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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최근 다시 불어온 논술바람과 함께 글쓰기 지도법에 관한 책들이 물밀 듯이 몰려온다. 그런데 글쓰기에 관한 것들은 대부분 ‘그 책’이 ‘그 책’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가끔 현란한 제목들에 유혹되곤 한다. 이 번에 읽게 된 책도 사실은 남편이 건내준 도서목록에서 순전히 제목에 맘이 뺐겨 읽게 된 책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제목만으로도 맘이 짠하다.

 역시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의 나열이었다. 그래서 책읽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정말 짧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이 별로라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쌈빡한 그 무엇을 바란 내가 문제였을 뿐, 평소 글쓰기에 대한 부담으로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유용할 듯 보인다. 내게도 평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놓치고 가는 부분들을 다시 기억해낼 수 있게 해 준 유용한 책이다.


 단, 누가 나에게 “글쓰기는 왜 해야 하나요?” 하고 묻는 경우라면 이 책을 권하진 않을 듯하다.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은 외로운 세상을 자기 혼자 헤쳐 나가기 때문이며, 그 누구도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 지를 관통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만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이유로 인해 글쓰기의 필요성이 절박해진 사람들을 위한 강연을 쭉 해 왔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이 책을 기획했다. 그래서 그 절박함에 몰린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래야 그녀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 테니 말이다.


  그녀의 글쓰기 방법론은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이 경험한 인생에 대한 확신을 키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이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자신있게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쉬운 방법론인가? 아니 얼마나 어려운 방법론인가? “자신이 경험한 인생에 대한 확신을 키워 나가야” 한다는 전제는 가치관의 문제이며, 삶을 기반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디지털에서 유비쿼터스 시대로 진입하는 지금, 하루 하루 배우지 않으면 ‘현재’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요즘 60대 노인들 사이에서도 “너 언제 어른 될래?”라고 농담을 나눈다는 말을 들었다. 나이 삼 십 쯤이면 어른이라 취급받던 시대는 끝났기에 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들이 잠시라도 게으름을 피우게되면 자신의 발은 곧장 공중부양을 하고말 것이다. 특히 어제의 ‘확신’이 오늘의 ‘불신’이 되고, 내일의 ‘절망’이 되고 만 시대를 건너가는 우리들에겐 이것은 어찌보면 참으로 어려운 요구이기도 하다.

 

  ‘나탈리’가 제안하는 글쓰기 기술들은 이렇게 요약 가능하다.

 

  “마음을 열어 두어야 한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이 배울 수 있다”, “세부적인 묘사는 글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그래서 주변의 모든 것들에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라”, “잘 쓰고 싶다면 잘 들어라”, “현상을 넘어 사물 속을 파고 들라”, “글을 쓰면서 질문을 만들어라”, “글쓰기는 지독히 외로운 것, 고독을 이용하라”, “사무라이가 되어 써라(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라는 듯)” 등등

 

 위의 것들은 그녀가 오랜 글쓰기 지도를 통해 깨달은 것들이다. 그녀가 알려주는 제안들 가운데 특히나 내 맘을 자극한 것은, 세부적인 묘사는 모든 순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기억해주는 일이기에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라는 메시지였다.

 

 바쁜 나의  시간은 언제나 年年年 흘러가고 일상은 아주 자극적인 사건만이 남겨질 뿐이다. 애써 잊고 가는 이름들은 또 얼마나 많으며, 모든 일상에 뻗혀 있는 나의 감수성은 오히려 ‘하나’의 ‘한 순간’에 빠져 들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어떤 기회에 난생 처음으로 철학관에서 사주를 보았었다. 그런데 그때 이런 말을 들었었다. "자네는 감성과 오감이 바깥을 향해 놀라울 만큼 뻗어 있고, 언어에 자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내진 못하겠어. 그 이유는 죽을 때까지 ‘바쁠’ 팔자야“   그 당시엔  ‘쳇, 이건 무슨 지랄같은 말인가’ 싶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현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주’를 무시할 일도 아닌 듯 하다.  

