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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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김어준,『닥치고 정치』
- ‘다함께, 정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폼 잡는 이론이나 용어 빌리지 않고, 일상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해보자고. 평소 정치에 관심 없는 게 쿨한 건 줄 아는 사람들에게, 그 놈이 그놈이라는 사람들에게, 좌우 개념 안 잡히는 사람들에게, 생활 스트레스의 근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당들 행태가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에게, 이번 대선이 아주 막막한 사람들에게, 그래서 정치를 멀리하는 모두에게 이번만은 닥치고 정치,를 외치고 싶거든. 시국이 아주 엄중하거든, 아주. 28~29

#1
 한량했다고 말하기엔 뭔가 애매하지만, 그래도 꽤나 낭만을 품고 살던 국문학도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들었습니다. 믿기지가 않았고, 무슨 일인가 싶었고, 세상에 이런 일이였고, 무엇보다 은근히 고소해하던 고모와 고모부의 반응에 경악했습니다. 도무지가 도무지였습니다. 게다가-

학교는 별일 있었나요?라며 능청스런 수업을 진행했고- 그곳에서 저의 ‘충격’은 방황했습니다.

#2
 온갖 거짓말을 일삼던 이명박 후보를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뽑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하던 개신교의 간판 목사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의를 제기한 저는 빨갱이 채찍을 얻어맞았고, 경악으로 부서진 마음들이 개신교의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3
 위의 두 사건을 계기로 저는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정치’는 여전히 가냘픈 분노 위에 섰던 물음표였습니다. 해명의 길로 발을 내디딘 무페나 랑시에르 혹은 발리바르의 저서 주위를 기웃거렸음에도 그랬습니다. 저의 독서는 점점 중력을 잃어갔고 지구 밖으로 나가기를 반복했습니다. (책을 읽기보다는 주로 졸아서 그런 것 일수도 있습니다.(웃음))

#4
 그러다, 저의 독서가 대의제의 무기력한 분노 위에 꽃핀 꽃밭임을 깨달았습니다. 꽃밭은 치열하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선 저의 부서진 마음 조각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조각은 여전히 그곳의 바닥에서 위태롭게 뒹굴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저분하다는 그곳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5
 천박한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온갖 추론과 음모론이 난무했습니다. 뜬금없는 욕설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리고,
의외의 온기를 느꼈습니다.

#6
 조각을 집어 들고, 군중 속에 섰습니다. 이곳은 여전히 한계의 범벅 속에 있었지만- 지면에 무겁게 서 있는 발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7
 그곳과 이곳의 경계는 사실, 있거나-없거나 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사이가 더 없이 넓고 깊을 수는 있겠지만요. 저는 통합파가 됐지만, 진보신당 독자파 역시 응원합니다. 우경화를 날카롭게 비판해주십시오. 절망을 부르던 과거의 오판들이 여전히 줄을 닿고 있으니까요.
 이르는 길의 차이들이 있지만, 어제보다 조금은 더 따뜻한 그곳을 향해, ‘다함께, 정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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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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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김언수,『캐비닛』
- 캐비닛에서 성경을 꺼내며(개독시대의 심토머)
 


 김언수는 ‘캐비닛’에서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애매한’ 사람들(심토머)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그 ‘애매함’은 “대표성의 잣대”에 의해 끊임없이 가격(加擊)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연히’라는 단어의 폭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런 흉측한 모습을 가진 괴물이니까, 당연히 폐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따위로 생각을 하는데, 그걸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나요?” “제발, 제 눈에 보이지 않게 좀 치워주세요.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나)는 그런 취급을 받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애매한’ 사람들(심토머)을 여전히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정체불명의 병에 걸려서 조금 아픈 것이라고 말하죠. 또한 인간은 “완벽한 존재”는 아니지만 “반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권박사는 그러한 화자의 말에 실소를 하지요.    


