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생명공학을 포함한 과학 기술이 우리의 의식과 사회제도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논할 공론의 장을 넓히고자 애써 왔다. 그는 생명윤리와 생명안전문제는 금세기의 한 세대 동안 사회정의의 핵심 주제를 이룰 것이라 여기며, 생명공학의 승리에 따라올 부메랑 효과를 미리 산정해 이에 대처하는 일은 사회과학자의 몫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던지는 물음들이 먼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고 오늘날 절박한 사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과학 기술 변화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리라.생명윤리주위자들의 의견과 페미니스트윤리주의에 주목하면서 읽어 나갔다. 엄청난 두께에 주녹이 들었었는데, 의외로 너무나 재밌게 읽을 수 있었으며, 내게 생명공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유용한 지침서가 되어 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드는 몇 가지 단상들을 정리해 보자면 이러하다.

 하나, 생명윤리에 대한 나의 공감

  “어제의 투자 결정과 그저께의 기술혁신에 기초하여 산업적으로 생산된 오늘의 문제에 대해 잘 해야 내일에나 대응책이 마련될 것이며, 이것은 모레나 유효하게 될 것이다”  이는 첨단과학기술의 빠른 속도 때문에 예측이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의 법적․제도적 차원의 대책은 단편적이고 느리게 작동함을 잘 묘사한 글이다. 걷잡을 수 없이 달라져 가는 빠른 변화는 오히려 모든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결국 상황을 정당화하는 의미들만이 살아남으리라는 불안이 감지된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더 많은 판도라의 상자들이 앞으로 열릴 것이다. 자물쇠만 잠근다고 될 일이 아니다....과학자와 인문학자 등이 서로 협력해 판도라의 상자를 잘 열도록 협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최재천은 말한다.

  “잘 연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평소 내가 좋아하는 최재천 교수님의 의견인지라 깊은 신뢰와 공감이 가면서도 나는 왠지 불안하다. ‘잘’연다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긴장을 느끼게 한다. 사실 인문학자와 과학자들간의 협력이라 하지만, 가난한 인문학자와 부자인 과학자의 협력이란 게 어느 정도의 균형있는 협상파트너로 마주할 수 있을 지 의문이 앞서는 바이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기 보다 ‘생명의 질’을 선택하는 생명공학기술은 공리주의를 표방하지만, 그 안에는 기술권력주의와 의학물신주의가 무섭게 들어앉아 있음을 보게된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종교주의자들의 입장이 극단으로 쏠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급류를 타는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그나마 견제할 수 있는 ‘우선 급한 도구’로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인간 ‘생명의 질’은 더 향상되어질 필요가 없는가? 인간이 추구하는 개인의 행복추구는 무시되어 져도 좋은가?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재생산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선택권과 행복을 줄 것인가?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몸을 도구화시킬 뿐 아니라, 다양한 출생의 비밀들이 가져올 혼돈, 인간의 재정의, 법․윤리․가족에 대한 총체적인 재정의 등을 요구하는 사회변화가 정녕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과학기술 시대의 생명윤리’에서 말하는 ‘책임윤리’의 “지금 일어나는 일이 실존의 전체적 형성존재와 어떻게 결합하는가“라는 물음과 ’원격윤리”의 “미지의 이웃, 다음 세대로서의 이웃,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웃을 배려해야 한다”는 점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간의 유전정보를 인류공동의 유산으로 보아야 한다. “나를 만드는 유전 정보는 수정란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인간 중심주의라면, 생명중심주의는 나를 만드는 유전 정보는 수정순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또 그 어머니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기 복제가 가능하고 대사를 취할 수 있는 생명의 저 수십억 년의 진화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유전 정보는 “인류 공동의 유산”이며, 생명윤리 사고는 인간의 생명과 동시에 다른 생명의 고유 가치도 함께 인정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윤리개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여긴다. 즉, 생명윤리는 궁극적인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인간의 생명에서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인간중심의 윤리의 확대와 그 패러다임의 전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두울, 유전자에 대해 침묵할 수는 없었니?

