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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 시대의 법과 윤리
박은정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생명공학의 광범위한 적용으로 야기되는 법적. 사회적.윤리적 문제점들을 다룬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생명공학을 포함한 과학 기술이 우리의 의식과 사회제도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논할 공론의 장을 넓히고자 애써 왔다. 그는 생명윤리와 생명안전문제는 금세기의 한 세대 동안 사회정의의 핵심 주제를 이룰 것이라 여기며, 생명공학의 승리에 따라올 부메랑 효과를 미리 산정해 이에 대처하는 일은 사회과학자의 몫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던지는 물음들이 먼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고 오늘날 절박한 사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과학 기술 변화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리라.생명윤리주위자들의 의견과 페미니스트윤리주의에 주목하면서 읽어 나갔다. 엄청난 두께에 주녹이 들었었는데, 의외로 너무나 재밌게 읽을 수 있었으며, 내게 생명공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유용한 지침서가 되어 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드는 몇 가지 단상들을 정리해 보자면 이러하다.
하나, 생명윤리에 대한 나의 공감
“어제의 투자 결정과 그저께의 기술혁신에 기초하여 산업적으로 생산된 오늘의 문제에 대해 잘 해야 내일에나 대응책이 마련될 것이며, 이것은 모레나 유효하게 될 것이다” 이는 첨단과학기술의 빠른 속도 때문에 예측이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의 법적․제도적 차원의 대책은 단편적이고 느리게 작동함을 잘 묘사한 글이다. 걷잡을 수 없이 달라져 가는 빠른 변화는 오히려 모든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결국 상황을 정당화하는 의미들만이 살아남으리라는 불안이 감지된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더 많은 판도라의 상자들이 앞으로 열릴 것이다. 자물쇠만 잠근다고 될 일이 아니다....과학자와 인문학자 등이 서로 협력해 판도라의 상자를 잘 열도록 협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최재천은 말한다.
“잘 연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평소 내가 좋아하는 최재천 교수님의 의견인지라 깊은 신뢰와 공감이 가면서도 나는 왠지 불안하다. ‘잘’연다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긴장을 느끼게 한다. 사실 인문학자와 과학자들간의 협력이라 하지만, 가난한 인문학자와 부자인 과학자의 협력이란 게 어느 정도의 균형있는 협상파트너로 마주할 수 있을 지 의문이 앞서는 바이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기 보다 ‘생명의 질’을 선택하는 생명공학기술은 공리주의를 표방하지만, 그 안에는 기술권력주의와 의학물신주의가 무섭게 들어앉아 있음을 보게된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종교주의자들의 입장이 극단으로 쏠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급류를 타는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그나마 견제할 수 있는 ‘우선 급한 도구’로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인간 ‘생명의 질’은 더 향상되어질 필요가 없는가? 인간이 추구하는 개인의 행복추구는 무시되어 져도 좋은가?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재생산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선택권과 행복을 줄 것인가?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몸을 도구화시킬 뿐 아니라, 다양한 출생의 비밀들이 가져올 혼돈, 인간의 재정의, 법․윤리․가족에 대한 총체적인 재정의 등을 요구하는 사회변화가 정녕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과학기술 시대의 생명윤리’에서 말하는 ‘책임윤리’의 “지금 일어나는 일이 실존의 전체적 형성존재와 어떻게 결합하는가“라는 물음과 ’원격윤리”의 “미지의 이웃, 다음 세대로서의 이웃,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웃을 배려해야 한다”는 점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간의 유전정보를 인류공동의 유산으로 보아야 한다. “나를 만드는 유전 정보는 수정란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인간 중심주의라면, 생명중심주의는 나를 만드는 유전 정보는 수정순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또 그 어머니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기 복제가 가능하고 대사를 취할 수 있는 생명의 저 수십억 년의 진화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유전 정보는 “인류 공동의 유산”이며, 생명윤리 사고는 인간의 생명과 동시에 다른 생명의 고유 가치도 함께 인정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윤리개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여긴다. 즉, 생명윤리는 궁극적인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인간의 생명에서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인간중심의 윤리의 확대와 그 패러다임의 전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두울, 유전자에 대해 침묵할 수는 없었니?
