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 페미니즘 채식주의 비판이론과 육식의 성정치
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미토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조르주 상드는 자기 집에서 창문을 통해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 널브러진 채 썩어가는 시체들을 보고 2주 동안이나 붉은 고기를 전혀 입에 댈 수 없었다"
 
  그녀처럼 나역시 한번씩 고기를 먹으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최근 살인마 유영철을 만나고서는 더더욱 생각에 꼬리가 길어진다. 언론매체를 통해 구체적인 살인의 과정을 눈여겨본 후, 나는 구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톱으로 토막낸 15토막의 여자들의 몸, 그것을 싼 검은 비닐, 택시기사에게 새벽장을 봤다고 둘러대면서 시체들을 옮겼다는 그의 비유들, 그 부분들을 읽으면서 나는 ‘아르첸’의 ‘푸줏간’그림이 떠올랐다.


  여러 부위의 고깃덩어리와 돼지 족발, 소시지, 곱창, 가죽이 벗겨진 쇠머리, 방금 잡은 가금류, 생선 등 다양한 식육이 널려 있는 푸줏간은 매우 풍성해 보인다. 하지만 고기가 되어 푸줏간에 내걸린 동물들은 한편으로 존재의 사멸, 곧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죽음은 동물 뿐 아니라 인간도 피할 수 없는 ,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다. 바로 이런 상징성에서 신학자들과 도덕론자들은 ‘음식물 정물화’를 통해 도덕적 기능을 찾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는 그 그림에서 여성과 동물의 피할 수 없는 유사한 운명을 재확인하게 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그래프트’는 1800년대에 여성참정권을 외쳤던 여성해방의 선구자이다. 그녀가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책을 냈을 때, 반박으로 나온 책이 바로 ‘짐승의 권리 옹호’라는 책이었다. 이는 여성 = 동물이라는 도식을 내포하고 있다. 그녀의 딸 ‘메리 울스턴그래프트 셸리’는 ‘프랑켄 슈타인’의 저자이다. 그녀는 낭만적인 채식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채식주의자로서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래서 ‘빅터 프랑켄 슈타인’의 피조물은 자신이 도토리와 장과류를 먹으며 동반자와 함께 광활한 남아메리카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희망을 이야기한 뒤에 빅터에게 ”이런 정경이야말로 평화롭고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식의 페미니즘, 평화주의, 채식주의의 연관성을 찾는 일은 20세기 여성작가들의 핵심주제였다고도 한다.
  

  이 책의 저자 '아담스'(Carol J Adams)는 『프랑켄 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를 통해 “어떤 사람(동물과 여성)이 우리의 가부장제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육식에 부여된 의미가 사나이다움의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성정치가 구조화되는 방식이 우리가 동물, 특히 소비되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연관된다는 것을 설명해 나간다. “즉, 가부장제는 인간/동물 관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성별체계라고 본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차적 개념은 ‘부재지시대상’이다. 이를 통해 여성과 동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부재지시 대상’이라는 개념은 육식가를 동물과 분리하고, 동물을 자신의 최종생산인 고기에서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이 기능은 우리가 먹는 “고기”를 ‘그 남자 또는 그 여자가 한때 살아있는 동물이었다’라는 우리의 생각에서 분리시키는 것, 그리고 어떤 것(what)을 어떤 사람(who)을로 간주되는 존재와 분리시키는 것이다. 고기의 현존이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죽은 동물의 상태를 지시하는 데 자주 이용된다. 동물은 육식행위에서 부재하는 지시 대상이다. 한편 동물은 도살되고, 파편화 되고, 또는 소비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부재지시대상이 된다.“


 그래서 아담스는 “페미니스트 -채식주의 비판이론은 여성과 동물이 가부장제세계에서 비숫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자각, 즉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남성들은 십계명에 따라 여성과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하는 지 배운다. 인간의 타락이 여성과 동물의 탓으로 돌려진 뒤, 인간의 형제애는 여성과 동물을 배제해 왔다”고 본다. 그러므로 “여성과 동물을 주체로서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양자의 교차점들을 파괴하고 중첩된 억압을 야기하는 가부장제적 부재지시대상의 구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과 채식주의를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동물옹호가 이론이라면 채식주의가 그 이론의 실천이라는 것, 페미니즘이 이론이라면 채식주의가 그 실천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육식은 남성지배에 통합되어 있는 일부다. 채식주의는 가부장제문화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무엇이다. 나는 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세 가지의 양상-고기의 무의미성에 대한 고발, 남성지배와 육식의 연관성에 대한 명명, 가부장제와 육식세계에 대한 비난-으로 표현하는 모델을” 제시한다.

