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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중년을 오해했다 - 두 번째 50년을 시작하는 청춘들에게
박성주 지음 / 담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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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 나를 드러내고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거기에 그것을 책으로 완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아가 무엇을 하겠다. 하지 않겠다고
정리하고 되새기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을 요구한다.

한 권의 책을 쓴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다
두 권을 정리해낸 저자는
중년이 아닌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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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이야기 - 관세음보살본행경
정찬주 옮겨 엮음 / 해들누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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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관세음보살 이야기[관세음보살본행경] 

 예전부터 오래된 전래동화처럼 들었던 관세음보살에 대한 궁금증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아마 불교에 관심이 있고 믿는 이라면 관세음보살이라며 간절하게 불러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가끔 심한 폭풍우가 밀려드는 갑판 뱃머리에서, 혹은 천 길 낭떠러지 벼랑 앞에서 의식이 어떠한 판가름을 하기 전에 이미 무의식이 관세음보살을 애타게 찾고 있다.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이 나 투시는 모습을 상상해가면서 말이다. 나만 그러할까. 그러나 애끊는 심정, 무엇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심정, 그 심정이 되어본 사람은 쉽게 웃어넘기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펼쳐질 내용이 궁금했다. 편한 소설책처럼 읽어지는데, 가볍게 책을 넘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적당한 부담감이 함께 존재하였다. 삶에 대한 평가, 아니 지금 나의 삶의 대한 질문을 해대는 것 같아서 많은 생각이 한 페이지에 머물렀다가 다음 페이지로 넘겨졌다. 묘선 공주. 부처님처럼 왕족출신으로 태어났으나, 굳이 불제자의 길을 고집한다. 유독 어여삐 여긴 묘장왕(묘선공주 아버지)과의 심한 마찰, 삼보에 대한 묘장왕의 어긋난 행동과 결과론적인 병마, 그러나 결국 묘선공주의 두 눈과 두 손으로 다시 태어난 묘장왕, 그 묘장왕 역시 묘선공주의 인도를 받고 불도의 길을 가게 된다는 조금은 전래동화와 같은 권선징악의 면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불제자라면 전설이야기라며 한곳으로 물려두기보다는 책을 덮는 순간 자신의 거울을 보게 될 것 같다. 그 거울 앞에서 정녕 바른길을 고집하며 살고 있는지, 자비로움을 몸소 행하려 애쓰는지를 찬찬히 되묻는 관세음보살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메고 히말라야를 백번 천 번 돌아 살갗이 터지고
뼈가 부서진다 할지라도 부모의 은혜에는 미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백 자루의 칼로 자기 몸을 쑤시며
천 겁을 지낸다 할지라도 부모의 은혜는 미칠 수 없다.
또 부모를 위해 자기 몸을 불에 사르기를 억만 겁 할지라도 부모의 깊은 은혜는 미칠 수 없다.

 ‘부모은중경’이라는 경전을 조금 들은 적이 있다. 부모은혜에 대한 경전. 무엇으로 내 몸을 주신 부모의 은혜와 비교할 수 있을까. 불제자가 아니어도 부모은혜에 대해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그 마음만큼은 높고 낮음 없이 매 한 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밥숟가락 넘기는 일이 어렵다고, 내 마음 알아주지 않는다고 그 은혜 가벼이 여겨 쉬이 돌아서는 순간. 분명 내게도 있었다. 그랬기에 이 책에서 이 글을 읽는 순간 한없이 마음이 괴로웠다. 아니 힘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 한계에 도달했다는 생각에 대해 힘들었다. 이젠 조금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이 가벼워지기 위해서라도, 내 발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 위해서라도. 조금만 더 내 마음을 이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법정스님은 마음을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했는데, 매번 마음을 따르는 어리석음을 이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더 해보았다.

  보살은 평등한 마음으로 자기가 지닌 물건을 남김없이 모든 중생에게 널리 베푼다.
베풀고 나서 뉘우치거나 아까워하거나 대가를 바라거나 명예를 구하거나 자기 이익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이롭게 할 뿐이다.
몸소 성인들이 쌓은 행을 배우고 생각하고 좋아하며
몸소 실천하고 남에게 말하며, 중생에게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마음이옵나이다.

