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은 시각, 그 여자는 매장 청소를 끝내고 카운터에 앉았다. 인도에서 돌아오고 하루를 쉰 다음, 다시 편의점으로 출근을 했다. 시차 때문에 조금 피곤할 뿐, 외려 지금 일하는 모든 것들이 다 좋았다. 그 여자는 편의점 출근 전 송우현과 만났었다.  

 "...좋아보이네요. 여행이 재밌었나봐요?" 송우현의 말에 그 여자는 말없이 웃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위해 킨 휴대폰은 그의 문자와 음성 메시지로 꽉 차있었다. 그 여자는 송우현의 모든 메세지를 보지도 않고 다 삭제시켜 버렸었다. 송우현의 관심이 그녀는 집착 같았다. 그래서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송우현은 단단히 무시하고 있는 듯 했다. 결국 그 여자는 그 때의 그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타지 않았나요?" 송우현은 그 여자의 목소리를 바로 앞에서 듣는 것이 꿈인 것만 같았다. "글쎄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여자는 또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송우현씨에게 할 말이 있어서 나오시라고 했어요. " 그 여자는 송우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짐과는 다르다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송우현씨가 저에게 주시는 관심, 부담스럽습니다." 송우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간다. "전 앞 전에도 송우현씨에게 마음이 없다고 말씀드렸었어요. 그렇죠?" 그 여자는 일관된 자세로 그에게 이야기 하려고 노력한다. 일관된 미소와, 일관된 단호함으로... "이제 저에 대한 관심은 그만 가져주세요.연락도 하지 마시고, 저 보시러 오시지도 마시고..." 그의 표정이 침울해 보인다. "왜 제가 싫은건데요?" 송우현이 묻자 그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인다. 싫은 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인 것 같고, 그냥 싫다고 하면 괜히 미안할 것 같아서다. "...그럼, 송우현 씨는, 송우현 씨가 부담스럽다고 말하고 있는 제가 여전히 좋으세요?" 그 여자의 질문에 송우현은 그녀의 얼굴만 빤히 쳐다본다. 정말 부담스럽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한 모금만 더 마시면, 커피도 떨어질 것이고, 그럴 때는 송우현의 시선을 어떻게 피해야 할까 싶다. 송우현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인지, 안타까움인지 그 여자는 알 수 없었지만,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드디어 송우현이 입을 열었다. "저랑 친구하시면 안돼요? " 송우현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얼마나 웃기는 짓을 하고 있는지... 이 작은 여자 앞에서... 그런데 송우현은 이 여자가 정말 좋았다. 아니, 이상한 승부욕이 올라왔다. 그 여자는 그의 그런 내심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상에 그런 법은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 알은 터였다. "세상에요... 여자랑 남자랑 친구하는 법은 없어요..." 그 여자는 그 뒤로 그와의 대화를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를 송우현은 잡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여자랑 남자랑 친구하는 법은 없다 했던 그 여자의 말이 귓 전을 맴돌뿐이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듯 빗 소리가 거칠었다. 편의점 앞의 휴지통을 치우면서 바닥을 쓸고 있던 그 여자는 빗방울이 굵자 얼른 치우던 것을 마무리하고 편의점 내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미 머리와 어깨는 많이 젖은 상태였다. 물방울이 머릿 결을 타고 흐른다. 그 여자는 가져온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아낸다. 그리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 오세요." 

 그 남자는 비맞은 머리를 닦다 말고 수건을 둘러쓴 알바생에게 담배를 부탁한다. "2,500원입니다." 담배와 거스름을 받고 돌아서려던 그 남자는 퍼뜩 송우현이 떠올랐다. 호기심에 알바생을 다시 본다. 알바생은 머리를 닦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수건을 벋는다."안녕히 가세요." 그 남자도 얼떨결에 인사하고 돌아선다.  

