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만 더
미치 앨봄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단 하루만 더

 즐겨 찾는 인터넷 서점에서 “단 하루만 더”라는 책을 두 권 구입했다. 그러니까 그게 일주일쯤 되었나. 한 권을 구입한 뒷날 다시 같은 책을 신청을 하였더니, 추가 구입이라며 확인해보라는 친절한 질문을 해왔다. 물론 추가 구입이라며 “OK"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해서 한권은 나에게로, 또 한권은 남동생에게로 전해졌다. 3,4년 정도 부모님과 떨어져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다가 다시 시작된 부모님과의 생활에서 부딪칠지 모르는 것들에 대한 염려가 그 바탕에 있었다는 것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싶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만 더 깊이, 살뜰한 눈으로 바라봤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먼저였던 것 같다. 자식으로써 딸이 아닌 아들로서,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를 갖출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도 밝혀져 있지만, 이것은 유령이야기다. 그것도 여자 유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것도 가까스로 살아난 중년남자의 이야기다. (아니 운 좋게 살아났다고 해야 하나.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고 원했던 대로 유령의 길로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았다고 확신하는 한 남자가 자신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며 생을 포기하려는 순간, 8년 전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다. 단 하루 허락된 시간여행이야기이었다. (의식 속이었던지, 무의식 속이었던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하여간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세 여자를 만난다.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떠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떠나려는 사람을 안아주는, 아니 자살을 택하려 하는 아들을 안아주고 싶어 했던 한 어머니의 간절함을 다룬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간절함 속에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몰랐던,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자신은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며, 곁에 있는 누군가를 사랑해줄 의무가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렇게 쉽게 떠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세 번 정도 읽었던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었던 경험이 별로 없었는데. 나는 가끔 감정적인 면이 넘칠 때가 있는데, “단 하루만 더”라는 제목에서 나는 무엇인지 모르는 서글픔이 느껴졌다. 단 하루만 더. 안타까움이자 애절함, 그리움의 색을 지닌 것 같았다. 오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을 두고 “더”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으니까. 지금 이 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절실함 일 테니까. 책에 보면 “편”이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엄마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날. 엄마가 내 편을 들어주던 날. 내가 어머니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날. 어머니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날.) 가족에게서 편을 나누어 시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이 있다는 것은 영원한 응원군을 얻은 것이요, 곧 승리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편이 없다는 것은 순식간에 틀린 선택을 하는 어리석은 패배자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저자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단순히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슴이 먼저 느끼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참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내 곁에는 취미삼아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만만한 상대를 못 찾아서 내게 큰 소리를 내는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단 하루만 더”라며 애원할 일이 지금은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도 막연하게나마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 같다. 세월이 더 흐른, 어느 한 모퉁이에서는 나 역시 “단 하루만 더”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그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이 땅 위에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 숨 쉬는 모든 이들에게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또한, 어머니의 자식으로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와 단 하루라도 더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도 함께.

#내가 어머니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날

 예전에 어머니가 남동생 자취방을 찾아 막냇동생과 함께 대구에 온 일이 있었다. 고속도로의 빠른 속도보다는 국도의 한적함과 음악을 고집했던 막내여서 울산에서부터 대구까지 국도를 타고 올라온 적이 있다. 물론 알아듣지도 못하는 음악에 귀가 윙윙거린다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내 차에 얻어 탔으니까, 적응을 해야지!”라는 동생의 맞대응이 제법 눈에 선하다.
그렇게 대구에 다녀간 적이 있었던 어머니와 아버지, 내가 거실에서 과일을 먹을 때의 일이다. 내가 사는 대구는 복잡해서 길 찾기가 어렵다는 소리에
“그래도 경산에서 한 길로 쭉 가니까 자취방이 나오더라.”라며 어머니가 이야기를 꺼냈다.
“진짜 경산에서 큰길로 쭉 가니까 나오더라.”
이에 운전 경험 많은 아버지께서 대답을 하신다.
“대구는 복잡해서 그렇게 가면 안 된다. 대구가 얼마나 넓은데. 뭘 몰라서 그렇지.”
“아닌데, 저번에 한 길로 가니까 나오던데,”
아버지 답답한 소리를 한다며 어머니를 쳐다보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다.
“참. 거길 어떻게 그렇게 찾아가. 진짜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대구에 올라온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는 나. 옆에서 이렇게 거들었다.
“엄마는 그렇게 하면 못 온다. 대구가 얼마나 복잡한데.”
어머니 할 말을 잃었고, 고개만 갸우뚱거린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달구벌대로.
그 길만 따라오면, 경산을 지나 대구로 올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의 유일한 결점은 내가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 미치 앨봄의 ‘단 하루만 더’ 中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