 “반성하는 존재라. 웃기는 소리군. 내가 스무 살 때 전쟁이 있었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개울가에서 깔깔거리며 같이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두 패로 나누어졌지. 끝없는 살육과 복수가 있었어. 어느 날 나는 한패가 다른 한패 모두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걸 봤어. 일렬로 줄을 세워놓고서. 한 사람이 한 명씩 찔렀지. 그리고 그들은 초등학교 뒤편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들을 거기에 밀어넣었어. 아이들이 뛰어노는 초등학교 뒤편에 말이야. 자네는 그것이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나?”
 “······"
 “지난 오십 년간 인간에게 그 시대를 반성하는 역사가 있었나? 우리는 여전히 싸우고 있지. 자신의 아파트 평수나 지키기 위한 하찮은 이유들로. 나는 인간이라는 종을 증오해. 치욕스러워. 인간은 그것보다 더한 짓도 할 만한 생물이지.” p.254

 그렇기에 박사는 심토머들을 “인간과는 다른 새로운 종”이라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박사는 희망을 가지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 대한 냉소(인간종의 폐기), 그리고 새로운 종의 도래(심토머)를 통한 박사의 희망은 사실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나는 더 아름다운 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더 이타적이고, 더 따뜻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항상 이웃의 삶과 같이 생각하는 박애적인 종이 이 지구 위에 번성했으면 좋겠어.” p.255

 그러니까 권박사는 인간이 ‘박애적인 종’이 아니고, 또 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에 차라리 새로운 종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저 권박사의 희망은 너무 익숙한 말 아닌가요? 저는 여기서 제 캐비닛에 있는 성경을 꺼내보고 싶습니다. “헐~ 성경이라니! 이 개독의 시대에?”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역시 예수쟁이가 어디 가겠나?”하는 소리도 들리는 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예수쟁이입니다. “아, 저기, 침 뱉고 돌아서지 마시고 잠깐만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개독시대라는 것을요. 오죽했으면 예수님조차도 “아오, 씨발 저 새끼들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저는 예수님과는 달리 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조용히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여하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셨고요. 여기서 ‘사랑’이 추상적이라고 생각된다면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죠. 예수님이 명령하신 사랑의 실천은 “누가 너의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어 주”는 것이고, “강도가 속옷을 훔쳐 가면 겉옷도 내어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지요. 따라서 저는 권박사의 문장을, 


“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진짜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더 이타적이고, 더 따뜻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항상 이웃의 삶과 같이 생각하는 예수님처럼 살고자 노력하는 기독교인이 이 지구 위에 번성했으면 좋겠어.” 


로 바꿔보고 싶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죠. 예를 들어 저희 집에 도둑이 들어서 모아둔 돈을 다 훔쳐갔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라? 보석은 안 가져갔습니다. 그러면 “저기 도둑님아~ 여기 보석은 안 챙겨갔네요. 챙겨가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혹은 “야, 내가 여친 명품백을 사줘야 하는데 천 만원만 내놔라. 성경보니깐 니가 믿는다는 그 예수라는 자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고 하고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던데? 따라야지”라고 하면 ‘아오~, 씨발’이 절로 나오겠지요.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적어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만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온전히 실천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랑의 명령을 기억하면서 ‘이웃의 삶’을 생각하자는 것이지요. 바로 권박사가 말하는 ‘박애적인 종’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자는 말입니다.
 

 

 얼마 전 무상급식 관련한 시민 투표가 있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간판이 되는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신을 팔아 투표를 강요했지요. 그리고 ‘복지’ 이야기만 나오면 기겁을 하며 ‘나라 망하는 짓’이라고 설교하십니다. 그러고는 올해의 교회 표어로 “초대교회와 같이”라고 버젓이 달아 놓습니다. 초대교회의 풍경이 어땠나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의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는 이 부자에게 “너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돈을 포기하지 못해서 제자가 되지 못했지요. 이에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고 탄식하셨고요.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은 반공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빨갱이로 의심받고, 네 이웃에게 너의 재산을 나눠 주어라고 하기 때문에 빨갱이로 확정 됩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도 심토머였고, 지금 한국에서도 심토머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불편한 주님의 명령을 지우기 위해 맹목적으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사탄마귀 빨갱이는 패배하였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3)