  재생산 신기술을 통해 태어나는 생명체들을 인간으로 볼 것인가? 동물로 볼 것인가? 기계로 볼 것인가? 여성의 몸을 빌어 태어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가? 체세포를 통해 태어난 아기와 간세포에서 태어난 아기의 차이는? 이처럼 앞으로 생겨날 다양한 출생의 조건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이 달리 적용되어 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재생산 신기술의 발전은 생명개념의 탈형이상학화, 탈도덕화를 부르고 있다. 또한 생명과 인간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기만 하다. 그 미래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거인’이라는 꽤나 유명한(어른들에게 더 알려진) 동화책이 있다. 뼈대가 되는 이야기는 거인들이 사는 나라를 찾아갔던 한 지리학자의 회고담이다. 이 아름다운 거인들에 대한 묘사가 한가득 펼쳐지더니, 이 거인들의 나라가 알려지면서 생긴 비극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신비로운 느낌을 풍겨내는 뼈아픈 환경이야기책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고백과도 같은 어조로 이어지는 말투는 무척이나 아득하다. 아름다운 문장들과 그들이 풍겨내는 분위기를 한 자락씩 베껴낸 뒤, 그 아름다움에 젖어 한바탕 울어버리고 싶은 느낌이다. 책 뒤에 실려있는 최재천 교수의 글 '스스로 자기 집을 부수고 있는 인간들에게' 역시 본문의 내용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주인공이 거인(자연을 의미함)과 나눈 공유는 이러한 것들이다. “끝없는 밤을 지새며 우리가 나누었던 진실한 교류는....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밤새도록 별들을 차례대로 불러대는 그들의 목소리는 서로 뒤섞이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유려하면서도 복잡하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가냘픈 변주, 순수한 떨림, 맑고 투명한 비약으로 장식된 낮고 심오한 음조로 싸여 있었지요. 무심한 사람의 귀에나 단조롭게 들릴 그 천상의 음악은 한없이 섬세한 울림으로 내 영혼을 오성의 한계 너머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또한 이들 거인들은 말은 하지 않지만 그 감정과 생각이 피부로 드러나 고스란히 피부에 문양이 되는 신기한 존재였다. 그들은 자연의 또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를 신비롭고, 황홀하게 우리를 품어주었던 거인들의 (자연의) 종말은 참으로 비참하다. 인간의 호기심과 문명이란 이름의 과학은 거대한 괴물이 되어 자연을, 우리를 잡아 삼킨다. 거인의 머리를 싣고 가는 인간들에게서 바로 우리 자신들을 보게 되며, 거인을 죽인 그 손으로 만들어진 과학문명은 이제 우리의 영혼을 위협한다.    

   이렇게 길게 이 책에 대해 쓰는 이유는, 내가 ‘재생산신기술’의 발전 앞에서 느끼는 난감함이 바로 이런 느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거인’ 동화책에서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거인을 모두 죽게 만든 것은 주인공의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세상에 공개한 것)탓이었으며, 이에 대해 “너는 침묵할 수 없었니?” 하고 되물었듯이, 나 역시 재생산신기술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묻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렇게 묻는다.         “너는 유전자에 대해 침묵할 수는 없었니?”
 
세엣, 권리보다는 관계를
 
  현재 여성들은 출산의 자유를 얻기 위해 점점 더 의료에 의존해야 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생식과정의 기술개입증대는 여성의 모성 경험의 총체성에도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불임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혹은 나중에는 더 편리한 출산, 아니면 건강상 혹은 유전적으로 더 좋은 아이를 낳게 해 준다는 목적으로 난자채취, 시험관 수정, 인간 배아 연구, 대리모를 통한 임신, 유전병 검사, 유전자 치료 등 매 단계마다 의료 기술에 의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나의 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제 임신과 출산은 한 여성의 실존적이고 총체적인 체험영역이라기 보다는 과학자, 기술진들과의 합작이 된다. 생식의 영역에서 과학기술이 개가를 올리면서 생식자로서의 여성의 이미지는 서서히 주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생식보조 기술의 증대가 “모성의 무력화”, “생물학적 어머니상의 해체”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 보여진다.


