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날 더욱 절실해 지는 고전의 지혜

 

 

 이 책은 서강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장영희 교수가 3년 동안 조선일보에 기고한 문학 에세이를 모아 낸 것이다. 이 작품은 많은 매체에서 호평을 받으며 추천이 되기도 하였다. 최근 골치 아픈 인문학 서적에 메여있다 호흡도 가다듬고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가볍게 읽으려 했던 이 책은 내게 무거운 감동을 선사했다. 자고로 문학은 진정성이 교감의 열쇠가 된다.


 이 에세이집이 특별한 이유는 진정성 때문이다. 이 책은 고전으로 불리는 작품들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저자의 에피소드를 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장영희 교수에게 에세이 기고를 요청한 조선일보사의 사전 조건이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글을 읽고 서점으로 달려가 당신이 소개한 책을 사서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글을 써 달라.”였다고 한다. 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책을 읽으면서 에세이에서 소개한 책을 사서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허나 그 보다 앞서 에세이 자체에 감동을 받았다. 그 이유는 저자의 솔직한 삶의 고백 때문이다.


 고전을 소개하는 수많은 책들이 있고 또 쏟아지고 있다. 그 책들을 보며 아쉬웠던 것은 단순히 가이드북의 역할만을 수행할 뿐 그 책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책의 저자가 고전을 방패막이 삼아 뒤에 숨어 그저 고전을 예찬 할 뿐 자신의 삶과 고전을 잇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이 작품은 오늘날 고전이 어떻게 일상에 침투되고 삶을 만들게 하는가를 소상히 가르쳐주는 책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소 아쉬웠던 점이 있다. 다름 아니라 이 책을 읽을 때 사용한 독서 방법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상당히 성급하게 읽어 버렸다. 책상에 쌓여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의 압박 때문이었지만 에세이 하나, 하나를 심도 있게 읽고 또 그 못지않게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불티나게 팔리는 문제집 뒤로 먼지만 수북이 쌓이는 고전의 처량한 신세. 나의 책상 위 영어 문제집 아래 깔려있는 고전 <<허클베리 핀의 모험>>. 나도 훗날 거닐만한 문학의 숲을 위해 먼지 쌓인 고전 하나 들어 본다.

 


추천강도 ★★★☆
독서 난이도 ★★


08.08.19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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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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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꿈은 따뜻한 현실의 위로가 있을 때에야 그 의미를 갖게 된다.> (정한아 “달의 바다”를 읽고)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이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 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맛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본문 7쪽>

 사람은 태어나게 되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계속된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슨 이유로 살아갈까. 누구든 살기위해선 삶의 이유가 필요하다. 그 이유를 잃게 되면 죽지 못해 사는 삶이 되고 만다. 사람은 무언가를 꿈꾼다. 그것이 삶의 의미와 원동력이 된다. 나도 꿈을 꾸고 당신도 꿈을 꾼다. 우리는 그 꿈을 향해 쫓아간다. 다만 잊고 있는 것은 달에는 바다가 없다는 진실이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있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고모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 빚진 것이 없어.” <본문 145쪽>

 고모는 엄마를 속인다. 그런데 그 덕에 엄마는 행복할 수 있었다. 그녀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에 그녀의 편지는 더 없이 아름다웠다. 사람은 누구나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 속에 놓여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현실과 가까워져 꿈의 소실에 대한 정당성 획득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 있나? 그럴 수 없다. 꿈이란 삶의 원동력이지 삶 그 자체는 아니다. 삶 그 자체는 현실이며 현실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우글대는 곳이고 꿈을 상실한 사람들의 슬픔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필요한건 꿈의 성사에 대한 강요가 아니라 단지 따뜻한 위로이다.