 차창 너머로 담배를 건넨다. "정말 안 타고 갈거야?" 그녀가 담배를 받으며 재차 묻는다. "응, 그냥 여기서 택시 타고 갈래." "왜?" 그녀의 양미간이 찌푸려진다. "너랑 같이 있으면 또 그 생각이 나서 집에를 못 갈수 있거든."  그 남자와 그녀는 만날 때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녀는 늘 그 남자를 원했고, 그도 그런 그녀에게 계속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으로 오라니까." 그녀는 그 남자와의 동거를 원했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다. "그건 안 돼. 너한테 장가가면 모를까." 농담섞은 그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일순 굳는다. "알았어. 그럼 나 들어가볼께." 그녀는 그 남자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재빨리 그를 놓아버렸다. 거기까지가 그녀의 진심이란 걸 그 남자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 떠나고 그 남자는 한동안 비를 맞고 서있었다. 다른 때는 그녀와의 헤어짐이 홀가분했건만 오늘따라 마음이 싸하게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로 채우던 그의 외로움도 더이상 진통제가 듣지 않는 병처럼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밖을 내다봤다. 비가 오는 그 밤, 가로등 불빛과 굵은 빗줄기를 한 몸에 받으며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방금 전 담배를 사갔던 사람이었다.  그의 뒷 모습이 짠해 보였다. 저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와서 따뜻하게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좋으련만... 그 여자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방향을 틀어 저만치 걸어가버렸다. 그 여자의 바람대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오지도 않았고, 우산도 없이 그저 터덜터덜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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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와 짐 일행이 델리에 도착한 후 밤에라도 타지마할이 있는 데라둔까지 여행을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외국인에게는 입장료를 비싸게 받는 그곳에도 내국인들을 위해 무료로 개방하는 날이 바로 그날이어서였기 때문이다. 입장 시간에 맞춰 그 여자와 짐 일행은 타지마할 앞에 도착했다. 수많은 인도인들 사이로 외국인 관광객들도 적지 않았다. 타지마할을 구경하는 내내 그 여자는 인도인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들은 일단 맨발로 실내를 돌아다녔고 어떤 그림이나 그들의 신상 앞에서는 이마를 맞대고 절을 했다. 후추 냄새같은 매캐한 냄새와 함께 땀냄새, 발냄새가 났지만, 그들 속에서 그 여자는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도인들의 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좋았다. "짐, 이 사진 속의 타지마할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 여자는 엽서 속의 타지마할 전경을 보여주었다. "밖으로 나가야 할 걸?" 짐은 그 여자와 함께 밖으로 나가 타지마할 외관을 보기로 했다. 타지마할 앞에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었다. 그를 배경으로 짐을 위해 사진을 찍어주고 짐에게 부탁해 자신도 한 컷을 부탁했다.   

 '안녕, 타지마할. 만나서 반가워. 난 널 여행 책자에서 먼저 봤어. 진짜 널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실제로 보니까 감동이 밀려오네~. 너를 보니 내가 젊다는 게 실감이 가고, 내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삶의 방식들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알겠어. 앞으로  더 열심히 살고, 더 지혜롭게 살아갈거야.내 주변을 더 돌아보고 새로운 인연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살아갈거야. 그러니까 기대해~.' 

짐은 보았다. 그 여자가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시선의 따뜻함을. 그녀의 눈에 또다른 결심같은 것이 반짝이던 것을. 짐은 그녀를 보면서 아들을 낳고 죽은 자신의 연인을 생각했다. 의지가 강하고 인생을 잘 가꾸며 살아가려던 그녀. 마지막 죽기까지 엄마로서, 아내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었던 아름다운 여자. 그러고보니 그녀도 한국인이었다.  

 "슬퍼보이네~. 왜 그래요?" 눈을 들어보니 그 여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짐의 눈시울이 붉어져있었다. "아니..." 그래도 그녀의 시선이 걷히지 않자 짐은 애써 웃어보였다. "사진 하나 더 찍어줄까? " 짐의 제안에 그 여자도 그냥 동의한다."사진 나오면 보내주겠어? " 짐이 묻자 "물론이죠 ."그 여자가 끄덕인다. "네 사진도..." 짐이 말하자 그 여자는 어색해 한다. "제 독사진을요?" 짐이 웃자 그 여자는 더 어색해서 웃어버린다. "그러지 말고 같이 찍어요." 그 여자는 그 어색함이 싫어 지나가던 외국인 여행객을 불러 사진을 부탁한다. 그렇게 둘은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사진을 함께 찍었다.  