“복을 달라고, 주님의 일을 위해 헌금을 많이 하게 해 달라고, 부자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교회건축 부채가 30억이 남았습니다. 믿는자가 복을 받고 부채를 갚을 것입니다. 믿습니까?" "아멘!" 주여 삼창하고 부르짖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7:21)

 

 

 아,

제가 왜 김언수의 ‘캐비닛’에서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애매한’ 사람들(심토머)의 이야기를 듣고는, ‘성경’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가시나요? 아, 이해가 안 가신다고요. 예수쟁이는 답이 없다고요. 아-네, 저도 무리수였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뭐, 이왕에 이렇게 써버렸는데 어쩌겠어요. 그냥 캐비닛에나 넣어 둘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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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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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정이현,『낭만적 사랑과 사회』와 박민규의『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자본의 유혹과 사랑의 유혹 그리고 의지


 정이현의「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었다. 언젠가 이 책을 읽고 내게 한마디 한 선배가 생각이 난다. 그 때 형은 “여기 나오는 여자, 완전 빡치게 하지 않냐?”라고 했고, ‘고급창녀’ 운운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조금 충격은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이 소설을 읽게 됐다. 이번엔 장마 탓인지, 조금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화자는 ‘어장 관리’를 하면서 최상위 계급의 남자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성(性)적 자원을 활용한다. 상당한 수준의 어장을 관리하는 것으로 볼 때, 예쁘고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쪽에 속하는 듯 보인다. 적당히 괜찮은 남자들을 주무르던 그녀는 마침내 “내 인생 스물두 해를 걸고 배팅해볼 만한 남자”1)를 발견한다. 그는 그녀가 꿈꾸던 최상위 계급의 남자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타월 위에는 한 점의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봐도 순백의 시트 위는 깨끗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전거를 타지도 않았고, 심한 운동을 한 적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시트 위에 천천히 커버를 덮는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먹먹하다. “너 되게 뻑뻑하더라.”2)

 이 남자를 위해서 그동안 어장관리를 할 때도 급한 정액을 입으로만 받던 그녀 아니던가.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지킨 순결을 허락한 남자에게 그저 “너 되게 뻑뻑하더라.”라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호텔에서 나온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대신 명품 백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백의 진품여부에 대한 의심과 그의 낯선 얼굴을 보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3)

 그녀가 갖게 된 이러한 사랑관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우선 자신의 가정사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내 인생, 엄마처럼 사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스스로 중산층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허울만 좋은 중소기업 임원의 아내로, 이십몇 년 결혼 생활 동안 백화점 세일 때 허접한 옷 골라 사고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다닐 수 있게 된 걸 생활의 여유라고 생각하는, 쉰 살 다 된 여자의 인생을 떠올리면 정신이 바짝들곤 했다.4)”라고 말한다. 그 뿐일까?

 친구에 대한 나의 뜨거운 연민은, 그러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깨끗이 사라졌다. 혜미가 아무렇게나 어깨에 둘러멘 오리지널 샤넬 백에서 원격 무선 조종기를 꺼내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카페 앞에 세워진 병아리 색 뉴비틀의 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혜미의 아버지는 서울 시내 요지에 다섯 채쯤의 빌딩과 열 채쯤의 다세대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었다.(···) 나는, 나는 다르다.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5)

 그녀의 사랑동력은 계급상승의 욕망이다. 그래서 “당연한 거 아니야? 얼마나 사랑하는데······”6) 따위의 말은 조소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 동안 만났던 남자들이 그녀가 갖고 있는 상상력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저 여자랑 한번 자볼까 하는 궁리밖에 하지 않는 주제에 급할 때마다 비밀 병기처럼 사랑을 들이댄다. 사랑하니까 키스해야 하고, 사랑하니까 만져야 하고, 사랑하니까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사랑! 피가 한곳으로 몰려 갑갑한 느낌을 해소하고 싶은 몸의 욕망이 도대체 사랑이랑 무슨 관계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7)

