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by - Play
이엠아이(EMI)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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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Moby 5집 - Play [1999]: 인간적인 테크노

 

 

모비의 최고 히트곡은 단연 'Extreme Ways'일 것입니다. 이 곡은 영화 본 시리즈의 OST에도 수록되었고, TvN의 <더 지니어스>에도 삽입되면서 최근에도 큰 인기를 끌었지요. 'Extreme Ways'가 수록된 <18>[2002]도 모비의 대표 앨범이지만, 그의 최고 작품으로는 바로 <Play>가 손꼽힙니다. 

 

모비의 음악적 특징은 테크노라는 장르를 표방하면서도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지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테크노가 차갑고 기계적인 소리에 천착한데 반해 모비는 반복적인 리듬을 활용하면서도 소울풀한 보컬들을 활용하여 온기를 획득합니다. 이러한 인간미 넘치는 보컬 트랙들의 중용은 모비만의 트레이드마크이죠.

 

뿐만 아니라 그가 건드리는 음악적 스펙트럼도 넓고 다양합니다. 테크노 R&B인 'Why Does My Heart Feel So Bad', 록적인 요소가 물씬 풍기는 'Bodyrock', 일렉트로니카 블루스 'Natural blues', 댄스뮤직인 'South side'등 다채로운 터치를 만날 수 있지요. 이같은 역량은 그가 엘릭트로니카 뮤지션이 되기 전에 클래식 기타 연주자, 하드코어 밴드, 얼터너티브 밴드 등의 경력을 거쳤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인간미 넘치고 다채로운 음악적 성취는 상업적 성공도 가져왔습니다. 발매 당시 영국 차트정상을 차지했고 미국에서만 지금까지 200만장 이상의 판매를 하여 일렉트로니카 계열 앨범으로는 드물게 대중적 사랑을 받았습니다. 

 

<18>이후 지속된 하향세가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모비라는 브랜드는 <Play>라는 세기말의 명반 때문에 음악사에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 개인 별점: ☆ (8.3)

- 음악사적 가치: 4.4/5

- 개인적인 취향: 3.9/5



* 주요 웹진 별점

 

Professional ratings
Review scores
SourceRating
Allmusic4.5/5 stars[1]
Alternative Press4/5 stars[7]
Robert ChristgauA+[8]
Entertainment WeeklyA−[9]
NME8/10[10]
Pitchfork Media5.0/10[11]
Q4/5 stars[12]
Rolling Stone4/5 stars[13]
Spin9/10[14]
Sputnikmusic5/5[15]

 

 

* 참고자료

- 위키피디아

- 임진모, <세계를 흔든 대중음악의 명반>

- 로버트 다이머리,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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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 - 정규 6집 Newton's Apple [2CD]
넬 (Nell)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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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넬 8집 - Newton`s Apple [2014]: 능숙하고 세련된 소리, 울지 않는 마음


 

넬의 8번째 스튜디오 정규 앨범(메이저6집)이 나왔습니다. <Newton`s Apple>[2014]은 2012년 <Holding Onto Gravity>를 시작으로 작년 <Escaping Gravity>를 거쳐 진행된 3부작 프로젝트의 완성품입니다. 그래서 본 음반은 총 2CD로 첫 번째 디스크에는 신곡들이 들어있고, 두 번째 디스크에는 앞선 1,2부의 곡들이 모여있지요.

 

이 앨범에 대한 음악 평론가들의 리뷰 및 간단한 코멘트가 이즘과 웨이브에서 게재됐는데 전반적인 평은 좋지 않습니다. 이즘의 이기선은 별3개, 웨이브의 최성욱과 이재훈은 6점과 5점이지요. 공통적인 평가가 '반복(클리셰)'입니다. 쉽게 말해 뻔한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신보가 넬의 커리어에서 특별한 음악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하지만 그럼에도 그동안 꾸준히 실험해 온(훈련한) 소리의 세공들이 안정적이고 다채롭게 구현되고 있습니다. 유니크한 느낌을 주진 않지만, 사운드를 제조하는 그들의 손길을 물씬 체험할 수는 있죠.