 ‘꿈에서 깨고 나면 갖고 있던 걸 뺏긴 것처럼 허허로운 마음이 되지만, 그래도 저는 멈추지 않고 다시 꿈을 꾸려고 이불을 끌어당’기는 소설 속 화자처럼 꿈은 오히려 이불을 끌어당기기에 가능하다. 꿈은 현실과 닿아있으면서도 현실 그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꿈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달에 바다가 없는 것은 과학적 진실이다. 하지만 달의 과거의 어느 날 혹은 미래의 어느 날에도 바다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꿈이란 그런 것이다. 당장 지금, 오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될 수도 있을 가능성이다. 존재하지 않는 꿈의 오늘에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갈 이유의 꿈은 기대 밖의 좋은 일 혹은 나쁜 일과 같이 빚질 것 없는 나와 세상의 매개체이다. 그렇다. 꿈은 현실 밖에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결국 현실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 꿈은 따뜻한 현실의 위로가 있을 때에야 그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소설은 제 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이다. 1982년 태생의 아주 젊은 작가다. 그녀의 가벼워 보이는 나이를 보고 얼마 전 읽은 백영옥의 “스타일”이 떠올라 괜스레 우려가 되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겨감에 따라 그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즐거웠다. 소설은 꽤나 의미심장했고 감동적이었다. 물론 진부한 캐릭터 설정이라든지 작중 화자 ‘나’의 밋밋함 등의 아쉬운 대목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꽤나 밀도 있는 완성도를 가졌다.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기대를 걸어본다.



08.07.22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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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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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실존의 문제를 촐라체의 빙벽에서 자극하다.> (박범신의 “촐라체”를 읽고)

 소설 속 세 화자는 촐라체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실존적 물음을 직시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오늘의 발버둥이었고 과거의 일그러진 기억과의 화해였다. 

 저자는 이 책을 산악 소설이 아닌 실존적 소설로 봐달라고 했다. 또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소설이라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길은 결국 두 갈래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나의 길은 경쟁에 가위눌리면서 자본주의적 소비문화를 허겁지겁 쫓아가는 길일 것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안락한 일상을 버릴지라도 불멸에의 영성을 따라 이상을 버리지 않고 나아가는 길일 것이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본문 327)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경쟁에 가위눌리면서 자본주의적 소비문화를 허겁지겁 쫓아가는 길’을 걷고 있다. 맞다.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적 소비문화가 강제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슬픈 건 자본주의적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무비판적 동의의 삶으로 젊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 또한 목숨을 건 촐라체 등반을 감행하고 있다. 지독히 좁은 취업 구멍 속을 통과하기 위해 역겨운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등반 역시 위태롭고 치열하며 때로는 감동적이다. 다만 슬픈 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촐라체를 등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강요에 의해 기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못 배운 부모님의 설움에서 비롯된 강제 때문일 수도 있고 명품 구두를 요구하는 여자 친구의 강요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의 안정된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거세되는 건 꿈이며 실존적 물음들이다. 

 이 소설은 바닥의 언저리에서 쳐 올라오는 젊은이들의 치열한 실존적 싸움을 촐라체 빙벽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제시한다. 촐라체는 어디든 존재하며 너와 나의 가슴 속 역시 그러하며, 그런 촐라체가 품는 수많은 위험을 안고서 치고 올라가야 한다고. 정상 정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존재 의문을, 카르마를 이루기 위해서. 정상 위는 다만 허공일 뿐, 그 어떤 산도 허공 아래 존재할 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실체, 스스로의 자각이라는 것이라고. 

 박범신이 제시한 메시지는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그 제시의 방법인 소설은 내 마음을 그다지 울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생소했던 등반 전문 용어의 낯설음 때문으로 치부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노골적인 작위성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지나친 의욕과 메시지적 강박관념 때문에 너무 드라마틱한 장면이 난발한다. 이를테면 하영교가 추락할 때 운 좋게 살아남게 되는 그 과정이라든지 혹은 줄이 끊기며 추락하는 그 순간이 그의 형 박상민이 칼을 내 던진 타이밍과 동일시되는 점 등 소설 구석구석에 우연의 장면이 지나치게 많다. 또한 상민과 영교의 낯간지러운 화해의 과정은 너무 어색했다. 작가의 지나친 개입이 들통이나 캐릭터가 스스로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세 명의 화자가 돌아가면서 소설을 전개하고 있기에 자신의 속마음이 속속들이 들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 거리감의 조절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느껴졌다. 

 박범신의 신작 “촐라체”는 젊은이를 위한 소설이라고 말하지만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신파극에 거부감을 느끼는 젊은 세대의 감성을 헤아리지 못한 점 등의 아쉬운 대목이 있다. 하지만 소설의 핵심 맥은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카프카가 인생을 미로 속의 자유의지로 표현했지만 이제 이 시대는 그 미로적 구조를 탈출할 상상력이 필요할 시점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젊은이의 실존적 물음을 자극하는 역할을 감당할 게기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해본다.