  타지마할 근처에는 하얀 건축물 외에도 네개의 건축물이 더 있었다. 옛날 인도의 왕이 자신의 죽은 왕비를 위해 무덤 조차도 궁으로 꾸며 만든 듯 했다. 그 여자는 최대한 발품을 팔아 그 곳 전부를 돌아보느냐, 자신이 볼 수 있을 만큼만 구경을 하느냐 골똘이 생각하다가 더 기억에 남기는 쪽으로 결론지었다. 점심도 거르고 본 건물과 양 옆의 두 건물을 구경한 뒤 저녁 6시 폐관 시간에 맞춰 그 곳을 나왔다.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한 그들은 버스정류장까지 서둘러 갔다. 다시 델리로 돌아가 숙소를 잡을 예정이었다. 짐 일행은 내일 밤 비행기로 캐나다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그전에 몇 가지 물품을 사기 위해 쇼핑을 할 예정이었다. 덕분에 그 여자는 밤에 이동하는 것 빼고,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런 말 하면 오해할까?" 가끔 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네?" 그 여자가 되묻자 짐은 살짝 미소를 띄었다. "너는, 아름답고 순수한 여자야... 그리고 난 네가 좋아." 그 여자는 그런 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널 보면... 내 아내가 생각나."  그 여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부탁하나 할께. 한국에 가면 그 남자를 만나. 그리고 그를 구제해 줘. " 그 여자는 짐이 말하는 그 남자가 메모 속에 그를 말하는 것인 줄 알았다. "넌 평범한 듯 보이지만 어딘가 특별한 것이 있어. 그리고 내가 만난 여자들 중 내 아내 이후 가장 아름다운 여자야. 그라면 너의 그런 아름다움을 분명히 볼 수 있을거야. " 그 여자는 그의 말이 황당했다. 다짜고짜 자기더러 좋다느니, 아름답다느니 해놓고는 뜬금없이 메모 한 장을 주고 그 남자를 만나 보라 한다. 짐 자신이 자기에게 느끼는 호감이 아닌 남을 위한 호감일까 싶어 불쾌하기보다 신기했다. 도데체 그 남자가 어떻기에. "왜 그 사람에게 신경 쓰시는 거예요? 자신만의 파티마를 만날 수도 있잖아요. 아직 젊은데..." 그녀의 말에 짐의 눈에 다시 슬픔이 서렸다. "평범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줄 그는 몰라....그를 보면...나를 보는 것 같아... 10년 전의 내 모습이..." 그의 눈에 눈물이 괴자 그 여자는 당황해서 얼른 티슈를 꺼내 주었다. "울지 마요..." 그러는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괴었다. 아내를 기리는 짐의 모습이 너무 측은해 보였다.  