재생산 신기술을 통해 태어나는 생명체들을 인간으로 볼 것인가? 동물로 볼 것인가? 기계로 볼 것인가? 여성의 몸을 빌어 태어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가? 체세포를 통해 태어난 아기와 간세포에서 태어난 아기의 차이는? 이처럼 앞으로 생겨날 다양한 출생의 조건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이 달리 적용되어 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재생산 신기술의 발전은 생명개념의 탈형이상학화, 탈도덕화를 부르고 있다. 또한 생명과 인간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기만 하다. 그 미래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거인’이라는 꽤나 유명한(어른들에게 더 알려진) 동화책이 있다. 뼈대가 되는 이야기는 거인들이 사는 나라를 찾아갔던 한 지리학자의 회고담이다. 이 아름다운 거인들에 대한 묘사가 한가득 펼쳐지더니, 이 거인들의 나라가 알려지면서 생긴 비극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신비로운 느낌을 풍겨내는 뼈아픈 환경이야기책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고백과도 같은 어조로 이어지는 말투는 무척이나 아득하다. 아름다운 문장들과 그들이 풍겨내는 분위기를 한 자락씩 베껴낸 뒤, 그 아름다움에 젖어 한바탕 울어버리고 싶은 느낌이다. 책 뒤에 실려있는 최재천 교수의 글 '스스로 자기 집을 부수고 있는 인간들에게' 역시 본문의 내용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주인공이 거인(자연을 의미함)과 나눈 공유는 이러한 것들이다. “끝없는 밤을 지새며 우리가 나누었던 진실한 교류는....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밤새도록 별들을 차례대로 불러대는 그들의 목소리는 서로 뒤섞이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유려하면서도 복잡하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가냘픈 변주, 순수한 떨림, 맑고 투명한 비약으로 장식된 낮고 심오한 음조로 싸여 있었지요. 무심한 사람의 귀에나 단조롭게 들릴 그 천상의 음악은 한없이 섬세한 울림으로 내 영혼을 오성의 한계 너머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또한 이들 거인들은 말은 하지 않지만 그 감정과 생각이 피부로 드러나 고스란히 피부에 문양이 되는 신기한 존재였다. 그들은 자연의 또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를 신비롭고, 황홀하게 우리를 품어주었던 거인들의 (자연의) 종말은 참으로 비참하다. 인간의 호기심과 문명이란 이름의 과학은 거대한 괴물이 되어 자연을, 우리를 잡아 삼킨다. 거인의 머리를 싣고 가는 인간들에게서 바로 우리 자신들을 보게 되며, 거인을 죽인 그 손으로 만들어진 과학문명은 이제 우리의 영혼을 위협한다.
이렇게 길게 이 책에 대해 쓰는 이유는, 내가 ‘재생산신기술’의 발전 앞에서 느끼는 난감함이 바로 이런 느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거인’ 동화책에서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거인을 모두 죽게 만든 것은 주인공의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세상에 공개한 것)탓이었으며, 이에 대해 “너는 침묵할 수 없었니?” 하고 되물었듯이, 나 역시 재생산신기술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묻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렇게 묻는다. “너는 유전자에 대해 침묵할 수는 없었니?”
세엣, 권리보다는 관계를
현재 여성들은 출산의 자유를 얻기 위해 점점 더 의료에 의존해야 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생식과정의 기술개입증대는 여성의 모성 경험의 총체성에도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불임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혹은 나중에는 더 편리한 출산, 아니면 건강상 혹은 유전적으로 더 좋은 아이를 낳게 해 준다는 목적으로 난자채취, 시험관 수정, 인간 배아 연구, 대리모를 통한 임신, 유전병 검사, 유전자 치료 등 매 단계마다 의료 기술에 의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나의 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제 임신과 출산은 한 여성의 실존적이고 총체적인 체험영역이라기 보다는 과학자, 기술진들과의 합작이 된다. 생식의 영역에서 과학기술이 개가를 올리면서 생식자로서의 여성의 이미지는 서서히 주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생식보조 기술의 증대가 “모성의 무력화”, “생물학적 어머니상의 해체”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 보여진다.
“여성의 모성체험이 이루어진 시공간은 이제 과학자와 의료진, 그리고 여성들의 공동 출자로 메워지게 될 것이다. 또한 시험관 수정과 같은 불임치료기술의 높은 실패율이 잘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여성의 육체적 건강의 훼손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심리적 고통과 충격도 크다.”
그리고 재생식 신기술의 결과 여성들에게 진정으로 출산과 관련한 선택의 폭이 커졌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언뜻 보면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 방법의 선택 기회가 커지게 될 것 같지만, 불임을 극복 가능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의술로 인해 여성들은 이 기술 적용을 불가피하게 강요받는 분위기에 놓이게 되고, 필사적으로 불임을 극복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는 출산과 육아가 여성 고유의 몫이라는 성역할을 더 고정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부모로 만든다는 것은 그 누구가 자신과 유전적 관계에 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 문제인가? 그렇다면 그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이상이라는 그것은 과연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가? ”에 대해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재생산 신기술을 선택하는 여성의 프라이버시나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여성 자신이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리는데 구체적으로 주는 도움보다는 레토릭한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태아와 여성의 관계를 복원해 주는 새로운 윤리적 설명 틀이 필요하다”는 점에 무척 동의하는 바이다.
하여 이에 대해 여성주의 생명윤리자들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만드는 결정적인 것은 유전적 관계, 임신관계, 유아관계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이 세 관계가 모두 존중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계’ 개념은 “태아가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 여성의 몸 안에서 그리고 여성의 몸을 통해 인간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중요함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참으로 여러 것들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관계’개념을 통해 재생산신기술에 대해 여성주의 생명윤리의 논리를 세워나가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윤리는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어느 한 성 혹은 계층의 억압을 가져오지 못하도록 해야할 것이며, 이와 같은 불평등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