 

 

08.07.21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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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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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재기발랄한 솔직함이 왕자님을 만나 어색해지다.>

    - 백영옥의 “스타일”을 읽고


 맞는 말이다. 여성들에게 있어서 혁명이란 다이어트가 없는 세상이 도래함을 말하는 것 일게다. 하지만 어쩌나, 그런 혁명을 꿈꾸는 여성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이 원해서 다이어트를 한다. 정상적인 나의 몸을 비정상적인, 빌어먹을 작은 옷에 구겨 넣고 싶은 것은 이미 물들어 버린 시대의 미적 의식 때문이다. 하루에도 배고픔 속에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측은함과 그 배고픔을 조장하는 자본의 응축된 보석을 사고 싶은 이중성. 마음은 항상 이것과 저것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이상은 항상 현실과는 거리를 두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지금의 젊은 도시 여성들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럭셔리한 패션 잡지 아래 구연되는 지저분한 이해관계와 책상. 아프리카 난민에 대한 연민과 프라다 가방에 대한 동경. 상사를 향해 조작하는 미소와 마음속으로 외치는 욕설. 하지만 그 거리를 마냥 방치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인정하고 화해를 제안한다. 그것은 외면의 것을 넘어 내면에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고 이해이다. 그리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처에 대한 연민과 치유이다.

 “스타일”은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상금이 무려 1억이나 된다. 최근 가장 이슈가 되는 소설이고 문학상 수상 작품이며 동시에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어서 별 다른 고민 없이 책을 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저 그랬다.


 소설의 초반부는 산뜻했다. 문학에서 그다지 주목하지 않던 현 젊은 여성의 욕망을 현실의 디테일한 삶의 조명으로 풀기 시작했다. 다소 가볍지만 소설의 스타일을 살리는 문체도 매력적이었다. 현대 도시의 젊음 여성의 이중적 삶과 욕구의 진솔한 표출은 남자인 내게서도 나름의 공감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공감은 소설의 중반부 이후 급격히 무너졌다.


 우선 너무 과잉된 과거 회상의 문제를 거론하고 싶다. 작품 속 화자의 상처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이 정도면 지나치다. 그리고 더욱 실망을 할 수 밖에 없게 하는 건 여기에서 엮이게 되는 지나친 우연의 빈도이다. 이 작품은 “오만과 편견”과 유사한 우연과 오해를 다루었지만 그 설득력은 닮지 못했다. 이런 설득의 실패는 작위적인 우연의 배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후반부에 가면 갈수록 실망감은 증폭된다. 그냥 로맨스 소설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드러내는 치유의 과정과 그 의지는 인정하나 그 역시도 작위적인 우연의 배치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 작품에서 기대했던 것은 현실에 대한 대리만족이 아니었다. 진짜 젊은 여성의 욕구와 현실이었다. 재기발랄하게 시작되던 소설은 다분히 상투적인 드라마 엔딩으로 끝나 버렸다. 그녀의 구원자는 자신이 아니라 다수의 여성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남자였다. 그리고 그 남자를 차지한 여자는 다분히 평범한 여자였다. 그렇다. 독자에게 선사하는 대리만족의 결말이다. 


 현실을 조명하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념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긴 하겠지만 현실과는 다분히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스타일”은 현실을 디테일하게 펼치며 공감을 얻어냈다. 하지만 저자는 그 현실을 오히려 던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 우연의 연발이라는 작가의 노골적인 의도와 소녀적 이상향을 배치한다. 그 순간 이 작품은 솔직함과도 치열함과도 작별하고 만 것이다. 사람다움이란 외로움의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 완전한 해결을 이루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 거리를 줄이고자 노력하는 눈물 나는 발버둥이다. 저자는 애석하게도 왕자님에 기대고 말았다.


추천강도: 별 세 개

 

08.06.27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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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집으로 가는 길/ 아스마엘 베아

‘전쟁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나에게 너무 낯선 전쟁을 알려주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동일시된다. 그만큼 인류는 전쟁과 각별한 관계를 맺어왔고 전쟁을 통해서 스스로를 확장시켜갔다.

 우리는 전쟁에 대해 잘 안다. 어떤 전쟁으로 어떠한 세력이 확장되었고 또 어떤 전쟁으로 어떠한 세력이 약화되었는지. 하지만 우리는 전쟁을 모른다. 그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이 누군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희생됐는지. 항상 그렇다. 전쟁을 일으키는 소수의 지도자와 그것을 뒷감당하려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백성들, 국민들, 그리고 너와 나. 인류의 보편적 도덕의 상징인 살인을 하지 말라는 덕목은 전쟁 시엔 가장 외면해야하는 덕목이 된다. 전쟁 시에는 더 많이 죽여야 영웅이 된다. 이기면 그만일까? 그렇지 않다. 이미 죽어버린 그들에게 아무리 그럴 듯한 칭호를 붙여줘도 죽음 앞엔 허망하다. 그리고 그 칭호조차 덜 죽은 그들만의 칭호에 불과하지 않던가? 패자는 구덕이의 먹이로 전락한다.