 그 남자는 그녀의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그는 담배를 피지 않았지만, 그녀는 여자치고는 대단한 골초같았다. 면허가 없는 그를 태우고 자신의 차를 손수 운전하는 그녀를 위해 그 남자는 자청해서 담배 심부름을 했다. "어, 알바생은 어딨어요? 왜 사장님이 나오셨어요?" 앞서 계산하는 여학생이 계산을 하던 점장에게 묻는다. 이 편의점 단골인 듯 했다."어, 지금 휴가 갔어." "휴가요? 뭐, 지난 번처럼 여행간 거예요?" 그 여학생은 알바생에 대해도 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응, 이번에는 인도로 가겠다던데..." 인도? 그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담배를 계산하고 나오며 누군가와 부딪힌다. 송우현이다. "여기서도 보네." 송우현의 눈이 매장 안을 훑는다. "뭐 사러 온 거야?" 그가 묻자 송우현이  가볍게 "어"라고 한다. "그럼, 사고 가." 그 남자는 송우현과 인사하고 자리를 뜬다. 편의점 문이 닫히기전, "아저씨, 그 사람 아직 안 왔어요?" 라고 묻는 송우현의 목소리를 듣는다. '알바생이 여자였나?' 인도와 여자 알바생, 불현듯 봄베이 커피숍에서 봤던 자그마한 여자가 떠오른다. '설마...' 그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그녀의 차로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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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이 칼칼하다. 자면서 모든 먼지를 다 먹은 듯, 가슴도 답답하다. 뱃 속 사정은 좀 나아진 듯 했다. 그 여자는 또 배가 고팠다. 그래도 어제처럼 과식은 하지 말아야지 했다. 아래칸을 내려다 보니 다들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아직 하루를 더 가야 델리에 도착한다. 그 여자는 옆의 칸으로 건너가서 다음 정거장에 내려 뭐라도 사가지고 와야겠다 싶었다. 그 여자가 타고 가는 칸은 2등칸으로 물건이나 주전부리류를 파는 상인들이 들어오지 못했다. 여정을 방해받지 않는 장점도 있었지만 인도 서민들이 겪는 소소한 재미는 가질 수 없었다. 그 여자가 3등칸에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사이, 마침 기차가 정거장에 섰다. 사람들이 우루루 내리더니 그곳에서 파는 것들을 보고 사고 했다. 그 여자도 용기를 냈다. 어차피 다 추억인데 뭐... 제일 처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바구니에 초록색 과일을 넣고 파는 상인이었다. 언뜻 보면 사과처럼 생겼는데 쪼개보니 속이 하얗고 씨가 듬성 듬성 박혔다. 상인은 거기다 고춧가루등의 마살라를 뿌려주었다. 그 여자는 그 과일을 사보기로 했다. 물과 바나나, 비스킷 등을 넉넉히 사서 그 여자는 기차로 돌아갔다. 그 여자가 먹을 걸 들고 칸을 옮기는 동안 기차가 움직였다. 정거장에서 짜이를 마시거나 요기를 하던 이들도 하나, 둘씩 움직이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 남자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샴푸 냄새를 맡았다. 낯선 방이었고 그의 품에 그녀가 잠들어있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자신을 돌아보았다. 남자라면 술을 먹고 누구나 하는 실수를 자신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뒤척거리자, 그녀가 깼다. "일어났어?" 그녀도 돌아눕는다. 그 남자는 뭐라 할 말이 없어 말없이 천정만 바라본다. "안 갈거야?" 그녀가 말한다. "볼일 끝났으면 이제 가야지." 그녀는 일어나서 화장실로 들어가버린다. 그런 그녀를 보고 그 남자는 그제야 일어나 앉는다. 앞으로 저 여자와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그는 자신의 옷을 입는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물소리만 크게 들린다. 그 남자는 방을 나온다. 지난 밤에 뭘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조금씩 기억이 났다. 학교 근처의 원룸 오피스텔. 그 곳은 그녀의 집이었다.  

 그 여자가 자기 칸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들 깨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사온 음식들을 그들과 나눠먹었다. 사과처럼 생긴 그 과일 이름이 '구아바'라는 걸 다른 친구들이 알려주었다. "일어나보니까 너 없더라." 짐이 바나나를 먹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기차도 서 있고 해서 나는 너 간 줄 알았어. 인사도 없이..." 그의 말에 그저 웃는다. 함께 하는 기차여행이 참 좋은 것이로구나 그 여자는 생각한다. 그날 하루, 그 여자는 외국인 친구들과 속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그들 모두 자신 나름대로의 진심을 다한 꿈이 있었고 여행 이후에 그동안 하지 않았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들 입을 모아 말했다. 짐은 그것이 그 여자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 일행은 원래 자신에게 많이 의지했지만, 이제는 저 자그마한 동양여자에게 자신도 모르는 부분을 털어놓고 있다. 짐 스스로 그녀에게 갖는 호감 이전에 그녀의 모습에서 짐은 자꾸 그 남자의 모습을 겹쳐 본다.  

 어머니는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그 남자에게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 더구나 숙취에 묻힌 그의 모습에 그저 기가 막혀할 뿐이었다. 그 남자는 그런 어머니를 두고 방으로 돌아와 그대로 뻗어버렸다. 동생에게 부탁한 휴대폰이 와 있었다. 개통까지 끝낸 상태라 언제든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생각에 잠기다가 아직 자신의 주머니 속에 구겨진채 들어있는 메모를 꺼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그 남자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에 맡았던 샴푸 냄새를 떠올렸다.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작이 어떻든 타지마할 여행 이후 그녀는 그에게 선물 같은 존재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다시 연락해올 줄 기대하지 않은 듯했으나 그의 호감에 내심 기뻐하는 듯 싶었다. 그는 저녁 때 그녀와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잠이 들었다.  