 

 모든 사물의 이름을 배우고, 고유성을 만들어 주며, 이야기 목록을 만들고, 사물 속을 파고드는 것이 나이 들어 갈수록 어려운 과제로 와 닿는다. 그것도 부족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자리잡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글쓰기는 벌거벗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정을 통해 자유를 느껴보라고 작가는 권한다. 단,  절절함이 넘쳐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자유로운 글쓰기란 자신만의 솔직한 목소리를 찾아내는 길이며, 궁극적으로 인생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진정한 연민을 키워나가는 끊임없는 훈련”이 바로 글쓰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슈퍼우먼의 옷을 걸치고, 가랑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살고 있는 지금의 내게 그녀의 가르침은 버거운 현실 앞에 나를 세운다. 그래서 어쩌면 내게 가장 현실적인 답은 “으악~”하고 당장 비명을 지르며 나의 짐을 내 던져 버리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나의 일상은 내 안에 깃들 것이며, 나의 글쓰기는 다시 시작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물론, 그때의 글쓰기가 쭉정이인 지 알맹이인 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시간적인 여유는 찾되  순간순간 내 곁에 서 있는  아릿한 고독감과 외로움은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에 말이다.  아무튼 나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글을 쓰는 일 뿐만 아니라 “뼛속까지 내려가서” 나를 느끼며 늘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으악" 소리를 뱉어내지 못하고, 내 안으로만 삼키며 사는 가보다. 그것도 글이 되어야 하는데... 바쁜 팔자라니 ... 사실 그것은 속보이는 나의 변명일 뿐이다. "내면의 본질적인 외침에 기울이지"않은 나의 불성실함을 눈가리는 변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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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
김연자 지음 / 삼인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11월 26일에 열린 ‘제 3회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지면으로 전해지는 고통만으로도 내 가슴이 너무나 아프고 시렸다. ‘여자’라는 이름을 지닌 모든 이들 중 “난 ‘피해자’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성폭력, 성희롱, 근친강간, 가정폭력이란 이름 안에 자신의 경험을 미처 언설화하지 못하고서 그냥 자신만의 아픈 경험으로 가슴에 묻고 죽어간 이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지난 달에 만났던 '최진이' 씨(북한이주여성, 『국경을 세 번 건넌 여자』저자) 역시, 남한 사회에 와서야 자신이 어릴 적에 경험했던 일이 바로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언어화할 수 있는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여성주의는 여성의 경험을 해석할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운동이라 정의 내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는 여성주의에 관한 인식을 한 단계 무르익게 하는 책이 분명하다. 그녀는 가난과 전쟁 한 가운데서 태어났다. 그리고 세 살 적에 친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11살 때는 친척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사춘기 시절 여자친구와의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한 군인으로부터 또다시 성폭행을 당한다. 그 후 그녀의 자존감은 서서히 사라져 갔고, 결국 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그러다가 부녀 보호소, 동두천, 송탄, 군산 아메리카 타운으로 옮겨다니며 기지촌 25년간의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녀의 고통스런 몸은 ‘대한민국은 군대’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이 된다. 전쟁으로 인한 가난과 외로움, 친족과 군인으로부터의 성폭행, 자그마한 주장이나 울부짖음도 빨갱이로 몰아가는 유신체제, 버스 안내양으로 생활하면서 경험한 여성노동력의 착취, 아버지로 상징되는 자유당의 부패, 미군을 붙잡아 두려고 정부가 앞장서서 마련한 기지촌, 달러를 버는 애국자라 부추기며 보건증을 발부하여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국가, 기지촌을 둘러싼 한미관계는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사와 여성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상의 폭력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에게 그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은 피를 쏟는 또 한번 죽음을 각오한 힘든 과정들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기지촌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그로인해 자신을 더욱더 질책하고 자학했다. 그리고 탈성매매하기까지 걸렸던 10여 년의 시간과 기지촌 생활 25년간을 되돌아보면서 그녀는 “왜 그토록 달라지지 않았을까?”, “왜 평생 분노를 부등켜안고 있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그리고 책 마지막에 그녀는 조심스레 자신이 찾아낸 지점들을 고백한다. “매춘은 정신질환에서 오는 병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해 생긴 마음의 병, 모질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앓게 된 병”이라고 한다. 또 그래서 더더욱 “연민과 아픔만으로는 기지촌의 삶과 매매춘 문제를 온전히 풀어나갈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너무나 맘이 저렸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은 자신을 자학하는 원인으로 작동했고, 어릴 적 성폭행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확장되어 갔고, 그것이 평생토록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저자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또 아흔을 넘긴 어머니에게 자신의 어릴 적 성폭행을 털어놓았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깊은 상처가 치유되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때가 바로 그녀의 나이 예순이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정신병’이란 이름으로 규정지었다. 사실 그녀가 정의내린 그 정신병이야말로 사회구조적인 성차별이 만들어낸 병이다. 생물학적인 아버지의 버림을 넘어 남성 가부장제에서 버림받은 존재들 그 모두가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해 속앓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여성들은 그 모두가 정신병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되묻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왜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정희진’은 “아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는 힘이거나 권력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안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페미니즘의 도전' 에서)”고 말한다. ‘정희진’의 날카로움이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아는 것은 실천의 시작이며, 실천은 아는 것의 결과’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안고 살아온 나에게, 성매매에 대해 아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되물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앓을 수밖에 없는 정신병 역시 “연민과 아픔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저자의 지적은 내게 또다른 과제로 안겨온다. 