 

제가 느낀 아쉬움은 '반복'의 문제보단 마음과 관련합니다. 넬의 음악은 저의 리스너 인생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제 마음을 여지없이 허물고 울렸던 역사와 관계합니다. 저는 많은 시간 넬의 음악을 들으며 상처들을 보살폈고 위로를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넬은 더 이상 그런 울음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잔인한 슬픔에서 비롯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미 넬이 너무 많은 감정을 소모했고, 너무 많은 어휘를 휘발시켰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훌륭한 많은 뮤지션들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도 대단하고 음악사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는 음악인들이 있지요. 하지만 훌륭한 그들 중 나의 유니크한 음악인이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학술적으로나 음악사적으로 가치를 학습할 수는 있지만, 음악은 결국 마음을 적시며 자신에게 닿지 않으면 흔들림을 주지 않지요. 넬은 저에게 흔들림을 주었던 유니크한 밴드였습니다. 그래서 여전한 팬심에도 이들의 최근 음악들은 아쉬움을 줍니다.

 

 

 

* 개인 별점: ☆ (7.8)

- 음악사적 가치: 3.9/5

- 개인적인 취향: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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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Beatles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Beatles 2009 리마스터] [한정 수입반, 디지팩] -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선정한 100대 음반 시리즈 8] 비틀즈 리마스터 시리즈 7
비틀즈 (The Beatles) 노래 / Apple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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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비틀즈의 음악을 많이 들었지만 대부분 히트곡 모음집이었기에 제대로 명반을 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비틀즈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꼽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빼 들었습니다.

 

1960년대 예술계는 사이키델릭의 시대로 흔히 일컬어집니다. 사이키델릭은 그리스어로 ‘정신’이라는 뜻인 ‘psyche’와 ‘눈으로 보이는’ 또는 ‘분명한’이라는 뜻의 ‘d'elsos’를 결합시킨 조어입니다. LSD 등의 환각제를 복용한 뒤 생기는 일시적이고 강렬한 환각적 도취상태 또는 감각체험을 말하며 그런 상태나 체험을 재현한 그림이나 극채색 포스터, 패션, 음악 등을 가리키지요. 1960년대에 주로 히피족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예술가에 의해서 도입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비틀즈의 본 앨범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히피, '사랑의 여름'의 음악적 완성, 팝 음반 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 받습니다. 지금은 당시 유행했던 반(反)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들이 있지만(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의 <혁명을 팝니다> 참조할 것), 당시에는 이러한 조류가 체제의 대안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앨범에서 비틀즈는 그런 반체제적 예술 조류에서 정치적 색깔을 지우고, 철저하게 예술적 지향을 추구했습니다. 동양종교와 마약을 통한 고독과 탈출의 시대정서가 물씬 담겨있는데 반해, 도드라진 평화와 반전에 대한 견해는 보이지 않지요. 그것은 예술성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960년대만 해도 대중음악은 미학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클래식 진영으로부터 멸시를 받았다는군요. 그런데 이 음반을 통해 대중음악도 미학적 성취가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앨범은 팝송의 일반 틀을 과감히 부수어 교차리듬(cross rhythms)을 믹스했고, 바하부터 스톡하우젠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작곡가들이 쓴 클래식 연주악기를 활용, 마치 오케스트라 같은 웅장함을 도입했습니다. 또한 우주시대를 연상시키는 무수한 전자음향 효과를 살리고 테입을 역회전하거나 속도를 다양하게 조절하여 믹싱하는 등 갖가지 신기술을 총동원했다고 합니다(앨범 자켓도 미학적으로 훌륭하지요). 

 

어쨌든 시대를 풍미했고 음악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앨범으로 꼽히는 이 앨범에 대한 저의 감상은 어떨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좋긴 한데, 나의 앨범은 아니라는 느낌이었습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있듯이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같은 곡들은 지금 들어도 빼어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앨범의 마지막 곡인 'A Day In The Life'는 왜 역대급인지를 체감하게 하는 곡이고요. 그럼에도 그들의 시대정신이 지나가버린 지금에서는 훌륭한 곡들 이상의 감흥을 받지 못했습니다. 앨범을 지배하는 다소 업된 분위기도 크게 와닿지 않았고요. 뭐, 그럼에도 최근 쏟아지고 있는 음악들 속에서 이 음반에 계속 손이 갔던 이유는 시대를 초월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개인 별점: ☆ (9.0)

- 음악사적 가치: 5/5

- 개인적인 취향: 4/5

 

 

* 주요 웹진 별점

 

Professional ratings
Review scores
SourceRating
AllMusic5/5 stars[63]
The A.V. ClubB+[64]
Robert ChristgauA[65]
The Daily Telegraph5/5 stars[66]
Encyclopedia of Popular Music5/5 stars[67]
MusicHound5/5 stars[68]
Paste89/100[69]
Pitchfork Media10/10[70]
The Rolling Stone Album Guide5/5 stars[71]
Sputnikmusic5/5[72]

 

* 참고자료

- 패션전문자료사전, 패션전문자료편찬위원회, 1997.8.25, 한국사전연구사.