  삼보를 인정하지 않는 묘장왕에게 묘선공주가 한 이야기이다. 자비. 아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비”라는 단어가 아닌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었으리라 예상된다. 불교를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 자비라면 교회를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 아닐까. 불제자든 교인이든 그 시작은 바로 자비와, 사랑. 기본적인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형태를 달리하고 색깔을 달리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으로 향해있다. 따스함과 배려라는 이름을 빌리기도 하고, 나눔이라는 모습을 가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하고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는 삶이란 결코 몇 줄의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그 길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는 사람답게, 인간답게 살다가 떠나고 싶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음이 아닐까. 그 희망을 놓치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이 책을 덮으며 내게 차분하게 되물어온다.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고는 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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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만 더
미치 앨봄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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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만 더

 즐겨 찾는 인터넷 서점에서 “단 하루만 더”라는 책을 두 권 구입했다. 그러니까 그게 일주일쯤 되었나. 한 권을 구입한 뒷날 다시 같은 책을 신청을 하였더니, 추가 구입이라며 확인해보라는 친절한 질문을 해왔다. 물론 추가 구입이라며 “OK"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해서 한권은 나에게로, 또 한권은 남동생에게로 전해졌다. 3,4년 정도 부모님과 떨어져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다가 다시 시작된 부모님과의 생활에서 부딪칠지 모르는 것들에 대한 염려가 그 바탕에 있었다는 것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싶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만 더 깊이, 살뜰한 눈으로 바라봤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먼저였던 것 같다. 자식으로써 딸이 아닌 아들로서,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를 갖출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도 밝혀져 있지만, 이것은 유령이야기다. 그것도 여자 유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것도 가까스로 살아난 중년남자의 이야기다. (아니 운 좋게 살아났다고 해야 하나.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고 원했던 대로 유령의 길로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았다고 확신하는 한 남자가 자신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며 생을 포기하려는 순간, 8년 전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다. 단 하루 허락된 시간여행이야기이었다. (의식 속이었던지, 무의식 속이었던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하여간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세 여자를 만난다.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떠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떠나려는 사람을 안아주는, 아니 자살을 택하려 하는 아들을 안아주고 싶어 했던 한 어머니의 간절함을 다룬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간절함 속에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몰랐던,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자신은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며, 곁에 있는 누군가를 사랑해줄 의무가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렇게 쉽게 떠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세 번 정도 읽었던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었던 경험이 별로 없었는데. 나는 가끔 감정적인 면이 넘칠 때가 있는데, “단 하루만 더”라는 제목에서 나는 무엇인지 모르는 서글픔이 느껴졌다. 단 하루만 더. 안타까움이자 애절함, 그리움의 색을 지닌 것 같았다. 오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을 두고 “더”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으니까. 지금 이 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절실함 일 테니까. 책에 보면 “편”이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엄마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날. 엄마가 내 편을 들어주던 날. 내가 어머니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날. 어머니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날.) 가족에게서 편을 나누어 시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이 있다는 것은 영원한 응원군을 얻은 것이요, 곧 승리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편이 없다는 것은 순식간에 틀린 선택을 하는 어리석은 패배자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저자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단순히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슴이 먼저 느끼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참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내 곁에는 취미삼아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만만한 상대를 못 찾아서 내게 큰 소리를 내는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단 하루만 더”라며 애원할 일이 지금은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도 막연하게나마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 같다. 세월이 더 흐른, 어느 한 모퉁이에서는 나 역시 “단 하루만 더”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그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이 땅 위에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 숨 쉬는 모든 이들에게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또한, 어머니의 자식으로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와 단 하루라도 더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도 함께.