  델리 역에 도착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일행은 일단 타지마할까지 밴으로 이동하고, 중간에 잠깐 쉬면서 늦은 저녁을 먹기로 했다. 모두 지치고 힘든 일정을 잘 소화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는데, 그들이 탄 2등칸은 기차 음식 외에는 아무 것도 주문할 수 없어서였다. 그들 모두 사전에 기차 음식이 위생적이지 않아 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바나나 같은 과일이나 물, 비스킷 등으로 여정을 견뎌내었다. 운전자를 제외한 5사람만이 밴 하나에 오를 수 있어 그들은 세 대의 밴으로 모두 이동했다. 밴에 오른 모두가 깜빡 깜빡 졸기 시작해 식사를 하기 위한 중간 지점에서는 전부 더 지쳐보이는 듯 했다. 그곳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시켜놓고 모두들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그 여자도 하도 열심히 먹어대 짐이 제재를 가할 정도였다.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등을 먹고 나서는 모두들 포만감에 다시 여정을 할만한 힘이 나는 듯 했다. 밴이 이동하는 동안 그들은 내내 서로 장난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또 입이 심심하면 매점에서 산 넛트류나 비스킷 초콜릿 등을 같이 나누어 먹었다. 도착하고 나서는 먼저 짐을 부릴 호텔을 찾았다. 일행중에 여자들이 있어 인솔자격인 짐은 동의하에 좀 더 환경이 나은 호텔을 잡았다. 그들 모두 피곤했지만 그냥 헤어져 잠이 들기에는 아쉬운 밤이라 짐을 내려놓고 한 번 더 모여 맹고주스를 사마시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와 만나러 나가기 전에 이 메일을 체크했다. 그동안 체크해보지 못한 자신의 메일 박스가 스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더 눈여겨 보자 낯익은 이름 하나가 보였다.  '짐...' 그 사막의 밤이 떠올랐고 사진 속의 짐의 아들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는 거야? 한국에는 잘 도착했고? 우리는 뱅갈로에서 봄베이로 오늘 아침 도착했어. 그런데 델리로 바로 가는 기차표를 구할 수 없어 내일 출발 하기로 했어. 여기에서 너처럼 혼자 여행을 다니는 한국인 소녀를 만났어. 영어는 서툴지만 그래도 바디 랭귀지가 아주 훌륭해. 하하' 

 그 남자도 짐을 따라 웃었다.  

 '미소가 상큼한 소녀인데, 한 번 만나 보겠어? 난 다른 사람은 잘 엮어주지는 않는데 왠지 이 소녀가 네가 바라는 이상의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 

 그 남자는 그에게 답신을 보냈다. 

 '소식 줘서 고마워, 짐. 한국에는 잘 도착했어. 말은 고맙지만 네 제안은 사양할게. 오자마자 내게 걸프랜드가 생겼거든. ㅋ ㅋ 어쨌든 남은 여행도 행복하길 빌께.' 

 다시 그 사막의 밤과 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 밤, 그리고 타지마할에서의 그 외로움은 더 이상 없다. 바람이 가르쳐준 파티마와 같은 인연이 지금 만나는 그녀가 아니라 할 지라도 그 남자는 지금의 만남에 만족하겠노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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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는 자기 허리에 멍자국을 낸 그 카트녀와 불쾌한 통화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이런걸 적반 하장이라고 하나?' 사실 병원비든 약값이든 그 여자와 만날 이유가 그 남자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그 남자의 입은 옷을 세탁한다고 가지고 나가서는 그 여자의 메모를 발견하고 그 남자 입장에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한 불필요한 설명을 하던 중 그 사실을 알게된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해보도록 강한 압력을 받은 데서 일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의 학교 근처 카페에서 그 남자는 카트녀를 만나기로 했다. 학교에 들르러 나오는 길,  그는 군대에서의 속박이 그에게 새로운 자유를 준 듯 해, 조금전의 불쾌한 통화를 잊어버렸다.  학교는 새로이 들어올 신입생 맞이로 분주해 보이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비어보이는 듯 했다. "어? 너 언제 제대했어?" 낯익은 목소리에 돌아보자 같은 과 동기 한 명이 그곳에 서있었다. "어~. 나 2주전에..." 그는 다가와서 악수를 청했다. 그는 붙임성이 좋았다. 과수석은 아니었지만 동기들이나 선배들에게 인기가 많아 과대표까지 했던 친구였다. "그래? 그러면 그동안 집에 있었던 거야?" 그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참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와 이렇게 길다면 긴 시간을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아니, 여행 다녀왔어." "여행? 어디로?" 그의 질문에 무심결에 대답한다. "인도에...." 그의 표정에 묘한 빛이 드리운다. "인도? 그래?" 그 남자는 웃어 보이고 자리를 뜨려고 한다. 그런데 순간, 그렇게 친한 척을 해준 그 친구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서로 인사를 하고 엇갈리는 순간, 그 남자는 솔직해지기로 한다. "저기.." 그가 돌아본다. "너... 이름이 뭐였지? 갑자기 생각이 잘 안나네." 어색하게 웃는 그 남자에게 그도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나? 송우현. "  

