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자기 허리에 멍자국을 낸 그 카트녀와 불쾌한 통화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이런걸 적반 하장이라고 하나?' 사실 병원비든 약값이든 그 여자와 만날 이유가 그 남자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그 남자의 입은 옷을 세탁한다고 가지고 나가서는 그 여자의 메모를 발견하고 그 남자 입장에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한 불필요한 설명을 하던 중 그 사실을 알게된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해보도록 강한 압력을 받은 데서 일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의 학교 근처 카페에서 그 남자는 카트녀를 만나기로 했다. 학교에 들르러 나오는 길,  그는 군대에서의 속박이 그에게 새로운 자유를 준 듯 해, 조금전의 불쾌한 통화를 잊어버렸다.  학교는 새로이 들어올 신입생 맞이로 분주해 보이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비어보이는 듯 했다. "어? 너 언제 제대했어?" 낯익은 목소리에 돌아보자 같은 과 동기 한 명이 그곳에 서있었다. "어~. 나 2주전에..." 그는 다가와서 악수를 청했다. 그는 붙임성이 좋았다. 과수석은 아니었지만 동기들이나 선배들에게 인기가 많아 과대표까지 했던 친구였다. "그래? 그러면 그동안 집에 있었던 거야?" 그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참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와 이렇게 길다면 긴 시간을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아니, 여행 다녀왔어." "여행? 어디로?" 그의 질문에 무심결에 대답한다. "인도에...." 그의 표정에 묘한 빛이 드리운다. "인도? 그래?" 그 남자는 웃어 보이고 자리를 뜨려고 한다. 그런데 순간, 그렇게 친한 척을 해준 그 친구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서로 인사를 하고 엇갈리는 순간, 그 남자는 솔직해지기로 한다. "저기.." 그가 돌아본다. "너... 이름이 뭐였지? 갑자기 생각이 잘 안나네." 어색하게 웃는 그 남자에게 그도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나? 송우현. "  

 똑, 똑. 노크 소리에 그 여자는 화들짝 깬다. "네!" 또 무심결에 우리 말이 튀어나온다. "아직 자고 있는 중이야?" 짐의 목소리였다. 아침을 함께 먹고 기차역에 가자고 약속했던 것이 그제야 기억난다." I'm coming! please, wait!(지금 가요. 기다려 주세요.)" 그여자는 양치와 세수를 순식간에 끝내고 밖으로 나온다. 짐과 일행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자는 계속 '쏘리'를 연발한다. 그렇게 그녀와 짐 일행은 근처의 식당에 자리를 잡는다. 외국인들은 그녀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대충 그들로부터 알아들은 이야기들로 정보를 삼는다. "그런데, 여자 혼자서 겁도 안나?" 짐은 참 친절하다고 그 여자는 생각한다. "겁나죠. 근데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용기만 있으면  괜찮다고 해서요."  또 그여자는 서툰 영어로 최선을 다해 대답한다. 짐은 그 여자에게 참 용감하다며 칭찬을 한다. 짐 주변의 다른 외국인들도 그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눈치다. 

 카트녀는 약속시간을 1시간도 더 넘겨서야 나타났다. 그 남자는 화가 났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병원 다녀 오셨다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도도하다 못해 쌀쌀맞기까지 했다. "네." 그러자 그녀는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낸다. "얼마나 다치셨는지 모르지만, 이거면 충분할 거에요." 군대에 다녀오고, 또 생각이 많았던 여행을 다녀온 뒤의 그 남자는, 짐의 말대로 현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당돌함에 갑자기 승부 근성이 올라오는 듯 했다. "그럼, 가봐도 돼죠?" 카트녀가 일어나려 하자 그 남자는 봉투를 집어들었다. "잠깐만요." 봉투 안을 들여다보며 그가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이거면 충분하겠는데요." 그녀가 돌아서자 그 남자의 입만 웃는다. "당신이랑 나, 술 한잔 하죠."  그 카트녀가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의 얼굴에도 자신에 대한 호감이 있다는 걸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그녀도 동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 남자가 제대로 봤다. 카트녀는 그를, 그녀가 자주 가는 클럽에 데려갔다.