  “여성의 모성체험이 이루어진 시공간은 이제 과학자와 의료진, 그리고 여성들의 공동 출자로 메워지게 될 것이다. 또한 시험관 수정과 같은 불임치료기술의 높은 실패율이 잘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여성의 육체적 건강의 훼손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심리적 고통과 충격도 크다.”
  그리고 재생식 신기술의 결과 여성들에게 진정으로 출산과 관련한 선택의 폭이 커졌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언뜻 보면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 방법의 선택 기회가 커지게 될 것 같지만, 불임을 극복 가능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의술로 인해 여성들은 이 기술 적용을 불가피하게 강요받는 분위기에 놓이게 되고, 필사적으로 불임을 극복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는 출산과 육아가 여성 고유의 몫이라는 성역할을 더 고정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부모로 만든다는 것은 그 누구가 자신과 유전적 관계에 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 문제인가? 그렇다면 그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이상이라는 그것은 과연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가? ”에 대해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재생산 신기술을 선택하는 여성의 프라이버시나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여성 자신이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리는데 구체적으로 주는 도움보다는 레토릭한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태아와 여성의 관계를 복원해 주는 새로운 윤리적 설명 틀이 필요하다”는 점에 무척 동의하는 바이다.

  하여 이에 대해 여성주의 생명윤리자들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만드는 결정적인 것은 유전적 관계, 임신관계, 유아관계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이 세 관계가 모두 존중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계’ 개념은 “태아가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 여성의 몸 안에서 그리고 여성의 몸을 통해 인간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중요함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참으로 여러 것들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관계’개념을 통해 재생산신기술에 대해 여성주의 생명윤리의 논리를 세워나가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윤리는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어느 한 성 혹은 계층의 억압을 가져오지 못하도록 해야할 것이며, 이와 같은 불평등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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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 페미니즘 채식주의 비판이론과 육식의 성정치
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미토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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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상드는 자기 집에서 창문을 통해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 널브러진 채 썩어가는 시체들을 보고 2주 동안이나 붉은 고기를 전혀 입에 댈 수 없었다"
 
  그녀처럼 나역시 한번씩 고기를 먹으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최근 살인마 유영철을 만나고서는 더더욱 생각에 꼬리가 길어진다. 언론매체를 통해 구체적인 살인의 과정을 눈여겨본 후, 나는 구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톱으로 토막낸 15토막의 여자들의 몸, 그것을 싼 검은 비닐, 택시기사에게 새벽장을 봤다고 둘러대면서 시체들을 옮겼다는 그의 비유들, 그 부분들을 읽으면서 나는 ‘아르첸’의 ‘푸줏간’그림이 떠올랐다.


  여러 부위의 고깃덩어리와 돼지 족발, 소시지, 곱창, 가죽이 벗겨진 쇠머리, 방금 잡은 가금류, 생선 등 다양한 식육이 널려 있는 푸줏간은 매우 풍성해 보인다. 하지만 고기가 되어 푸줏간에 내걸린 동물들은 한편으로 존재의 사멸, 곧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죽음은 동물 뿐 아니라 인간도 피할 수 없는 ,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다. 바로 이런 상징성에서 신학자들과 도덕론자들은 ‘음식물 정물화’를 통해 도덕적 기능을 찾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는 그 그림에서 여성과 동물의 피할 수 없는 유사한 운명을 재확인하게 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그래프트’는 1800년대에 여성참정권을 외쳤던 여성해방의 선구자이다. 그녀가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책을 냈을 때, 반박으로 나온 책이 바로 ‘짐승의 권리 옹호’라는 책이었다. 이는 여성 = 동물이라는 도식을 내포하고 있다. 그녀의 딸 ‘메리 울스턴그래프트 셸리’는 ‘프랑켄 슈타인’의 저자이다. 그녀는 낭만적인 채식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채식주의자로서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래서 ‘빅터 프랑켄 슈타인’의 피조물은 자신이 도토리와 장과류를 먹으며 동반자와 함께 광활한 남아메리카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희망을 이야기한 뒤에 빅터에게 ”이런 정경이야말로 평화롭고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식의 페미니즘, 평화주의, 채식주의의 연관성을 찾는 일은 20세기 여성작가들의 핵심주제였다고도 한다.
  