 별 볼일 없는 정당성과 명분을 억지로 만들어 놓고 죽기 싫으면 죽여라고 강요하는 전쟁.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것이 전쟁인 것 같지만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 또한 전쟁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다수 국민의 동의에 의해 일어나기 보다는 극소수의 지도자가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못해 총을 쥐고 적진을 향해 죽이러 혹은 죽으로 간다.

 우리는 이야기 한다. 우리를 겁탈한 침략자들의 잔인함을. 그들의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혐오를. 하지만 우리는 잊고 있다. 우리 역시 그렇게 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오히려 그 모든 병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악한 인간이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만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아프리카의 한 국가인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다룬 자전적 회고록이다. 어떻게 전쟁이 불쑥 자신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래퍼를 꿈꾸던 순박한 소년이 어떻게 살인병기로 변해버렸는지, 왜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지를 용기를 내어 회상하고 있다. 그의 용기가 너무 고맙고 대견스럽다.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휴전 상태이다. 나 역시 군대를 다녀왔고 나의 주적이 누군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북한의 주민이 굶어 죽어가는 것에 대해 별 감흥이 없다. 오히려 마음 한 구석에선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주적이며 그들이 죽어가고 망해갈 수록 그만큼 우리를 향한 위협은 사라지게 된다. 이런 내게 욕을 할 수 있나? 난 단지 전쟁을 하기 싫을 뿐이다.

 작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났다. 좌파 빨갱이 대통령이라고 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그 별칭에 걸 맞는 제안을 한다. GOP의 병사를 서로 철군시키자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개념 없는 제안인가? GOP가 어디인가? 전쟁이 발발할 시 가장 빨리 그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고지가 아닌가? 더 어이없는 것이 김정일 위원장의 대답이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자. 충격적이지 않나? 우리는 당연히 북한이 우리를 먼저 쳐들어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북한은  우리가 먼저 쳐들어 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GOP 철군을 제안할 때 거부했던 것이다.

 과연 우리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나?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이 정말 우리에겐 축복인가? 여전히?

 전쟁은 무조건 반대해야 한다. 그 전쟁이 국익에 도움이 되고 결국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반대해야 한다. 만약 당신은 국익을 위해 당신 한 목숨 쉽게 버릴 수 있나? 그러지 못할 거면서 왜 남에게는 강요하고 당신은 외면하는가? 그리고 전쟁이 과연 뭔지를 알기나 하는가?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들은 대부분 못사는 서민들이다. 돈이 급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미군들은 이라크 전을 치루면서 수 없이 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우리는 그런 미군 병사를 욕한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악한 사람이었을까? 이스마엘 베아가 처음부터 살인병기였을까? 

 전쟁의 현상에 초점을 모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전쟁 자체에 초점을 모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항상 현상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배우지 못한 것도 얼마든지 다시금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 사슬을 차고 있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그것에 동의하고 있었음은 잊고 있다. 그리고 남 탓하기 바쁘다. 

 칼을 들고 누군가를 찌르고 총을 들고 누군가를 쏘는 것만이 살인인가?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데 외면하는 것도 살인이다. 누군가가 외로워 죽고 싶어 하고 있을 때 바쁘다며 그의 손을 뿌리치는 것도 살인이다. 지금 당장 죽지 않고 또다시 생명이 연장된다 해도 나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 그에게 살아있으면서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할 수 있나? 삶과 죽음 그 사이는 단 하나의 경계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이스마엘 베아의 살인행위가 그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살인행위도 우리의 잘못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스마엘 베아가 겪은 세계와 우리가 겪는 세계는 너무 틀리지 않나? 이스마엘 베아의 정당성을 우리에게 부여하기에 우리는 너무 부끄럽지 않나? 

 이 책이 많이 읽히고 있다는 소식이 너무 반갑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책을 읽은 당신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 기회를 통해 어떠한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도 있고 또는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 전쟁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국사 교과서나 세계사 교과서에 적혀있는 문자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해 있는 그런 전쟁을.

추천강도 ★★★★(4.0점)

08.01.25 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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