 그녀가 남자를 통해서 계급상승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남자들도 그녀를 통해서 성적 욕구를 해소하려고 한다. 즉, 서로의 존재가 도구적인 것이다. 사랑이 과연 계급상승의 도구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정녕 성적 욕구의 대상물일까? 나는 이들의 사랑을 보면서 박민규의『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생각이 났다. 이 작품에서는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다니는 고린도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8)

 박민규는 남들보다 더 가지고, 더 강해지고, 더 높은 곳에 자리잡는 것이 현명한 윤리관으로 정착되어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사랑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 것도 없는 서로를... 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이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9)

 박민규가 규정하는 사랑은 기적이다. 따라서 그가 만약 정이현의 사랑을 규정한다면 “당대의 현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이현의 사랑은 당대의 현실을 위해 자신의 성(性)을 계급상승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박민규는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지만, 사랑은 “미리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지는 것(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이라고 하기에 정이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정이현의 사랑을 비방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후기 자본주의의 자식들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말한 것처럼, 진리들은 항상 극소수의 주체만이 획득할 수 있다. 당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것은 이미 자신의 신체와 마음에 각인된 당대의 논리를 찢는 일 없이는 가능하지가 않다. 게다가 과연 우리가 정이현의 사랑이 틀렸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나?

 얼마 전 동기모임을 가졌다. 수다는 자연스럽게 사랑과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 조건 같은 거는 중요하지 않아. 사랑한다면 조건은 극복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소박하게 살더라도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고, 그러면 되는 거잖아.” 물론 그 친구는 조소를 받았다. “우리애기 철 좀 들어야겠네.” “네가 여자니깐 한가한 소리하는 거다.” “현실을 모르는구먼.”등등. 나는 사실 그 여자애의 말에 공감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섣불리 얘기하지는 못했다. 그것을 확신하기는 또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로서는

 ‘사랑이 정말 마냥 <손해>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경제적으로 보면 손해일 수 있을 것이다. 돈이 들고, 시간이 뺐기고 등등. 하지만 “그해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 큰 이익이었다. 천문학적 이익이란 아마도 이런 걸 뜻하는게 아닐까, 무렵의 나는 생각했다.”10)라는 문장에 공감이 간다. 그리고, 


열심히 산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삶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무료, 해도...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고 나는 믿었다. 무료하므로 돈을 모으는 것이다... 무료해서 쇼핑을 하고, 하고, 또 하는 것이다... 큰소리치는 인간도... 결국 독재를 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도... 실은 그래서 사랑에 실패한 인간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11)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12)라고 말한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떠난 것”13)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14)이다. 내가「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느낀 슬픔은 바로 그 소설 속 화자가 ‘아픔’을 가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왜 사람보다/사랑보다, 돈을/계급을 우선시 하게 된 것일까. 왜 진정한 사랑에는 관심이 없을까. 물론 이런 나의 생각 자체가 건방진 것 일게다. 어떻게 한 사람의 행복을 타인이 손쉽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사람이 사람을 믿고, 또 전적으로-전면적으로 겹쳐지게 되는 사랑이라는 소중한 경험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그러한 사랑에 성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생각보다 허망한 것이고 금방 없어지는 그런 것이라면, 사랑보단 돈을 선택해서 안락한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그럴 것이라고 결정짓고 사랑을 하지 않는 길을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자신보다 타인을 더 아끼고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놀라운 경험도 해보고. 나는 사랑이 당대의 절대욕망인 자본과도 능히 겨뤄 볼만한 인간다움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1) 정이현,『낭만적 사랑과 사회』, 문학과지성사, 2003. 27쪽.
2) 정이현, 위의 책, 33쪽.
3) 정이현, 위의 책, 35쪽.
4) 정이현, 위의 책, 20~21쪽.
5) 정이현, 위의 책, 24~25쪽.
6) 정이현, 위의 책, 24쪽.
7) 정이현, 위의 책, 15~16쪽.
8)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예담, 2009. 228쪽.
9) 박민규, 위의 책, 224쪽.
10) 박민규, 위의 책, 157쪽.
11) 박민규, 위의 책, 299쪽.
12) 알랭 바디우,『사랑예찬』, 길, 2010. 71쪽.
13) 알랭 바디우, 위의 책, 71쪽.
14) 알랭 바디우, 위의 책,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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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2012-01-03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보.

