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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평점 :
[독서감상] 정이현,『낭만적 사랑과 사회』와 박민규의『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자본의 유혹과 사랑의 유혹 그리고 의지
정이현의「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었다. 언젠가 이 책을 읽고 내게 한마디 한 선배가 생각이 난다. 그 때 형은 “여기 나오는 여자, 완전 빡치게 하지 않냐?”라고 했고, ‘고급창녀’ 운운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조금 충격은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이 소설을 읽게 됐다. 이번엔 장마 탓인지, 조금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화자는 ‘어장 관리’를 하면서 최상위 계급의 남자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성(性)적 자원을 활용한다. 상당한 수준의 어장을 관리하는 것으로 볼 때, 예쁘고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쪽에 속하는 듯 보인다. 적당히 괜찮은 남자들을 주무르던 그녀는 마침내 “내 인생 스물두 해를 걸고 배팅해볼 만한 남자”1)를 발견한다. 그는 그녀가 꿈꾸던 최상위 계급의 남자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타월 위에는 한 점의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봐도 순백의 시트 위는 깨끗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전거를 타지도 않았고, 심한 운동을 한 적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시트 위에 천천히 커버를 덮는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먹먹하다. “너 되게 뻑뻑하더라.”2)
이 남자를 위해서 그동안 어장관리를 할 때도 급한 정액을 입으로만 받던 그녀 아니던가.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지킨 순결을 허락한 남자에게 그저 “너 되게 뻑뻑하더라.”라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호텔에서 나온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대신 명품 백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백의 진품여부에 대한 의심과 그의 낯선 얼굴을 보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3)”
그녀가 갖게 된 이러한 사랑관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우선 자신의 가정사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내 인생, 엄마처럼 사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스스로 중산층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허울만 좋은 중소기업 임원의 아내로, 이십몇 년 결혼 생활 동안 백화점 세일 때 허접한 옷 골라 사고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다닐 수 있게 된 걸 생활의 여유라고 생각하는, 쉰 살 다 된 여자의 인생을 떠올리면 정신이 바짝들곤 했다.4)”라고 말한다. 그 뿐일까?
친구에 대한 나의 뜨거운 연민은, 그러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깨끗이 사라졌다. 혜미가 아무렇게나 어깨에 둘러멘 오리지널 샤넬 백에서 원격 무선 조종기를 꺼내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카페 앞에 세워진 병아리 색 뉴비틀의 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혜미의 아버지는 서울 시내 요지에 다섯 채쯤의 빌딩과 열 채쯤의 다세대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었다.(···) 나는, 나는 다르다.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5)
그녀의 사랑동력은 계급상승의 욕망이다. 그래서 “당연한 거 아니야? 얼마나 사랑하는데······”6) 따위의 말은 조소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 동안 만났던 남자들이 그녀가 갖고 있는 상상력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저 여자랑 한번 자볼까 하는 궁리밖에 하지 않는 주제에 급할 때마다 비밀 병기처럼 사랑을 들이댄다. 사랑하니까 키스해야 하고, 사랑하니까 만져야 하고, 사랑하니까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사랑! 피가 한곳으로 몰려 갑갑한 느낌을 해소하고 싶은 몸의 욕망이 도대체 사랑이랑 무슨 관계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7)
그녀가 남자를 통해서 계급상승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남자들도 그녀를 통해서 성적 욕구를 해소하려고 한다. 즉, 서로의 존재가 도구적인 것이다. 사랑이 과연 계급상승의 도구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정녕 성적 욕구의 대상물일까? 나는 이들의 사랑을 보면서 박민규의『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생각이 났다. 이 작품에서는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다니는 고린도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8)
박민규는 남들보다 더 가지고, 더 강해지고, 더 높은 곳에 자리잡는 것이 현명한 윤리관으로 정착되어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사랑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 것도 없는 서로를... 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이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9)
박민규가 규정하는 사랑은 기적이다. 따라서 그가 만약 정이현의 사랑을 규정한다면 “당대의 현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이현의 사랑은 당대의 현실을 위해 자신의 성(性)을 계급상승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박민규는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지만, 사랑은 “미리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지는 것(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이라고 하기에 정이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정이현의 사랑을 비방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후기 자본주의의 자식들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말한 것처럼, 진리들은 항상 극소수의 주체만이 획득할 수 있다. 당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것은 이미 자신의 신체와 마음에 각인된 당대의 논리를 찢는 일 없이는 가능하지가 않다. 게다가 과연 우리가 정이현의 사랑이 틀렸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나?
얼마 전 동기모임을 가졌다. 수다는 자연스럽게 사랑과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 조건 같은 거는 중요하지 않아. 사랑한다면 조건은 극복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소박하게 살더라도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고, 그러면 되는 거잖아.” 물론 그 친구는 조소를 받았다. “우리애기 철 좀 들어야겠네.” “네가 여자니깐 한가한 소리하는 거다.” “현실을 모르는구먼.”등등. 나는 사실 그 여자애의 말에 공감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섣불리 얘기하지는 못했다. 그것을 확신하기는 또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로서는
‘사랑이 정말 마냥 <손해>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경제적으로 보면 손해일 수 있을 것이다. 돈이 들고, 시간이 뺐기고 등등. 하지만 “그해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 큰 이익이었다. 천문학적 이익이란 아마도 이런 걸 뜻하는게 아닐까, 무렵의 나는 생각했다.”10)라는 문장에 공감이 간다. 그리고,
열심히 산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삶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무료, 해도...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고 나는 믿었다. 무료하므로 돈을 모으는 것이다... 무료해서 쇼핑을 하고, 하고, 또 하는 것이다... 큰소리치는 인간도... 결국 독재를 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도... 실은 그래서 사랑에 실패한 인간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11)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12)라고 말한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떠난 것”13)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14)이다. 내가「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느낀 슬픔은 바로 그 소설 속 화자가 ‘아픔’을 가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왜 사람보다/사랑보다, 돈을/계급을 우선시 하게 된 것일까. 왜 진정한 사랑에는 관심이 없을까. 물론 이런 나의 생각 자체가 건방진 것 일게다. 어떻게 한 사람의 행복을 타인이 손쉽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사람이 사람을 믿고, 또 전적으로-전면적으로 겹쳐지게 되는 사랑이라는 소중한 경험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그러한 사랑에 성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생각보다 허망한 것이고 금방 없어지는 그런 것이라면, 사랑보단 돈을 선택해서 안락한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그럴 것이라고 결정짓고 사랑을 하지 않는 길을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자신보다 타인을 더 아끼고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놀라운 경험도 해보고. 나는 사랑이 당대의 절대욕망인 자본과도 능히 겨뤄 볼만한 인간다움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1) 정이현,『낭만적 사랑과 사회』, 문학과지성사, 2003. 27쪽.
2) 정이현, 위의 책, 33쪽.
3) 정이현, 위의 책, 35쪽.
4) 정이현, 위의 책, 20~21쪽.
5) 정이현, 위의 책, 24~25쪽.
6) 정이현, 위의 책, 24쪽.
7) 정이현, 위의 책, 15~16쪽.
8)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예담, 2009. 228쪽.
9) 박민규, 위의 책, 224쪽.
10) 박민규, 위의 책, 157쪽.
11) 박민규, 위의 책, 299쪽.
12) 알랭 바디우,『사랑예찬』, 길, 2010. 71쪽.
13) 알랭 바디우, 위의 책, 71쪽.
14) 알랭 바디우, 위의 책, 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