 

    우리가 추구하는 여성주의는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상식’에 대해 도전하는 일이며, 새로운 언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발설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 동반되는 일이며,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저자의 경험에, 용기에, 실천에 존경을 보낸다.

 

 

 

                           

 

   물론 이로 인해 그녀의 삶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상처가 더 깊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드러난 것의 간극은 새로운 ‘낯설음’이 되어 그를 더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 그녀는 이제 이전의 그녀와는 다르다. “말한다는 것은 묘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입하고 헌신하는 실천”이며 그녀는 이미 상처에서 태어난 새로운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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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19
사라 스튜어트 지음, 데이비드 스몰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그림책 한 권은 볼 때마다 여러 생각을 갖게 하는 책이다. 처음에 나는 이 책의 간단한 이야기 구조에 별 흥미를 못 가졌는데,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의외로 이 책을 아주 좋아하는 바람에 나도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앨리자배스는 아주 어릴 적부터 책하고만 노는 아이다. 언제나 책과 함께하는 그녀는 모든 일상이 언제나 책과 함께이다.걸으면서,청소하면서,잠자면서도.책을 구입하는 것이 유일한 쇼핑이었던 그녀의 집엔 세월이 지날 수록 책들이 쌓여간다. 결국, 더 이상 책을 살 수 없을 만큼 책이 집 한 채를 다 차지해 버렸을 때 그녀는 과감히 자신의 집을 몽땅 지역 도서관으로 기증한다.자신은 친구 집으로 옮겨가서 살면서.

  내 어릴 적 책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단지 책 욕심이 엄청 많았기에 책을 파는 사람이 동네에 떴다하면 엄마에게 달려가 떼를 썼다.그 결과로 거실 한 면의 책장엔 세계명작으로 꽉 채워 졌었다.그런데 그 책들에 얽힌 추억은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작은 아씨들,소공자,소공녀,로빈스 크루스 정도를 아주 재밌게 읽었다는 기억 뿐이다.그러다보니 결혼 전 친정에서 몇 차례 이사를 하면서 엄마가 그 책을 다 버렸을 때도 별 미련이 없었다.

  그후 책에 대한 나의 애정은 22살 때 제발로 어렵게 찾아 갔던 민간 도서관( 기적의 도서관으로 뽑힌 대구 '새벗도서관'. 그 당시엔 20평 채 안되는 2층 다락방)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곳에서 사서 도우미를 하고,독서모임을 하면서.또 남편을 만나면서.