  이 책의 저자 '아담스'(Carol J Adams)는 『프랑켄 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를 통해 “어떤 사람(동물과 여성)이 우리의 가부장제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육식에 부여된 의미가 사나이다움의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성정치가 구조화되는 방식이 우리가 동물, 특히 소비되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연관된다는 것을 설명해 나간다. “즉, 가부장제는 인간/동물 관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성별체계라고 본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차적 개념은 ‘부재지시대상’이다. 이를 통해 여성과 동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부재지시 대상’이라는 개념은 육식가를 동물과 분리하고, 동물을 자신의 최종생산인 고기에서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이 기능은 우리가 먹는 “고기”를 ‘그 남자 또는 그 여자가 한때 살아있는 동물이었다’라는 우리의 생각에서 분리시키는 것, 그리고 어떤 것(what)을 어떤 사람(who)을로 간주되는 존재와 분리시키는 것이다. 고기의 현존이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죽은 동물의 상태를 지시하는 데 자주 이용된다. 동물은 육식행위에서 부재하는 지시 대상이다. 한편 동물은 도살되고, 파편화 되고, 또는 소비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부재지시대상이 된다.“


 그래서 아담스는 “페미니스트 -채식주의 비판이론은 여성과 동물이 가부장제세계에서 비숫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자각, 즉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남성들은 십계명에 따라 여성과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하는 지 배운다. 인간의 타락이 여성과 동물의 탓으로 돌려진 뒤, 인간의 형제애는 여성과 동물을 배제해 왔다”고 본다. 그러므로 “여성과 동물을 주체로서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양자의 교차점들을 파괴하고 중첩된 억압을 야기하는 가부장제적 부재지시대상의 구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과 채식주의를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동물옹호가 이론이라면 채식주의가 그 이론의 실천이라는 것, 페미니즘이 이론이라면 채식주의가 그 실천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육식은 남성지배에 통합되어 있는 일부다. 채식주의는 가부장제문화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무엇이다. 나는 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세 가지의 양상-고기의 무의미성에 대한 고발, 남성지배와 육식의 연관성에 대한 명명, 가부장제와 육식세계에 대한 비난-으로 표현하는 모델을” 제시한다.

  물론 저자는 “채식만이 인간의 신체에 적합하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직접 수집한 많은 자료에 근거해 볼 때 인간이 생리적으로 채식에 적합하게 태어났다“고 본다. 그래서 그녀는 "채식주의 신체(vegetarian body)"라는 개념 - 여성 억압과 동물 억압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주장들을 환기시키면서, 현재 과학/의학 연구가 밝혀주고 있는 채식의 이점들의 실체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를 실천으로 제안한다. 그리고 ‘아담스’는 ”쌀을 먹는 것이 여성에 대한 믿음(Eat rice have faith in women: 프란 위넌트)“의 시를 자신의 신조이자 미래상이라고 밝힌다.

  결혼 전까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를 낳기 바로 얼마 전까지 나는 채식주의에 가장 근접하게 생활해 왔었다. 어릴 적부터, 내게는 ‘부재지시대상’이 작동되지 않은 탓인지, 모든 고기에 본래 짐승의 모습이 따라 다녔으며, 하물며 계란, 멸치반찬에서도 나는 그것의 원래 모습을 떠올리며 먹질 못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해 난 다른 누군가의 심각한 제제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보니 시댁은 매년 보신탕을 대 놓고 먹는 집이었으며, 하루 세 끼 내내 고기가 올라오는 집안이었다.


  시아버지의 생신잔치를 처음으로 바깥에서 준비하게 되었을 때도 우리가 도착한 곳은 염소를 즉석에서 매달아 때려, 구워, 직접 뜯어먹는 야외 식당이었다. 나는 모든 집안가족들과 멀리 떨어져서 혼자서 고픈 배를 잡고 버티다가 돌아왔었다. 대신 시집 가족들의 온갖 눈치아 별스럽다는 소리를 엄청 먹었다. 사실 내가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건 시어머니의 눈엔 인간이 안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고기를 먹게 되었을 때 맨 먼저 하신 말씀이 “이제 인간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임신을 해서 막달이 되었을 때부터 난, 갑자기 언제가 맛을 보았던 쇠갈비가 자꾸만 먹고 싶었졌었다. 그래서 출산 바로 전까지 남편과 나는, 갈비를 먹기위해 지산동으로 달려가곤 했다. 아이를 낳은 후엔 고기 맛을 알게 된 탓인 지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고기가 먹고 싶어먹곤 한다. 그러면서도 문뜩문뜩 고기에서 나는 산짐승, 인간의 모습을 보이면 멀찌기 밀어낸다. 그러면 다시 몇 달은 고기를 입에 대지 않다가 잊혀지면 다시 또 먹곤 한다. 채식에서 육식으로 변하는 것, 육식에서 채식으로 변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성격은 바꿀 수 있어도 입맛은 바꾸기 힘들다고 하는 가 보다.