두괴즐 2012-01-17 17:43   좋아요 0 | URL
^.^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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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한윤형 외,『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다른 세상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남들이 바꿔주기만을 바라지 말고, 스스로 바꾸기를 노력한다면’ 



 저는 소문난 서태지빠입니다. 아니, 사실 그보다는 서태지빠라고 소문내고 다닌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네요. 아무튼, 그만큼 서태지는 제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만해도 저는 딱히 꿈이 없었습니다. 그저 부모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억지로 공부를 할 따름이었지요.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서태지가 2000년 컴백을 했습니다. 그 때 저는 고1이었는데요. 그 때를 계기로 저는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서태지를 보면서 확신한 것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가장 잘할 수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대체로는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 뒤로 놓치고 있던 것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사회를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버티는 것이라는 점이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서태지는 너무나 운이 좋았던 한 경우에 불과한 것이었고, 꿈을 향해 달려가다가 부서진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무대 바닥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서태지의 음악을 통해 사회비판적 감수성을 갖게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실의 타계를 위해 자기계발서도 많이 읽었습니다. 미래를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유예하라는『마시멜로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했었지요. 그런데『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의 저자는 ‘마시멜로’가 기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폭로 합니다.

 당신은 지금 마시멜로를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달콤한 위로,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면 언젠가는 얻을 수 있다는 조언, 그것들의 진짜 의미는 사실 ‘그러니까 혼자 알아서 하세요’라는 냉정한 외면이다.(184-185)

 

 제가 자기계발서를 읽고 노력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부딪히는 한계에 직면했던 이유가 사실 여기에 있었습니다. 잠을 줄이고, 아침형 인간이 되고, 모든 시간을 생산적이게 사용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했지만, 닿을 듯 닿을 듯 하다가도 끊임없이 밀려나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룰 자체가 의자 빼앗기구나’ 하고. 서태지가 <교실이데아>에서 불렀던 그 지점,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 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그 지점의 중심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계발의 환각으로부터 벗어나니 잔인한 구조의 폭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노동조합의 ‘이기주의’, 그리고 노동 계급의 죽음. 그러나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윽박질러지고 강요된 것이었다. 사실 1990년대 말 한국의 기업들이 정리 해고를 요구했을 때 대부분의 노동조합들은 임금 삭감을 통한 일자리 유지를 제안했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의 노동자들보다 이기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대박 아니면 쪽박’의 위험천만한 내기에 뛰어드는 이유는 위험을 회피할 방법이 없어서이다.(···)     1990년대 말부터 벌어진 파업들에 대해 법원이 한 일이 바로, 노동자들에게 ‘위험 회피’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었다. 법원에서는 “정리해고나 사업 조직의 통폐합, 공기업의 민영화 등 기업의 구조 조정의 실시 여부”에 반대하는 파업은 원칙적으로 경영권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노조가 자발적 임금 삭감 등의 양보 교섭을 통해 얻어낸 고용 안전 협약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무력화되었다. (208-209)

 

 우리는 파편화되어 자기계발과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이러한 극단적 룰이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IMF 이후에 닥친 경제 위기 잎에 우리의 선배들은 그래도 연대를 통해 고통을 분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법은 국민을 밀쳐냈고 자본에 손을 들어 줬습니다. 이후 우리는 극단의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속에 조인(join)하게 되었습니다. 게임의 룰에 우리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못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러한 구조를 외면한 채 열심히 게임에 참여함으로써 가진 자들이 더 가질 수 있는 세상을 정당화 해주고 있었습니다. 이 게임의 이름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하비가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듯이,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식 자본축적의 위기를 돌파하고 성장을 이루었다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로지 부자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만 성공한 체제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화 이후에 서계경제의 성장률은 오히려 하락하였고, 다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 사이의 차이만 엄청나게 벌어졌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못 가진 쪽에서 가진 쪽으로 소득을 이전하는 프로그램이다.1)