 인도인들의 밥은 참 영양가가 없나보다 했다. 아침임에도 그 여자는 음식을 좀 많이 먹었다. 그리고 지금, 기차 안에서 열심히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있다. 화장실에는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휴지 대신 손잡이가 있는 바가지와 물 한 양동이만 있을 뿐이다. 그 여자는 다른 건 모르겠어도, 손으로 밥을 먹고 화장실 처리하는 건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괜찮아?" 짐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 여자는 말없이 끄덕거렸다. "기분은 좀 어때?" 그 여자는 괜찮다고 말해주려다 "배가 고파"라고 했다. 그 말에 짐과 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크게 웃었다. 그 여자는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참 좋았다. 특히 짐이라는 남자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듯 했다. "널 보면, 너를 만나기 전에 봤던 한국인 남자애가 떠올라."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그 여자가 누울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짐에게 그 남자에 대해서 듣는다. "그래요? 잘생겼나요?" 그 여자가 말하자, 주변의 외국인 친구들이 더 반응을 보인다.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인데다 짐처럼 배려심도 좋다고 했다. 짐은 그와의 만남에서 헤어지기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그 여자는 짐에게서 들은 그 남자가 혹시 공항 내 커피숍에서 뒷모습만 본 그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카트녀와 그 남자는 클럽에 온 이후로 존대를 쓰지 않았다. 그녀는 클럽의 다른 친구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여자보다 남자친구들이 더 많았다. 그들로부터 질투를 유발시키기 위함인가? 그는 피식 웃었다. 그에게 그녀는 그저 노는 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자신의 예상보다 카트녀가 더 자기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차는 어두운 가운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들 잠이 든 지금, 그 여자는 문득 깨어 짐이 한 얘기를 떠올렸다. 짐의 이야기가 너무 슬퍼 몰래 눈가를 닦았다.  

"내가 그 사람을 너에게 소개시켜 줄께." 짐은 메모지를 꺼내 그 여자에게 건넸다. "그 사람은 어쩌면 너같은 사람이 필요할지도 몰라. " 펜으로 꾹꾹 눌러쓴 이메일 주소와 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걸 나더러 어떻게 하라구요?" 그녀가 묻자 짐이 웃었다."일단 연락해서 만나. 그리고 짐이 안부 묻더라고 전해줘. 그리고 잘해 봐." "네?" 그 여자는 짐이 농담하는 거라고 여겼다.  "현자같은 그 친구에게는 너처럼 순수한 애가 맞을 거야. 그 친구를 도와줘. 그가 생각하는 것이 다 옳은 것이 아님을 너의 삶으로 가르쳐줘." 그여자는 자기가 어설프게나마 해석한 그의 영어가 맞다고 생각했다.  

 '가르쳐주라고? 뭘?' 그 여자는 다시 그 메모를 보았다.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펜을 꾹, 꾹 눌러 쓴 그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 다시 주머니 속에 구깃 구깃 넣어버린다. 여전히 짐이 자기에게 농담하는 거라고 여긴다.  

 자정이 넘은 시간, 카트녀와 그 남자는 클럽을 나온다. 그 남자도 술을 많이 마셨지만 그녀는 자기 몸 하나도 주체할 수 없다. 그러더니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있는대로 토해버린다. "괜찮아?" 그가 묻자 그녀는 오지 말라고 하더니 몇 발자국 가서는 주저 앉아버린다. 아직 꺼지지 않은 네온 불빛이 취해서 눈감고 앉아버린 그녀를 비췬다. 자기가 이제까지 본 모습 중에 가장 지치고 약한 모습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 남자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손톱만한 형태의 달이 내는 빛에 홀린다. 이제 곧 저 달빛조차 없는 까만 밤이 될 것이다. 그 달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남자가 그녀의 기침 소리에 돌아본다. "이제 일어나. 집에 가자." 불러보지만 그녀는 미동도 않으려 한다. 결국 그가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그녀가 취한 눈을 뜨고 그를 본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그 남자와 그녀는 잠시 서로를 보다가 입을 맞춘다. 그 입맞춤에는 제어할 수 없는 열정이 들어있다. 그 남자는 자신 속에 묶인 무언가가 확 풀어져버린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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