  대학을 가면서 20대 초반에 접한 사회과학이론서는 80년대의 시대적 흐름과 맞물려 나에게 세상보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그리고 새벗 도서관에서 본 많은 소설들은 인간을 중심에 둔 사상의 집을 짓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그 이후엔 여성학 관련 서적들을 닥치는대로 읽었고,그 다음은 동화관련서적, 교육관련, 지금은 또 다시 평화관련 책들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나의 책읽기는 실천을 위한 도구이기도 하고, 나를 비롯한 인간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찾아나서는 공간이기도 하다.그래서인지 자기안에서만 갇혀있는 지식엔 별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세상 속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기를 희망한다.그런 의미에서 '도서관'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혼자만의 지적탐구에 빠져 그냥 자기만족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 주인공이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내 놓았을 때 그것은 새로운 전환이었다. 그처럼 사랑한 책들을 내 놓는다는 건 엄청난 각오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한다.또 그건 돈이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참 지식을 사랑한 그녀였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들에게 말해 보았다."산하야, 우리도 책 많이 모이면 도서관으로 만들까?"그러자 아들은 절대 안된다고 한다.자기 책이라면서.그러더니 나중엔 19살이 되면 그렇게 하라고 한다. 왜 19인지는 모른다. 그냥 나온 말인 듯.

  아무렴 어떠랴 단지 우리들의 책읽기가 자신만의 지적 욕구로 그치지 말았으면 생각할 따름이다.그래서 진정 말하고자 하고픈 것은 '도서 기증'을 하자는게 아니라 세상 속으로 열린 책읽기를 말하고 싶다. 사람 속으로 걸어나가는 책읽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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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군대다 - 여성학적 시각에서 본 평화. 군사주의. 남성성, 청년학술 56
권인숙 지음 / 청년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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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군사화 된 일상

                                                     

   두만강을 세 번 건너 중국으로 그리고 다시 남한으로 망명해 온 북한이주여성 ‘최진이’씨의 책 ‘국경을 세 번 건넌 여자’를 읽고 나는 얼마간 혼란스러웠다. 또 그녀를 직접 만난 이후에도 혼란은 여전했다. 아니 더 했다. 여태 알고 있었던 것보다도 북한의 빈곤은 나의 상상을 넘어서는 상태였고, 내부에서 발생하는 비인권적인 폭압의 일상은 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통일에 관해 어떤 물음을 만들어나가야 할지 난감 그 자체였다.

 

  그동안 미국의 북한인권개입에 대해 거칠게 비판하였는데, 이제는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우리가 말할 차례이다. 그럼에도 침묵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상황이 갈등으로 와 닿았다. 행여나 통일운동에 악영향을 미칠까 혹은 그동안 쌓아온 북한과의 우호적인 관계들이 사그리 물거품이 될까 하는 생각에 나는 내 눈을 가리고 입을 닫고 만다. 그런데 이런 나의 고민들이 ‘대한민국은 군대다’에서 총체적으로 흔들리며 충돌하는 게 아닌가.

  

  대의를 위해선 소의를 희생해도 좋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는 언제나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 해왔다.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여성들의 희생,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성차별 문제, 가족의 화목을 위해 희생되어져야 하는 여성의 목소리까지 언제나 대의보다 덜 중요한 소의로 분류되어지고 침묵 당해왔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내 화두의 중심엔 ‘민족’과 ‘군사주의’가 있었다. 여성을 침묵하게 만드는 억압의 방식들을 찾아내고자 하였으며,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 나의 ‘평화   〮인권’운동의 방향들이 움직여지고 있었다.