 

 엄기호는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가르침이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이며, 우리가 옆의 동료들과 함께 더불어가기보단 자기계발과 스펙쌓기에 몰두하는 이유가 신자유주의의 철학을 내면화했기 때문임을 지적합니다. 그것이 가진 자에게 더 많은 부를 주기 위한 시스템인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펙쌓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룰은 도대체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저는 자기계발을 그만두고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이 룰을 거부하고 함께 사회적 행동을 한다면 세상은 빠르게 바뀔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혼자 세상을 바꿔보려고 뛰어든다면 오히려 상처받고 쓰러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그저 이렇게만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계발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관심을 놓치지 말자고. 그리고 때로는 함께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행동도 해보자고.”

 우리는 지금의 현실이 처참하지만 그럼에도 대안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그 대안없음을 이야기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많은 학자들이 이미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고, 실제로 신자유주의 즉,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룰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가는 것을 철학으로 삼는 국가가 더 나은 지표를 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증자료도 많이 있습니다. 세계 경제 위기 이후 가장 탄탄하게 버텨낸 국가가 바로 가장 복지가 잘 구축된-즉, 경쟁이 아닌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철학을 포기하지 않은 북유럽 국가라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경제학자 장하준은 “복지가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복지가 덜 되었던 것이 문제였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꿈이, 열정이 어떻게 자발적 착취의 동력이 되고 있는지를『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가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라는 이유로 쉽게 착취당하고 쉽게 버려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꿈조차도 자발적 착취의 동력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리고 다른 세상을 꿈꾸고 그것에 이르기 위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를 냉소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그래도 가장 쉽게 그리고 가시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도구가 또 정치입니다. 제가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인기 없는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그들이 저와 같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치를 냉소하면 할수록,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찔러야 하는 당위는 강화될 뿐입니다. 꿈이 조롱받지 않는 세상,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 성실하게 노동한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 그런 세상은 가만히 있는다고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이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태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기만 바라고만 있을까?”(<교실이데아> 중)

 

 승자와 패자가 서로를 인정하고, 또 다른 게임의 장에서 다시 맞붙어 볼 수 있는 세상, 승자와 패자가 여전히 친구일 수 있는 세상,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그에 합당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세상, 꿈이 조롱당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을 기대해 봅니다. 우리가 함께 노력한다면 정녕 ‘다른 세상’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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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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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박민규,『더블』
-『더블』에 대한 위화감과 박민규의 갱신 사이에서  



 박민규는 서태지와 함께 제게 창작에의 욕망을 지펴준 인물입니다. 사실상, 소설이라는 것이 ‘이렇게 재밌으면서도 의미심장한 것이 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해준 작가입니다. 제가 시험과 과제로부터 벗어나 자발적으로 소설을 읽을 수 있게 해준 작가이기도 하고요. 본 작은 그런 박민규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입니다.  