 그런데도 임신 과정에서 나에게 그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지금 다시 돌이켜 보면, 그건 아마도 내 무의식에 “돼지고기를 먹어야 아이를 숨풍 잘 낳는다”는 세뇌된 모성애 때문인 것 같다. 그로인해 내 안에서 “고기를 죽음으로 보는 시각”(채식주의)이 “고기를 생명으로 보는 시각”(육식주의) 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일 지도.

 고기를 입에 댄 지 5년이 되어 간다. 그런데 지금 나는 다시 예전의 먹거리를 다시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제 그건 단순히 먹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닌 것이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동일하게 보이는 것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의 의식은 모험일 수도 있으며, ‘사실’을 ‘모순’으로 바꾸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이 내게 사실을 모순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어 줄 듯하다.

  또한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은 앞으로 처신을 잘하라”는 엽기살인마 덕에 내게는 “동물”에게 부재되어 있던 “여성”의 이미지를 되찾게 된 것인 지도. 그래서 나는 살인마를 통해 보게 된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린 가부장제에 환멸을 느끼며, 17세기 암스테르담에 있던 상점의 달력 글귀에 적혀있다던 문구를 기억해 낸다.

 

  “크나큰 즐거움으로 돼지나 송아지를 잡는 자여, 주의 날이 오면 그의 심판대 앞에 네가 어떻게 서 있을 지를 생각하라”

 

 


 
 
아르첸<푸줏간> 1551.나무에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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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2005-06-2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겨레 신문 칼럼에서 이 책을 인용한 부분이 있어 알라딘에 들어와 봤습니다. 저는 채식주의자는 아닌데요. 시골에서 자란지라 고기보다는 푸른 채소를 더 많이 먹고 컸구요,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회식을 하다보니 고기를 너무 많이 먹게 되더라구요. 어느날 점심때 또 접대랍시고 고기를 굽고 있는데 핏물이 자글거리는 고뻘건 고기들을 보는 순간 정말 징그러워서 먹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걸 좋다고 먹는 사람들을 봐도 그렇고.. 점점 의식을 하면서 줄이고 있는데,, 우리 나라 음식이 고기가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 줄 진짜 몰랐어요.. 암튼,, 정성들여 적으신 리뷰 잘 읽었습니다.. 책 사서 정독해야겠네요..^^
 
도토리의 집 1~7 세트 - 전7권 - 개정증보판 장애공감 1318
야마모토 오사무 지음, 김은진 옮김 / 한울림스페셜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나의 아버지는 장애인이시다. 그것도 가벼운 등급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주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경제활동을 하고 계신다. 삼남매를 혼자서 뒷바라지 해 오셨을 뿐 아니라, 젊은 이들을 능가할 만한 건강을 가지고 계신다. 물론 그런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의 많은 보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또 당신 자신의 선한 성품과 정직함이 주변인들에게 많은 신뢰를 주었기 ‹š문에 더욱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나는 내가 성인이 될 ‹š까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길 누군가에게 드러낸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 내 의식 안에 아버지는 차라리 없는 존재에 가까웠다. 그로인해 엄마의 존재가 나에겐 클 수밖에 없었으며, 아버지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언제나 엄마가 존재하였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크게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과 그들의 가족에 관한 책을 읽을 때 조차도 나와의 동일시 보다는 오히려 객관적인 거리에 서 있을 때가 많았다.