 

  2003년, ‘우에노 치즈코’의 ‘내셔널리즘과 젠더’와 ‘정현백’의 ‘민족과 페미니즘’을 읽을 때까지도 나는, 여성은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단지 ‘강한’ 국가에서 ‘약한’ 국가로 수위조절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권혁범’(『국민으로부터의 탈퇴』), ‘임지현’(『이념의 속살』,『우리안의 파시즘』), ‘조한혜정’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작동하는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과 운동권 내부의 폭력성에 대한 자기 비판과 성찰은 어느정도 있어왔다.

 

  그러나 ‘군사주의’와 ‘군사화’ (이념적 가치 체계로서의 군사주의의 일상화. 사회화)라는 개념으로 우리 사회의 ‘국가주의’를 분석하고, 80년대 학생운동의 군사화와 성별화, 징병제, 군대 폭력의 문제를 들추어내는 건 이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는 군사화야말로 여성과 평화의 중층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국가주의를 강화시킬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의 뿌리는 일본에 의한 식민화와 강대국에 의한 분단과 한국전쟁의 경험(p38)’이었으며, 강한 국가만이 평화를 선택할 수 있고, 국민의 운명 결정권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런 사회에서 국민정체성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국가방어의 역할이고, 한국에서 이를 결정짓는 것은 징병제’라 말한다.

                                           

   물론 "여성도 강한 국가 건설과 국가 방어를 위해서 다양하게 참여해 왔으나, 이는 미군지기 주변의 매춘여성, 군인의 아내, 새마을 운동지도자 내지는 참여자, 공장여공, 가정주부의 역할(p53)"이었다. 이런 국가 단위의 평화의 지향은 여성을 다양하게 동원하지만 동시에 주변화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이 책과 하루를 사이에 두고 읽은 ‘아메리타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의 ‘김연자’의 말이 떠올랐다. 김연자는 기지촌 25년간의 경험을 통해 기지촌을 만들고 관리해온 남성국가의 위선을 비판하면서 “내 보지가 알고 보니 나라 보지였더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그녀의 몸 자체가 군사화 된 여성의 몸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권인숙’은 이런 국가주의 폭력과 반공주의에 맞섰던 저항세력의 내부 역시나 군사화 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학생운동의 이중구조, 폭력시위, 성별화 된 시위방식, 남녀대학 간의 위계질서 등을 통해 80년대 학생운동 내부의 성별화 된 군사화를 설명해 나간다. 또 조직체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국가와 민족지향이 강할 때는 남성중심의 문화가 우세하게 되고, 특히 전투적 상황이 강조될수록 여성의 갈등은 사소한 문제로 환원되어 버리거나 침묵하게 되는 것들을 80년대 이상적인 여성활동가로 활약했던 ‘김상인’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드러낸다.

  

  결국, 80년대 학생운동은 일상적 가치에 대한 도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운동이였으며, 운동권 내부의 성별화 된 전략들은 여성활동가들에게 자기 부정과 소외를 경험하게 할 뿐이었다. 학생운동권 내부에서 인정받는 여성활동가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자기 경험을 부정하고 명예남성으로 자신을 세워나갈 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김상인’의 경험을 읽어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학교 교실에 엎드려서 엉엉 울었던 기억, 애국가만 울리면 부동자세가 되어 내 무의식을 국가주의로 강화시켜내던 기억들, 언제나 전시상황임을 주지시켰던 교련시간,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어하던 자신을 쉼없이 ‘쁘띠 브루조아의 근성’이란 것으로 밀어내던 대학시절, 민중문화를 살려내야 한다는 ‘강한’ 문화의식으로 장구를 잡고 북을 잡고 탈춤을 추던 기억들, 서구적 미의 가치에 길들여진 여성들을 비판하며 웨딩드레스와 화장을 거부하던 20대의 관념들이 꾸역꾸역 아프게 올라왔다.