- 위키피디아

- 임진모, <세계를 흔든 대중음악의 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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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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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정이현,『낭만적 사랑과 사회』와 박민규의『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영리활동이 된 사랑의 본 얼굴을 찾아서

 

 

 정이현의「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었다. 언젠가 이 책을 읽고 내게 한마디 한 선배가 생각이 난다. 그 때 형은 “여기 나오는 여자, 완전 빡치게 하지 않냐?”라고 했고, ‘고급창녀’ 운운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조금 충격은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이 소설을 읽게 됐다. 이번엔 장마 탓인지, 조금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화자는 ‘어장 관리’를 하면서 최상위 계급의 남자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성(性)적 자원을 활용한다. 상당한 수준의 어장을 관리하는 것으로 볼 때, 예쁘고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쪽에 속하는 듯 보인다. 적당히 괜찮은 남자들을 주무르던 그녀는 마침내 “내 인생 스물두 해를 걸고 배팅해볼 만한 남자”1)를 발견한다. 그는 그녀가 꿈꾸던 최상위 계급의 남자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타월 위에는 한 점의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봐도 순백의 시트 위는 깨끗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전거를 타지도 않았고, 심한 운동을 한 적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시트 위에 천천히 커버를 덮는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먹먹하다. “너 되게 뻑뻑하더라.”2)

 

 이 남자를 위해서 그동안 어장관리를 할 때도 급한 정액을 입으로만 받던 그녀 아니던가.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지킨 순결을 허락한 남자에게 그저 “너 되게 뻑뻑하더라.”라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호텔에서 나온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대신 명품 백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백의 진품여부에 대한 의심과 그의 낯선 얼굴을 보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3)

 

 그녀가 갖게 된 이러한 사랑관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우선 자신의 가정사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내 인생, 엄마처럼 사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스스로 중산층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허울만 좋은 중소기업 임원의 아내로, 이십몇 년 결혼 생활 동안 백화점 세일 때 허접한 옷 골라 사고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다닐 수 있게 된 걸 생활의 여유라고 생각하는, 쉰 살 다 된 여자의 인생을 떠올리면 정신이 바짝들곤 했다.4)”라고 말한다. 그 뿐일까?

 

 친구에 대한 나의 뜨거운 연민은, 그러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깨끗이 사라졌다. 혜미가 아무렇게나 어깨에 둘러멘 오리지널 샤넬 백에서 원격 무선 조종기를 꺼내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카페 앞에 세워진 병아리 색 뉴비틀의 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혜미의 아버지는 서울 시내 요지에 다섯 채쯤의 빌딩과 열 채쯤의 다세대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었다.(···) 나는, 나는 다르다.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5)

 

 그녀의 사랑동력은 계급상승의 욕망이다. 그래서 “당연한 거 아니야? 얼마나 사랑하는데······”6) 따위의 말은 조소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 동안 만났던 남자들이 그녀가 갖고 있는 상상력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저 여자랑 한번 자볼까 하는 궁리밖에 하지 않는 주제에 급할 때마다 비밀 병기처럼 사랑을 들이댄다. 사랑하니까 키스해야 하고, 사랑하니까 만져야 하고, 사랑하니까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사랑! 피가 한곳으로 몰려 갑갑한 느낌을 해소하고 싶은 몸의 욕망이 도대체 사랑이랑 무슨 관계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7)

 

 그녀가 남자를 통해서 계급상승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남자들도 그녀를 통해서 성적 욕구를 해소하려고 한다. 즉, 서로의 존재가 도구적인 것이다. 사랑이 과연 계급상승의 도구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정녕 성적 욕구의 대상물일까? 나는 이들의 사랑을 보면서 박민규의『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생각이 났다. 이 작품에서는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다니는 고린도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8)