   내가 결혼을  한 후, 아버지는 '장애인'으로 기관에 첫등록을 하였다. 높은 장애 등급에도 불구하고, 예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그렇게 등록을 한 것은 그동안 장애인에 대한 별다른 혜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집으로 날아온  '장애인증'은 자동차세를 면제 받거나, 핸드폰 요금을 할인받을 경우에 한해서만 들여다 보게 된다. 그런 상황이 생길 때면 그때서야 나는, '아, 나의 아버지는 장애인이셨지'하고 재확인하게 된다.

   중증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억엔 아버지는 비장애인으로 남아있다. 그건 '비장애인'으로서의 긍정이 아니라, '장애인'이라는 상황을 외면하고자 했던 무의식의 결과인 듯하다. 또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아버지의 일상에 우리 가족이 너무나 익숙하여 그것에 대한 불편함이 별로 없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 뒤늦게 아버지의 삶에 대해 눈여겨 보고 이해하는 과정이 생겼는데, 그건 바로 책을 통해서이다. 그 책들 중엔 아이들의 동화책들도 한 몫을 했다. '아주 특별한 우리 형', '우리 누이', '다이고로', '오체 불만족', '휠체어 타는 내 친구', '악어클럽', '엄마, 내가 자전거를 탔어요', '내 동생' 같은 책들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나의 편견을 들여다 보았고, 또 나의 상황을 직면했던 것이다.

   '도토리의 집'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만화책인데, 장애아를 둔 부모들의 이야기와 장애인의 자활을 돕기 위해 만든 '도토리의 집'에 관한 준비과정이 담겨 있다. 현재 7권까지 출간된 이 책은 화려한 광고가 아닌 입소문에 의해 조용하게 읽혀지는 듯 하다.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봐서. 그러나 그 감동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 격정적이다.

    " 내 아이 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다"

    장애아를 둔 부모의 바람은  유일하게 이것이다. 부모가 죽고난 이후에 장애아들이 살아갈 세상을 염려하여 살아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죽은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아프게 그것을 준비해 나간다. 그건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다.

  

  '도토리의 집'에선 장애아를 둔 가족의 아픔, 절망에 가까운 외침들이 담겨있다. 과정됨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강요없이 드러내 보인다. 나는 그들의(장애아와 부모 모두) 너무나 간절한 소망 앞에서 숙연해 졌으며,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청각장애를 안고 살아오신 내 아버지의 어릴 적 모습을 상상해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 어린 소년의 좌절된 꿈과 절망이 또렷이 내 안에 남겨져 있다.

   또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부모들의 아픔이 점차 인간에 대한 더 넓은 이해와 사랑으로 승화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 자신이 부끄러워 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배워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뉘우침의 눈물이건, 동정의 눈물이건, 감동의 눈물이건 이 책을 읽고나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응시하던 세상의 작은 사물과 자잔한 일상에 우리의 시선도 따뜻하게 함께 머물 것이라 확신한다.

 

  일본은 장애인을 다룬 책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것도 참으로 좋은 책들만... 장애인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들이 참으로 따뜻하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도토리의 집'은 그 생각을 너무나 굳히게 만들었다. 

   치열한 경쟁사회일수록 정상인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고, 사회의 약자는 소외되기 쉬운 일이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아주 심한 편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이런 점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더 강한 듯하다.

   차별로 치자면 우리나라도 별반 다를바가 없는데, 그에 대한 개선의 노력은 미비하니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 나라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줄어들기를 희망하나, 아직 먼 길이라 여겨질 때가 많다. 

   지하철에 있는 리프트를 타다가 떨어져 죽은(전동 휠체어의 무게를 감당못한다고 함) 장애인들의 이야길 들었을 때, 걸어다닐 수 있는 자유조차 제한되어 있는 그들의 일상을 엿볼 때, 장애아를 둔 부모가 딸의 생리를 축하해 주지 못할 때, 주변 친구들을  '애자'라고 놀려대는 우리의 아이들을 일상적으로 만날 때 ...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우리 안에서 지워내지 않고는 우리 역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서로 다른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단지 드러나는 외형만으로 구분지어 아닌 척 할 따름이다.

   나는, 모양도 제각각인 한 톨의 도토리가 참생명을 품어 커다란 참나무로 성장하듯이 우리 곁에 머무는 수많은 '도토리'들이 제대로 성장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 안에 우리도 그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그들로 인해 맑아지는 세상을 호흡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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