 

  올바른 문화에 대한 이해가 몸보다도 머리로 먼저 하고 말았던 그 불편했던 시간들이 이후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으로 스며든 것은 오히려 여성주의라는 안경을 쓴 이후였다. 만약 20대에 여성주의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나는 ‘약한’ 남성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와 유사한 성격의 소유자인 ‘김상인’의 과거는 나에게도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부분들이었다. 그녀의 고백처럼 우린 다 같이 ‘뽕을 맞은 세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강한’ 국가와 ‘강한’ 저항과 ‘강한’권력을 누리며 지나온 386운동권 세대이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 세대는 자기 내부의 ‘권력’에 먼저 맞서야 한다는 자기 반성이 동반되었다.

                    

 

   4장 ‘징병제’와 5장 ‘군대 내 남성간 성폭력과 남성성’에 대한 글들은 개인적으로 오래 전에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읽어왔던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내 경험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다시 읽게 되니 4년 동안 붙잡고 온 우리의  ‘평화운동’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성별화 된 군사화를 더 분명하게 정리해내고, 우리 사회 평화운동이 부재한 이유를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저자는 ‘전쟁발생에 대한 기피욕구는 강하지만, 평화유지가 평화운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상식’이 일반화‘된 점과 ‘평화운동은 비폭력운동이며, 그것은 무기력한 운동 혹은 약한 운동으로 인식’되어 있음으로 해서 우리 사회 평화운동이 부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덧붙여 집권세력은 저항세력에게 무장해제의 논리로 비폭력 평화운동을 운운하였고, 그것은 저항운동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두려움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보았다. 일부에서 평화= 여성, 통일= 남성으로 성별화 된 운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저자의 지적에 더욱 공감이 간다.

 

   ‘정희진’은 ‘구체적 일상, 개인들 사이의 관계의 민주화 없이, ‘정치’ 개혁이나 역사의 진보가 가능할 수 없다. 그래서 일상의 정치학 핵심은 성별관계 즉 젠더’이며,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리에 저항하는 여성주의는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민주주의를 대립시키지 않는 사유방식’이라고 했다. 그래서 여성주의야말로 현실을 읽어나가는 유용한 인식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군사화를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읽어나간 이 책은 우리 일상의 군사주의를 들여다 보게 만들며, 성별화 된 일상들을 다시금 관찰하게 만든다. 이것이  비록 상처로 점철된 일상의 기억들이라 하더라도, 이전의 ‘나’를 한단계 성장시킬 것이란 믿음으로 책을 덮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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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밥 먹구 가 - 오한숙희의 자연주의 여성학
오한숙희 지음 / 여성신문사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2002.5월 작성
 
밥을 함께 먹는 일!
그것은 정말 중요한 단합과 힘을 준다고 하지요.특히 여성조직안에서 이루어지는 밥심은 그 어떤 일을 해 나가기 위한 기초 작업과도 같습니다.어색한 관계의 남자들이 목욕탕에 가서 친해지는 것처럼 여자들의 관계 역시 밥을 같이 나눠 먹으면서 새록새록 정이 들고, 마음이 열립니다.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밥상공동체의 건강함을 강조 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제게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제 손으로 무언가를 해서 나눠 줄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진 상황이다 보니, 누군가를 집에 불러서 함께 식사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에도 쫓기지만,요리하는 게 싫어져 버린 어느 순간부터는 누구를 부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특히 언젠가 남편과의 언쟁에서 부부가 함께 준비하고 함께 즐기는 모임이 안되면 일체 우리 집에 가족 단위의 손님을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엔 이웃과 밥 함께 집에서 먹기가 정말 어려운 과제로 남습니다. 이래저래 밥상 공동체의 즐거움과 힘을 놓치고 살아가는 제게 오한숙희 씨의 '아줌마 밥먹구가'는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에코 페미니즘의 구체적인 영역들에 대해서,
공동체 생활의 건강함에 대해,
여성주의 사고의 열려있음에 대해.

평등과 생명의 씨를 뿌리며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엿보면서 저 자신을 채근하게 됩니다.
저 산과 땅을 보며 살아가라고,
자궁의 노래를 들어 보라고,
둘러 앉아 밥 먹고 가라고,
자연의 할머니께 감사하는 법을 좀 배우라고합니다. 이 책 한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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