  물론 저자는 “채식만이 인간의 신체에 적합하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직접 수집한 많은 자료에 근거해 볼 때 인간이 생리적으로 채식에 적합하게 태어났다“고 본다. 그래서 그녀는 "채식주의 신체(vegetarian body)"라는 개념 - 여성 억압과 동물 억압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주장들을 환기시키면서, 현재 과학/의학 연구가 밝혀주고 있는 채식의 이점들의 실체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를 실천으로 제안한다. 그리고 ‘아담스’는 ”쌀을 먹는 것이 여성에 대한 믿음(Eat rice have faith in women: 프란 위넌트)“의 시를 자신의 신조이자 미래상이라고 밝힌다.

  결혼 전까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를 낳기 바로 얼마 전까지 나는 채식주의에 가장 근접하게 생활해 왔었다. 어릴 적부터, 내게는 ‘부재지시대상’이 작동되지 않은 탓인지, 모든 고기에 본래 짐승의 모습이 따라 다녔으며, 하물며 계란, 멸치반찬에서도 나는 그것의 원래 모습을 떠올리며 먹질 못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해 난 다른 누군가의 심각한 제제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보니 시댁은 매년 보신탕을 대 놓고 먹는 집이었으며, 하루 세 끼 내내 고기가 올라오는 집안이었다.


  시아버지의 생신잔치를 처음으로 바깥에서 준비하게 되었을 때도 우리가 도착한 곳은 염소를 즉석에서 매달아 때려, 구워, 직접 뜯어먹는 야외 식당이었다. 나는 모든 집안가족들과 멀리 떨어져서 혼자서 고픈 배를 잡고 버티다가 돌아왔었다. 대신 시집 가족들의 온갖 눈치아 별스럽다는 소리를 엄청 먹었다. 사실 내가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건 시어머니의 눈엔 인간이 안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고기를 먹게 되었을 때 맨 먼저 하신 말씀이 “이제 인간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임신을 해서 막달이 되었을 때부터 난, 갑자기 언제가 맛을 보았던 쇠갈비가 자꾸만 먹고 싶었졌었다. 그래서 출산 바로 전까지 남편과 나는, 갈비를 먹기위해 지산동으로 달려가곤 했다. 아이를 낳은 후엔 고기 맛을 알게 된 탓인 지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고기가 먹고 싶어먹곤 한다. 그러면서도 문뜩문뜩 고기에서 나는 산짐승, 인간의 모습을 보이면 멀찌기 밀어낸다. 그러면 다시 몇 달은 고기를 입에 대지 않다가 잊혀지면 다시 또 먹곤 한다. 채식에서 육식으로 변하는 것, 육식에서 채식으로 변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성격은 바꿀 수 있어도 입맛은 바꾸기 힘들다고 하는 가 보다.

 그런데도 임신 과정에서 나에게 그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지금 다시 돌이켜 보면, 그건 아마도 내 무의식에 “돼지고기를 먹어야 아이를 숨풍 잘 낳는다”는 세뇌된 모성애 때문인 것 같다. 그로인해 내 안에서 “고기를 죽음으로 보는 시각”(채식주의)이 “고기를 생명으로 보는 시각”(육식주의) 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일 지도.

 고기를 입에 댄 지 5년이 되어 간다. 그런데 지금 나는 다시 예전의 먹거리를 다시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제 그건 단순히 먹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닌 것이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동일하게 보이는 것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의 의식은 모험일 수도 있으며, ‘사실’을 ‘모순’으로 바꾸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이 내게 사실을 모순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어 줄 듯하다.

  또한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은 앞으로 처신을 잘하라”는 엽기살인마 덕에 내게는 “동물”에게 부재되어 있던 “여성”의 이미지를 되찾게 된 것인 지도. 그래서 나는 살인마를 통해 보게 된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린 가부장제에 환멸을 느끼며, 17세기 암스테르담에 있던 상점의 달력 글귀에 적혀있다던 문구를 기억해 낸다.

 

  “크나큰 즐거움으로 돼지나 송아지를 잡는 자여, 주의 날이 오면 그의 심판대 앞에 네가 어떻게 서 있을 지를 생각하라”

 

 


 
 
아르첸<푸줏간> 1551.나무에 유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갱 2005-06-2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겨레 신문 칼럼에서 이 책을 인용한 부분이 있어 알라딘에 들어와 봤습니다. 저는 채식주의자는 아닌데요. 시골에서 자란지라 고기보다는 푸른 채소를 더 많이 먹고 컸구요,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회식을 하다보니 고기를 너무 많이 먹게 되더라구요. 어느날 점심때 또 접대랍시고 고기를 굽고 있는데 핏물이 자글거리는 고뻘건 고기들을 보는 순간 정말 징그러워서 먹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걸 좋다고 먹는 사람들을 봐도 그렇고.. 점점 의식을 하면서 줄이고 있는데,, 우리 나라 음식이 고기가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 줄 진짜 몰랐어요.. 암튼,, 정성들여 적으신 리뷰 잘 읽었습니다.. 책 사서 정독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