 똑, 똑. 노크 소리에 그 여자는 화들짝 깬다. "네!" 또 무심결에 우리 말이 튀어나온다. "아직 자고 있는 중이야?" 짐의 목소리였다. 아침을 함께 먹고 기차역에 가자고 약속했던 것이 그제야 기억난다." I'm coming! please, wait!(지금 가요. 기다려 주세요.)" 그여자는 양치와 세수를 순식간에 끝내고 밖으로 나온다. 짐과 일행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자는 계속 '쏘리'를 연발한다. 그렇게 그녀와 짐 일행은 근처의 식당에 자리를 잡는다. 외국인들은 그녀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대충 그들로부터 알아들은 이야기들로 정보를 삼는다. "그런데, 여자 혼자서 겁도 안나?" 짐은 참 친절하다고 그 여자는 생각한다. "겁나죠. 근데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용기만 있으면  괜찮다고 해서요."  또 그여자는 서툰 영어로 최선을 다해 대답한다. 짐은 그 여자에게 참 용감하다며 칭찬을 한다. 짐 주변의 다른 외국인들도 그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눈치다. 

 카트녀는 약속시간을 1시간도 더 넘겨서야 나타났다. 그 남자는 화가 났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병원 다녀 오셨다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도도하다 못해 쌀쌀맞기까지 했다. "네." 그러자 그녀는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낸다. "얼마나 다치셨는지 모르지만, 이거면 충분할 거에요." 군대에 다녀오고, 또 생각이 많았던 여행을 다녀온 뒤의 그 남자는, 짐의 말대로 현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당돌함에 갑자기 승부 근성이 올라오는 듯 했다. "그럼, 가봐도 돼죠?" 카트녀가 일어나려 하자 그 남자는 봉투를 집어들었다. "잠깐만요." 봉투 안을 들여다보며 그가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이거면 충분하겠는데요." 그녀가 돌아서자 그 남자의 입만 웃는다. "당신이랑 나, 술 한잔 하죠."  그 카트녀가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의 얼굴에도 자신에 대한 호감이 있다는 걸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그녀도 동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 남자가 제대로 봤다. 카트녀는 그를, 그녀가 자주 가는 클럽에 데려갔다.

 인도인들의 밥은 참 영양가가 없나보다 했다. 아침임에도 그 여자는 음식을 좀 많이 먹었다. 그리고 지금, 기차 안에서 열심히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있다. 화장실에는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휴지 대신 손잡이가 있는 바가지와 물 한 양동이만 있을 뿐이다. 그 여자는 다른 건 모르겠어도, 손으로 밥을 먹고 화장실 처리하는 건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괜찮아?" 짐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 여자는 말없이 끄덕거렸다. "기분은 좀 어때?" 그 여자는 괜찮다고 말해주려다 "배가 고파"라고 했다. 그 말에 짐과 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크게 웃었다. 그 여자는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참 좋았다. 특히 짐이라는 남자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듯 했다. "널 보면, 너를 만나기 전에 봤던 한국인 남자애가 떠올라."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그 여자가 누울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짐에게 그 남자에 대해서 듣는다. "그래요? 잘생겼나요?" 그 여자가 말하자, 주변의 외국인 친구들이 더 반응을 보인다.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인데다 짐처럼 배려심도 좋다고 했다. 짐은 그와의 만남에서 헤어지기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그 여자는 짐에게서 들은 그 남자가 혹시 공항 내 커피숍에서 뒷모습만 본 그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카트녀와 그 남자는 클럽에 온 이후로 존대를 쓰지 않았다. 그녀는 클럽의 다른 친구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여자보다 남자친구들이 더 많았다. 그들로부터 질투를 유발시키기 위함인가? 그는 피식 웃었다. 그에게 그녀는 그저 노는 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자신의 예상보다 카트녀가 더 자기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차는 어두운 가운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들 잠이 든 지금, 그 여자는 문득 깨어 짐이 한 얘기를 떠올렸다. 짐의 이야기가 너무 슬퍼 몰래 눈가를 닦았다.  