#내가 어머니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날

 예전에 어머니가 남동생 자취방을 찾아 막냇동생과 함께 대구에 온 일이 있었다. 고속도로의 빠른 속도보다는 국도의 한적함과 음악을 고집했던 막내여서 울산에서부터 대구까지 국도를 타고 올라온 적이 있다. 물론 알아듣지도 못하는 음악에 귀가 윙윙거린다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내 차에 얻어 탔으니까, 적응을 해야지!”라는 동생의 맞대응이 제법 눈에 선하다.
그렇게 대구에 다녀간 적이 있었던 어머니와 아버지, 내가 거실에서 과일을 먹을 때의 일이다. 내가 사는 대구는 복잡해서 길 찾기가 어렵다는 소리에
“그래도 경산에서 한 길로 쭉 가니까 자취방이 나오더라.”라며 어머니가 이야기를 꺼냈다.
“진짜 경산에서 큰길로 쭉 가니까 나오더라.”
이에 운전 경험 많은 아버지께서 대답을 하신다.
“대구는 복잡해서 그렇게 가면 안 된다. 대구가 얼마나 넓은데. 뭘 몰라서 그렇지.”
“아닌데, 저번에 한 길로 가니까 나오던데,”
아버지 답답한 소리를 한다며 어머니를 쳐다보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다.
“참. 거길 어떻게 그렇게 찾아가. 진짜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대구에 올라온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는 나. 옆에서 이렇게 거들었다.
“엄마는 그렇게 하면 못 온다. 대구가 얼마나 복잡한데.”
어머니 할 말을 잃었고, 고개만 갸우뚱거린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달구벌대로.
그 길만 따라오면, 경산을 지나 대구로 올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의 유일한 결점은 내가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 미치 앨봄의 ‘단 하루만 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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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법정 잠언집
법정(法頂) 지음, 류시화 엮음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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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개설과 함께 읽기 시작한, 아니 읽었다는 표현보다는 읽어주었다는 것이 더욱 어울릴 듯싶다. 하여간 카페의 한구석에 책 읽는 마당을 펼쳐놓고 혼자서 책을 읽었다.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큰 소리로, 때론 숨죽이는 소리로, 가끔은 정곡을 찌르는 법정스님의 혼쭐에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슬그머니 읽어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읽던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라.”라는 책이 드디어 끝이 났다. 2006년 3월 3일에 시작해서 2006년 12월 14일까지 약 280여 일이나 걸렸다. 책을 한 권 읽는데 이 정도 걸렸다고 어디 가서 이야기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부끄러워서 말이다.

 굳이 다른 책을 마다하고 이 책을 선택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제목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라.’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배려인지 모르겠다. 아니 배려라는 표현보다는 비단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가치를 단 한 줄로써 나타내었다는 것, 그것은 놀라움이었다. 나와 네가 다르지 않음을, 내가 너의 위에 있을 이유도 또한 아래에 있을 이유도 없음을,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잘잘못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법정스님의 고운 시선으로 엮어놓은 이 책은 내게 풍랑으로 흔들리던 배 갑판에 환한 빛과 함께 찾아든 선명함이었다. 아니 안개가 걷히면서 보이기 시작하는 목적지였는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한 페이지, 혹은 두 페이지에 걸쳐 읽으면서 대문에 걸어놓고 다녀가는 이들의 마음을 두들겼다. 가끔 댓글을 달아주는 이도 있었고, 갈 길이 멀어 마음만 잠시 내려두었다가 바삐 떠나는 이도 있었다. 가끔 글의 느낌과도 비슷한 사진도 함께 걸어두곤 했는데, 글보다 먼저 눈을 잡아끄는 사진에서 더 큰 느낌을 받는 이도 있었던 것 같다. 하여간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이렇게 오래 읽어본 것도 처음이겠거니와 또 이렇게 오래,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제목에 걸맞게 법정스님은 내게 하늘의 넉넉함을 요구하기도 하였고, 바다의 깊이를 강요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아니 어떨 때 생각해보면 백치미를 이야기하기도 한 것 같기도 하다. 참 황당했다. 분명 아는 내용이라며 우기기까지 했는데도, 자꾸 틀렸다고 말씀하시니 말이다.

 책을 덮은 이 순간에도 수많은 영광의 자국들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서 나를 바라보곤 한다. 그리고 가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어 낼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앞으로는 조금 고민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그냥 쉽게, 편하게, 기분으로 생각하고 넘어갈 일 앞에서 아마 어김없이 나타나 힘 발휘를 할 것 같다. “그새 잊었느냐?”라며 아마 죽비까지 내게 선물하실 것 같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 죽비를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길모퉁이도 좋을 것 같다. 혹은 버스 안, 지하철 안에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 잠자리에 막 들려고 하는 순간에도 괜찮을 것 같다. 그 어느 곳에서든 다 괜찮을 것 같다. 눈물 쏙 나도록 혼이 나도 좋을 것 같다. 내게 허락된 시간만큼.