 

 박민규는 남들보다 더 가지고, 더 강해지고, 더 높은 곳에 자리잡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부여받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사랑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 것도 없는 서로를... 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이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9)

 

 박민규가 규정하는 사랑은 기적이다. 따라서 그가 만약 정이현의 사랑을 규명한다면 “당대의 현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이현의 사랑은 당대의 현실을 위해 자신의 성(性)을 계급상승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박민규는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지만, 사랑은 “미리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지는 것(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이기에 정이현의 사랑은 사랑이라기 보단 '영리활동'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정이현의 사랑을 비방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후기 자본주의의 자식들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말한 것처럼, 진리들은 항상 극소수의 주체만이 획득할 수 있다. 당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것은 이미 자신의 신체와 마음에 각인된 당대의 논리를 찢는 일 없이는 가능하지가 않다. 당신은 혐오감이 드는 외모를 가진 여자를 정녕 사랑할 수 있는가? 당신은 무능하고 실패 한 추남을 사랑만으로 끌어 안을 수 있겠는가?

 

 얼마 전 동기모임을 가졌다. 수다는 자연스럽게 사랑과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 조건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아. 사랑한다면 조건은 극복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소박하게 살더라도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고, 그러면 되는 거잖아.” 물론 그 친구는 조소를 받았다. “우리애기 철 좀 들어야겠네.” “네가 여자니깐 한가한 소리하는 거다.” “현실을 모르는구먼.”등등. 나는 사실 그 여자애의 말에 공감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섣불리 얘기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만으로는 확신에 찬 선언을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다만, 나로서는

 

 ‘사랑이 정말 마냥 <손해>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경제적으로 보면 손해일 수 있을 것이다. 돈이 들고, 시간이 뺐기고, 자기계발들이 유예되는 등등. 하지만 “그해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 큰 이익이었다. 천문학적 이익이란 아마도 이런 걸 뜻하는게 아닐까, 무렵의 나는 생각했다.”10)라는 문장에 공감이 간다(그랬던 사랑을, 나는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열심히 산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삶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무료, 해도...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고 나는 믿었다. 무료하므로 돈을 모으는 것이다... 무료해서 쇼핑을 하고, 하고, 또 하는 것이다... 큰소리치는 인간도... 결국 독재를 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도... 실은 그래서 사랑에 실패한 인간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11)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12)라고 말한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떠난 것”13)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14)이다. 내가「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느낀 슬픔은 바로 그 소설 속 화자가 ‘아픔’을 가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왜 사람보다/사랑보다, 돈을/계급을 우선시 하게 된 것일까. 왜 '영리활동'과 무관한, 사랑에는 관심이 없을까. 물론 이런 나의 생각 자체가 폭력적인 것 일게다. 어떻게 타인의 사랑관을, 행복관을 손쉽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사람이 사람을 믿고, 또 전적으로-전면적으로 겹쳐지게 되는 사랑이라는 소중한 체험을, 신이 준 상상력을. 인류라면 누구든 경험하고 반복해갔으면 하는 독단적인 바람이 든다. 자신보다 타인을 더 아끼고 소중히 여기게 되는 놀라운 경험들, 그러한 사랑 탓에 영리활동이 시시해졌으면 좋겠다.

 

 

 


1) 정이현,『낭만적 사랑과 사회』, 문학과지성사, 2003. 27쪽.

2) 정이현, 위의 책, 33쪽.

3) 정이현, 위의 책, 35쪽.

4) 정이현, 위의 책, 20~21쪽.

5) 정이현, 위의 책, 24~25쪽.

6) 정이현, 위의 책, 24쪽.

7) 정이현, 위의 책, 15~16쪽.

8)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예담, 2009. 228쪽.

9) 박민규, 위의 책, 224쪽.

10) 박민규, 위의 책, 157쪽.

11) 박민규, 위의 책, 299쪽.

12) 알랭 바디우,『사랑예찬』, 길, 2010. 71쪽.

13) 알랭 바디우, 위의 책, 71쪽. 