 박민규 빠돌이인 저는 당연히 본 작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고대하고 기대하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느끼게 된 위화감. 뭐랄까, 제가 박민규를 읽으면서 느꼈던 그 희열,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그 무엇이 이번에는 잠잠했습니다. 처음 박민규를 만나게 했던『카스테라』도 사실 ‘그다지’였는데『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하『삼미』)을 읽고 나서야 좋아하게 된 것처럼, 본 작도 나중에 다시 읽으면 다르게 될까 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 위화감에 대한 힌트를 얻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비평가 권희철이 쓴「아름다운 영혼이여, 안녕!」이 그것입니다. 그는 이 글에서 박민규의 갱신을 발견합니다. 갱신은 “실패에 대한 충실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권희철은 박민규의 이전 작들이 영지주의에 빠져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즉 “극단적인 선악이원론을 추구하며, 선과 악을 각각 영혼과 육체·물질에 배당한 뒤, 우리가 영지(靈智), 심오한 깨달음에 이르러서야 악으로 물든 육체·물질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선한 영혼의 세계로 진입하여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입니다. 쉽게 말해, “영지주의는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고 그 바깥 어딘가에 헛된 희망을 보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신 우위의 법칙과 육체·물질에 대한 혐오”가 뒤따르게 되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삼미』를 비판적인 고찰을 합니다. 간략히 말해『삼미』에서 말하는 “진짜 인생은 삼천포”라는 식은 “세속의 진부한 가르침들과 너무 닮”아 있고, “고매한 정신과 악마적 물질, 바깥으로의 구원의 약속이라는 영지주의적 이분법과 묘하게 닮아”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지젝의 논의를 패러디하면서 ““삼미의 야구”는 자본주의적 역동성에서 오는 과도한 스트레스에 대한 구제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완벽한 이데올로기적 보충물로 기능한다.(···) 현세의 비참함에 대한 상상적 보충물인, “인민의 아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권희철은 이러한 독해가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삼천포=진짜 인생’의 논리는 은연중에 비정규직의 삶을 받아들이게끔”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입장을 유지합니다. 저 역시 현실적으로 ‘삼천포 인생론’이 이러한 맥락으로 흐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베버가 말한 ‘이념형’으로서 ‘삼미의 윤리’를 읽었습니다. 즉, ‘삼미의 윤리’가 ‘반(反)자본주의 정신’의 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결국 문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의 도래를 예견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삼미의 윤리’가 ‘반(反)자본주의 정신’의 도래를 예견할 수 있는 지점에서 사유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요. 물론 이러한 도식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집니다. 베버의 것이 객관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 가능한 것인데 반해, 저의 것은 당위적이지요.  


 여하튼 권희철은 이러한 비판 이후『더블』에서 성취한 지점을 지적합니다. 그 핵심은 당연히 ‘영지주의의 유혹으로 부터의 극복’과 관련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고 싶은 유혹에 박민규의 소설이 더 이상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더블』의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박민규가 어떤 실패의 지점에 다다른 인물들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없게 묶어두고, 이 현실의 실패, 바로 그 자리에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묻도록 만들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가 왜 본 작을 읽고 위화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즉, 박민규가 유토피아를 제공해주지 않아 저로서는 답답한 심정이었던 것이지요. ‘빛’이 되는 ‘비전’을 보지 못했기에. 권희철은 박민규가 “사회 현실 속에 숨겨진 음모의 폭로와 탈출 매뉴얼 제시”로서의 ‘소설의 사회학’에서 ‘소설의 인간학’이라는 전향을 통해 미개척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평합니다. 그는 “영지주의-민주투사의 노선으로부터의 이러한 이탈의 결과가『더블』이다.”라고 규정합니다.  


 이러한 판단 앞에 저는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지젝이 움베르트 에코의『장미의 이름』의 ‘희극론’을 비판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즉, 해방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희극’이 실은 비극적 현실(후기자본주의)을 완전하게 해주는 보충물이라는 것이지요. ‘계몽된 허위의식’인 ‘냉소적 이성’을 비판한 슬로터다이크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냉소의 시대에 철학은 장바닥으로 내려와, 무례함과 뻔뻔함을 가지고 냉소를 냉소해야 한다(진중권)”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봅니다. ‘만약 내가 박민규를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그 작품이『더블』이었다면 그래도 혹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더블』은 저를 지나친 수많은 작품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며 바둥거리게 되지도 않았겠지요. 사실『카스테라』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박민규의 장편소설들을 읽고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을 하고 나서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 개개인의 취향과 지향이 차이가 있다는 전제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방법론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사회 현실 속에 숨겨진 음모의 폭로와 탈출 매뉴얼 제시”는 ‘계몽’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계몽’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계몽’이 근본적 변화를 오히려 억압하는 대리만족으로서의 보충물이라는 성격이 분명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저의 관계에 대한 매끈함을 의심하고 위화를 느낀 것이 바로 이러한 맥락을 통해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신체의 지혜’(견유주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깐 “실패에 대한 충실성”이 되겠지요.  


 빠르게 읽은 뒤 책의 무덤에 던져 놓았던『더블』을 다시 꺼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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