 이 순간, 내가 고집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아니 고집이라는 표현도 법정스님은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고집이라는 표현이 아니라면 삶의 자세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좋은 의미로 해석되어 질 수 있는 말을 모두 모아놓고 얘기를 꺼낸다면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라.’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아니,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의 행복을 기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슴속에 맺혀진 응어리를 내가 풀어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응어리를 들어줄 수 있는 귀를, 현실의 무게로 내려앉은 어깨를 주물러 줄 수 있는 손을, 또한 옆에서 같이 걸어갈 수 있는 발을, 속으로만 흐르는 눈물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웃음으로 대신하는 울음을 볼 수 있는 눈을, 다들 피하는 냄새에 대해서도 역겨워하지 않을 코를 가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래서 내 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을 아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언젠간 그 끝, 그 어느 즈음엔 도착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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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 - 우리 시대 대표 작가 6인의 책과 서재 이야기
박래부 지음, 안희원 그림, 박신우 사진 / 서해문집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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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읽은 책이 바로 이 `작가의 방`이다. 드디어 오늘 그 책을 다 읽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책을 읽은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만에 찾아든 설렘, 그리움 그런 것들이 함께 공유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푹 젖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니다. 이것은 나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본다. 내가 쓴 글보다 남이 써 놓은 글을 요즘 더 자주 읽으려고 애쓰다 보니, 나의 바닥이 보였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는 막다른 벽 앞에 서 있는 자신에 대한 한계성을 경험했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런 느낌들이 요즘 나를 엄습하고 있었다.

 공지영님의 `책은 내 오락`이라는 표현 앞에서, 강은교님의 자신의 글에는 매미와 같은 간절함이 없다는 이야기 앞에서는 정말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오락처럼 가깝게 옆에 두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못하면서, 간절함이 아닌 순간의 감정이나 기분에 휩쓸려 글을 쓰곤 하는 내 초상화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어디 쥐구멍이라고 있으면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대표 작가들의 방안을 가득 채운 서재와 전집들, 유독 전집에 약한 끈질김이 부족한 나를 찌르는 기분에 읽는 내내 숙제를 떠 앉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작은 배려`라고 위로받아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깊고 넓은 사유의 필요성에 대한 묵직한 논문을 한 권 선물 받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읽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책을 대여섯 권 추려내었다. 추려내었다는 표현은 감히 해서는 안 되는 표현이겠지만, 대작가의 전집이나 문집은 읽어 내려갈 자신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구입해서 한쪽에 둔다면 어느 순간 아닌 꿈속에서조차 나를 덮쳐 올 것 같다는 불안감에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다만, `아주 좋은 책`이라는 표현에 `당시 읽기`라는 책과 작가의 치밀한 내면을 스케치하듯이 표현한 느낌이 드는 소설책 몇 권을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덤벙대는 서두름이 또 이렇게 일부터 먼저 만들곤 한다. 전부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언제나 그렇지만 주문을 하고 난후, 조금씩 되물음을 하며 밀려온다.

 한 달에 몇 백 만원, 일 년에 얼마로 책을 구매한다는 작가들의 소개에 나의 치부가 또 드러난다. 예전엔 그래도 책을 사는 일에 그리 인색하지 않았는데, 아니 인색했다는 표현보다는 책을 읽는 재미를 느끼는 편이었던 것 같다. 읽은 후 책들이 개성적인 나만의 책꽂이에 상장처럼 꽂아질 때의 느낌이 참 묘했다. 그 묘한 느낌이 좋아 더 책을 읽게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 하나 키우는 일에 매달리다보니, 그때의 묘한 느낌은 아련한 기억 저편에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새삼스레 오늘 처박아두었던 그 기억, 그 느낌이 내게 매달리고 달려든 것이었다. 싫지가 않다.

 논문이나 시대의 문제 같은 과제를 풀어내고 있는 이문열 작가. 디지털 시대에 걸맞을 이름만큼의 반항아적인 그러나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김영하 작가. 샘물 같은 정제된 물로 수채화를 그리는 것 같은 강은교 작가. 만만하지 않은 경험으로 삶에 왜곡되어 숨겨져 있는 것들을 굳이 꺼내 놓으려는 공지영 작가. 섬진강 강가에서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고향 같은 김용택 작가. 마음속에 담아두어 혼자 삭히어 고개 숙여 울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차라리 드러내놓고 어루만져주는 신경숙 작가.

 분명 우리 시대의 대표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읽어가는 내내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불씨를 하나씩 건들고 가는 독특한 이들 작가의 서재에서 나는 ‘나만의 서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서재는 비단 나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어느 누구든지 고갈되어버린 뇌 속에, 잠자는 영혼의 부름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나와 같지 않을까. 책을 덮는 이 순간, 첫 항해를 떠나는 항해사처럼 설렘이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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