14) 알랭 바디우, 위의 책,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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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연상호 감독, 권해효 외 목소리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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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사이비 [2013], 연상호

- 사이비만 사이비인가, 우리는 사이비가 아닌가

 

 

많은 분들이 추천하시던 연상호의 <사이비>를 드디어 저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전작이었던 <돼지의 왕>도 괜찮았었는데, 이번 작품은 그보다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기독교 열심자라 남달리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댐 건설이 결정되면서 자신들의 고향이 수장될 상황에 놓여 있는 작은 마을에 사이비 종교가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불행을 희망으로 변환시키는 ‘구원’이라는 종교성이 마을을 지배해 갈 때, 한 남자는 이를 부정하며 초인 같은 투쟁을 보입니다. 그의 분투하는 쟁의는 눈부셨지만, 진실을 얻는 대가는 파국이었습니다. 종교는 다시 그의 불행을 회수하여 노년의 그를 굴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절을 받습니다.

 

이 세계에서 유일했던 그 남자는 ‘믿음’을 의심했지만, 실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믿는 사이비에 대한 ‘믿음’은 의심했지만, 자신의 믿음, 다시 말해 ‘팔자소관’은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의 딸이 자신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을 사이비를 통해 붙잡을 때, 그는 그녀의 불행을 팔자로 규정합니다. 희망을 잃은 그녀는 십자가를 자살 도구로 사용하여 마지막 끈을 놓습니다.

 

 

 

<사이비>는 ‘사이비’를 소재로 다루지만,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종교성 그 자체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영화를 사이비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손쉽게 구분하여 밀쳐낼 수 없습니다. 불행을 구원을 위한 장치로 설정하고 믿음에의 강요를 추진하는 것은 우리 세계의 일종의 공식입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기행각’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행을 타개하려 합니다. 그 불행은 우선적으로 국가폭력의 도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댐의 건설은 마을 사람들의 의지가 아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국가의 사실상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해체를 낳습니다. ‘성님’과 ‘성님’의 관계는 흩어지기를 강요당합니다. 바로 이 불행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영화에서 ‘사이비’는 두 가지를 약속합니다. 하나는 지금의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게끔 하겠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죽음 이후에도 그것이 계속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사기였고, 후자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이 역시 사기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마을의 문제는 ‘사이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성님’과 ‘성님’의 관계 자체가 악질적입니다. <사이비>는 ‘사이비’의 틈바구니에서 성장하고 경쟁합니다. 아버지의 폭력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어머니와 딸이 부여잡는 바짓가랑이는 그 자체가 사이비입니다. 폭력의 완화를 위한 사이비 믿음은 손쉽게 다른 사이비로 이전되고 맙니다. 폭력의 사이비에서 사랑의 사이비로 전이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문제적인 여러 인물이 있지만, 특기할만한 사람은 목사입니다. 그는 애당초 사이비였던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사이비가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는 것은 목적을 위해 사라진 수단과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대의를 두고, 불의한 수단과 방법에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할 무엇이 아니라 당장 행해져야 할 무엇입니다. 유예된 신의 나라는 조롱 받게 되고 사이비로 전락할 명분을 허락합니다. 종교적 인간의 유약함은 의심 없는 당위의 세계에서 파국이 회수해 갑니다.

 

의심받지 않는 종교성은 불행이란 양식을 먹고 자랍니다. 불행하면 불행할수록, 불행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종교는 건강미를 뽐냅니다. 건강해진 종교는 피폐해진 신자들에게 미소를 건네며, 불행해질 대로 불행해진 신자들은 그 미소를 믿게 됩니다. 억울하게도 그 믿음은 행복에 닿게 합니다. 종교적 믿음의 효과, 아이러니입니다.

 

 

 

행복한 신자입니까? 이건 사이비입니다. 진실을 얻은 이성인입니까? 그 역시 사이비입니다. 종교든, 이성이든,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사이비의 양식이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랬듯이 유일한 한 남자도 사이비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독단적 가부장의, 팔자소관이라는 사이비 믿음. 진실은 항상 부분적으로만 진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일그러진 믿음을 향해, ‘다시 사랑’을 외칠 것이고, 이성주의자들은 일그러진 세계를 향해, ‘다시 회의’를 지향할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복귀와 믿음에의 반복과, 비판적 이성의 작동과 회의에의 지향은 어디로 항해해나갈까요? 그 항해의 여정이 어떠하든, 서로가 서로에게 사이비,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사이비,가 아닌지를 도리어 묻는, 그런 항해가 되길 열심해 봅니다.

 

 

★★★★ (8.8/10)

 

추신.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영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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