"내가 그 사람을 너에게 소개시켜 줄께." 짐은 메모지를 꺼내 그 여자에게 건넸다. "그 사람은 어쩌면 너같은 사람이 필요할지도 몰라. " 펜으로 꾹꾹 눌러쓴 이메일 주소와 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걸 나더러 어떻게 하라구요?" 그녀가 묻자 짐이 웃었다."일단 연락해서 만나. 그리고 짐이 안부 묻더라고 전해줘. 그리고 잘해 봐." "네?" 그 여자는 짐이 농담하는 거라고 여겼다.  "현자같은 그 친구에게는 너처럼 순수한 애가 맞을 거야. 그 친구를 도와줘. 그가 생각하는 것이 다 옳은 것이 아님을 너의 삶으로 가르쳐줘." 그여자는 자기가 어설프게나마 해석한 그의 영어가 맞다고 생각했다.  

 '가르쳐주라고? 뭘?' 그 여자는 다시 그 메모를 보았다.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펜을 꾹, 꾹 눌러 쓴 그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 다시 주머니 속에 구깃 구깃 넣어버린다. 여전히 짐이 자기에게 농담하는 거라고 여긴다.  

 자정이 넘은 시간, 카트녀와 그 남자는 클럽을 나온다. 그 남자도 술을 많이 마셨지만 그녀는 자기 몸 하나도 주체할 수 없다. 그러더니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있는대로 토해버린다. "괜찮아?" 그가 묻자 그녀는 오지 말라고 하더니 몇 발자국 가서는 주저 앉아버린다. 아직 꺼지지 않은 네온 불빛이 취해서 눈감고 앉아버린 그녀를 비췬다. 자기가 이제까지 본 모습 중에 가장 지치고 약한 모습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 남자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손톱만한 형태의 달이 내는 빛에 홀린다. 이제 곧 저 달빛조차 없는 까만 밤이 될 것이다. 그 달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남자가 그녀의 기침 소리에 돌아본다. "이제 일어나. 집에 가자." 불러보지만 그녀는 미동도 않으려 한다. 결국 그가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그녀가 취한 눈을 뜨고 그를 본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그 남자와 그녀는 잠시 서로를 보다가 입을 맞춘다. 그 입맞춤에는 제어할 수 없는 열정이 들어있다. 그 남자는 자신 속에 묶인 무언가가 확 풀어져버린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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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 남자는 집에 전화부터 걸었다."응, 엄마? 네, 돌아왔어요. 네, 조금있다 뵈요.네." 꽤 무더웠던 인도와 달리 한국은 추웠다. 그 남자는 짐을 찾아서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인도여행 기간 내내 애물단지 같았던 산악용 점퍼가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 도착하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봄베이 공항에서 산 선물 꾸러미가 걸리적 거리는 듯 했다. "어, 어, 비켜요! 비키라구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짐을 실은 카트에 부딪힌 그 남자는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의 짐은 바닥에 그대로 나동그라져 버렸다.  "다쳤어요?" 카트를 밀던 여자의 얼굴에 당황스러움과 짜증이 비쳤다. 게다가 물어봐도 '괜찮나요'가 아닌 '다쳤어요'라니... 그는 일어났다. 허리 쪽에 통증이 왔다. "제가 지금 급해서요, 죄송하지만 다치셨으면 병원 가시고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그 여자는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이봐요." 드디어 그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그 여자가 메모지에 자신의 번호를 적어 그 남자의 손에 쥐어준 직후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카트를 끌고 바삐 가버렸다. 그 남자의 마직물 셔츠 상자 하나를 카트로 밟고서... 그는 화가 났지만 사람들의 시선에서 먼저 벗어나고 싶었다.  

