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감상] 김언수,『캐비닛』
- 캐비닛에서 성경을 꺼내며(개독시대의 심토머)
김언수는 ‘캐비닛’에서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애매한’ 사람들(심토머)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그 ‘애매함’은 “대표성의 잣대”에 의해 끊임없이 가격(加擊)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연히’라는 단어의 폭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런 흉측한 모습을 가진 괴물이니까, 당연히 폐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따위로 생각을 하는데, 그걸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나요?” “제발, 제 눈에 보이지 않게 좀 치워주세요.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나)는 그런 취급을 받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애매한’ 사람들(심토머)을 여전히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정체불명의 병에 걸려서 조금 아픈 것이라고 말하죠. 또한 인간은 “완벽한 존재”는 아니지만 “반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권박사는 그러한 화자의 말에 실소를 하지요.
“반성하는 존재라. 웃기는 소리군. 내가 스무 살 때 전쟁이 있었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개울가에서 깔깔거리며 같이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두 패로 나누어졌지. 끝없는 살육과 복수가 있었어. 어느 날 나는 한패가 다른 한패 모두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걸 봤어. 일렬로 줄을 세워놓고서. 한 사람이 한 명씩 찔렀지. 그리고 그들은 초등학교 뒤편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들을 거기에 밀어넣었어. 아이들이 뛰어노는 초등학교 뒤편에 말이야. 자네는 그것이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나?”
“······"
“지난 오십 년간 인간에게 그 시대를 반성하는 역사가 있었나? 우리는 여전히 싸우고 있지. 자신의 아파트 평수나 지키기 위한 하찮은 이유들로. 나는 인간이라는 종을 증오해. 치욕스러워. 인간은 그것보다 더한 짓도 할 만한 생물이지.” p.254
그렇기에 박사는 심토머들을 “인간과는 다른 새로운 종”이라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박사는 희망을 가지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 대한 냉소(인간종의 폐기), 그리고 새로운 종의 도래(심토머)를 통한 박사의 희망은 사실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나는 더 아름다운 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더 이타적이고, 더 따뜻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항상 이웃의 삶과 같이 생각하는 박애적인 종이 이 지구 위에 번성했으면 좋겠어.” p.255
그러니까 권박사는 인간이 ‘박애적인 종’이 아니고, 또 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에 차라리 새로운 종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저 권박사의 희망은 너무 익숙한 말 아닌가요? 저는 여기서 제 캐비닛에 있는 성경을 꺼내보고 싶습니다. “헐~ 성경이라니! 이 개독의 시대에?”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역시 예수쟁이가 어디 가겠나?”하는 소리도 들리는 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예수쟁이입니다. “아, 저기, 침 뱉고 돌아서지 마시고 잠깐만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개독시대라는 것을요. 오죽했으면 예수님조차도 “아오, 씨발 저 새끼들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저는 예수님과는 달리 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조용히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여하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셨고요. 여기서 ‘사랑’이 추상적이라고 생각된다면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죠. 예수님이 명령하신 사랑의 실천은 “누가 너의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어 주”는 것이고, “강도가 속옷을 훔쳐 가면 겉옷도 내어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지요. 따라서 저는 권박사의 문장을,
“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진짜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더 이타적이고, 더 따뜻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항상 이웃의 삶과 같이 생각하는 예수님처럼 살고자 노력하는 기독교인이 이 지구 위에 번성했으면 좋겠어.”
로 바꿔보고 싶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죠. 예를 들어 저희 집에 도둑이 들어서 모아둔 돈을 다 훔쳐갔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라? 보석은 안 가져갔습니다. 그러면 “저기 도둑님아~ 여기 보석은 안 챙겨갔네요. 챙겨가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혹은 “야, 내가 여친 명품백을 사줘야 하는데 천 만원만 내놔라. 성경보니깐 니가 믿는다는 그 예수라는 자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고 하고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던데? 따라야지”라고 하면 ‘아오~, 씨발’이 절로 나오겠지요.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적어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만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온전히 실천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랑의 명령을 기억하면서 ‘이웃의 삶’을 생각하자는 것이지요. 바로 권박사가 말하는 ‘박애적인 종’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자는 말입니다.
얼마 전 무상급식 관련한 시민 투표가 있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간판이 되는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신을 팔아 투표를 강요했지요. 그리고 ‘복지’ 이야기만 나오면 기겁을 하며 ‘나라 망하는 짓’이라고 설교하십니다. 그러고는 올해의 교회 표어로 “초대교회와 같이”라고 버젓이 달아 놓습니다. 초대교회의 풍경이 어땠나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의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는 이 부자에게 “너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돈을 포기하지 못해서 제자가 되지 못했지요. 이에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고 탄식하셨고요.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은 반공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빨갱이로 의심받고, 네 이웃에게 너의 재산을 나눠 주어라고 하기 때문에 빨갱이로 확정 됩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도 심토머였고, 지금 한국에서도 심토머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불편한 주님의 명령을 지우기 위해 맹목적으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사탄마귀 빨갱이는 패배하였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3)
“복을 달라고, 주님의 일을 위해 헌금을 많이 하게 해 달라고, 부자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교회건축 부채가 30억이 남았습니다. 믿는자가 복을 받고 부채를 갚을 것입니다. 믿습니까?" "아멘!" 주여 삼창하고 부르짖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7:21)
아,
제가 왜 김언수의 ‘캐비닛’에서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애매한’ 사람들(심토머)의 이야기를 듣고는, ‘성경’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가시나요? 아, 이해가 안 가신다고요. 예수쟁이는 답이 없다고요. 아-네, 저도 무리수였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뭐, 이왕에 이렇게 써버렸는데 어쩌겠어요. 그냥 캐비닛에나 넣어 둘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