 "정말 혼자 다녀도 괜찮은 거야?" 그 여자는 몇 번이고 언니를 안심시켰다. "그럼~. 괜찮다니까. 언니 덕분에 푸나 구경 잘하고 가." 그 여자의 다음 목적지는 델리의 타지마할이었다. 짐이 단촐했던 그녀의 가방은 언니의 부탁으로 챙겨가는 그의 부모님 선물로 무게가 좀 나갔다. 그렇지만 그 여자는 그렇게라도 언니의 신세를 갚고 도울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언니의 집이 버스 정류장 근처라 그녀는 봄베이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봄베이 역에는 외국인 부스가 있어 델리까지 가는 기차표를 쉽게 살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니는 봉투를 내밀었다. "뭐야 이게?' 그 여자는 받고 싶지 않았다. "봄베이에서 델리까지 기찻삯 해." "됐어, 나 돈 있어 언니. 공부하는 언니가 돈이 더 필요하지. " 그 여자가 극구 사양하자 언니는 그녀의 겉옷 주머니에 어거지로 봉투를 쑤셔 넣는다. "여행 온 너한테 우리 부모님 선물 부탁하는 것도 미안한데 이것 마저 안하면 나 미안해서 어떡하라구."  그 말에 그 여자는 더 사양할 수 없게 됬다. 버스에 오른 그 여자를 언니는 계속 지켜보아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언니의 눈을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서로 눈물을 보이면 더 힘들것 같아 두 사람은 끝까지 웃으며 참았다. 그리고 시야에서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 언니도 그녀도 소리죽여 울었다. 그들이 함께 있었을 때의 추억으로 울고, 그 뒤 서로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을 때 또다시 혼자 맞닥뜨려야할 일상이 버거움으로 다가와 울었다. 가족의 부재가 아닌, 동지애를 가진 이의 부재라고 하면 이해가 갈까? 

그 남자는 집으로 돌아와 웃옷을 벗고 허리쪽을 거울에 비쳐 보았다.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의 형과 동생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고 말수가 별로 없던 그는 단순히 '부딪혀서 넘어졌다'라고만 했다. 넘어졌는데 일어날 수 있으면 뼈에는 이상이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그와 달리,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로 인해 그는 병원에 가야 했다. 역시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어머니는 그 남자의 형을 시켜 파스와 소염제를 사오게 했다. 잠깐 있었던 일정도 시차로 인해 그는 피곤함을 느꼈다. 가족들이 그의 선물로 들떠있는 시간을 갖는 동안 그는  조용히 자기 방으로 건너와 자리를 펴고 누웠다. 아까의 일이 떠올랐고, 그 여자로 인해 잠깐 기분이 상했지만  그는 눈을 감았다.

 외국인 부스에는 의외로 관광객이 많았다. 그 여자는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녀의 뒤로 일대의 관광객 무리가 또다시 들어왔다. 한참을 기다려도 줄은 줄어들줄 몰랐다. 아니 창구 자체가 열리지 않은 듯했다. "excuse me실례합니다." 키가 큰 외국인 남자 였다. "아, 예..." 그 여자는 무심결에 우리말을 했다. 외국인은 그 여자의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까도 사람들이 많았었느냐, 어디까지 가느냐 등을 물었다. 그 여자는 최선을 다해 대답해 주었다. 결국 그녀의 차례가 왔고 그녀는 그 날이 아닌 다음날 기차를 탈 수 있는 표를 구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현지인들이 타는 기차편을 구해야 하는데, 지금은 자리가 없어 입석티켓만 가능했고. 이틀밤을 보내는 긴 기차여행에 좌석조차 없다면 문제다 싶어 그녀는 그냥 그 다음날 표를 구입하기로 했다. 보아하니 그 여자 뒤의 관광객 무리들도 그렇게 한 듯했다. 그 여자는 일단 그 하루를 묵어야 할 숙소를 구해야 했다. 난감했다. 그 때, 또 그 외국인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보겠느냐는 제안에 그 여자는 그러겠다고 했다. 이리저리 따지고 할 처지도 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의 인상에 신뢰가 갔다. 배가 많이 고팠던 그들은 일단 요기부터 하기로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 여자는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수 있었는데, 그들은 캐나다에서 온 관광객들로, 라자스탄을 거쳐 뱅갈로로 건너갔다가 조금전 델리로 가기 위해 중간 지점인 봄베이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 외국인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짐'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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