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은 시각, 그 여자는 매장 청소를 끝내고 카운터에 앉았다. 인도에서 돌아오고 하루를 쉰 다음, 다시 편의점으로 출근을 했다. 시차 때문에 조금 피곤할 뿐, 외려 지금 일하는 모든 것들이 다 좋았다. 그 여자는 편의점 출근 전 송우현과 만났었다.  

 "...좋아보이네요. 여행이 재밌었나봐요?" 송우현의 말에 그 여자는 말없이 웃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위해 킨 휴대폰은 그의 문자와 음성 메시지로 꽉 차있었다. 그 여자는 송우현의 모든 메세지를 보지도 않고 다 삭제시켜 버렸었다. 송우현의 관심이 그녀는 집착 같았다. 그래서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송우현은 단단히 무시하고 있는 듯 했다. 결국 그 여자는 그 때의 그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타지 않았나요?" 송우현은 그 여자의 목소리를 바로 앞에서 듣는 것이 꿈인 것만 같았다. "글쎄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여자는 또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송우현씨에게 할 말이 있어서 나오시라고 했어요. " 그 여자는 송우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짐과는 다르다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송우현씨가 저에게 주시는 관심, 부담스럽습니다." 송우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간다. "전 앞 전에도 송우현씨에게 마음이 없다고 말씀드렸었어요. 그렇죠?" 그 여자는 일관된 자세로 그에게 이야기 하려고 노력한다. 일관된 미소와, 일관된 단호함으로... "이제 저에 대한 관심은 그만 가져주세요.연락도 하지 마시고, 저 보시러 오시지도 마시고..." 그의 표정이 침울해 보인다. "왜 제가 싫은건데요?" 송우현이 묻자 그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인다. 싫은 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인 것 같고, 그냥 싫다고 하면 괜히 미안할 것 같아서다. "...그럼, 송우현 씨는, 송우현 씨가 부담스럽다고 말하고 있는 제가 여전히 좋으세요?" 그 여자의 질문에 송우현은 그녀의 얼굴만 빤히 쳐다본다. 정말 부담스럽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한 모금만 더 마시면, 커피도 떨어질 것이고, 그럴 때는 송우현의 시선을 어떻게 피해야 할까 싶다. 송우현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인지, 안타까움인지 그 여자는 알 수 없었지만,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드디어 송우현이 입을 열었다. "저랑 친구하시면 안돼요? " 송우현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얼마나 웃기는 짓을 하고 있는지... 이 작은 여자 앞에서... 그런데 송우현은 이 여자가 정말 좋았다. 아니, 이상한 승부욕이 올라왔다. 그 여자는 그의 그런 내심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상에 그런 법은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 알은 터였다. "세상에요... 여자랑 남자랑 친구하는 법은 없어요..." 그 여자는 그 뒤로 그와의 대화를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를 송우현은 잡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여자랑 남자랑 친구하는 법은 없다 했던 그 여자의 말이 귓 전을 맴돌뿐이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듯 빗 소리가 거칠었다. 편의점 앞의 휴지통을 치우면서 바닥을 쓸고 있던 그 여자는 빗방울이 굵자 얼른 치우던 것을 마무리하고 편의점 내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미 머리와 어깨는 많이 젖은 상태였다. 물방울이 머릿 결을 타고 흐른다. 그 여자는 가져온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아낸다. 그리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 오세요." 

 그 남자는 비맞은 머리를 닦다 말고 수건을 둘러쓴 알바생에게 담배를 부탁한다. "2,500원입니다." 담배와 거스름을 받고 돌아서려던 그 남자는 퍼뜩 송우현이 떠올랐다. 호기심에 알바생을 다시 본다. 알바생은 머리를 닦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수건을 벋는다."안녕히 가세요." 그 남자도 얼떨결에 인사하고 돌아선다.  

 차창 너머로 담배를 건넨다. "정말 안 타고 갈거야?" 그녀가 담배를 받으며 재차 묻는다. "응, 그냥 여기서 택시 타고 갈래." "왜?" 그녀의 양미간이 찌푸려진다. "너랑 같이 있으면 또 그 생각이 나서 집에를 못 갈수 있거든."  그 남자와 그녀는 만날 때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녀는 늘 그 남자를 원했고, 그도 그런 그녀에게 계속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으로 오라니까." 그녀는 그 남자와의 동거를 원했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다. "그건 안 돼. 너한테 장가가면 모를까." 농담섞은 그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일순 굳는다. "알았어. 그럼 나 들어가볼께." 그녀는 그 남자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재빨리 그를 놓아버렸다. 거기까지가 그녀의 진심이란 걸 그 남자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 떠나고 그 남자는 한동안 비를 맞고 서있었다. 다른 때는 그녀와의 헤어짐이 홀가분했건만 오늘따라 마음이 싸하게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로 채우던 그의 외로움도 더이상 진통제가 듣지 않는 병처럼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밖을 내다봤다. 비가 오는 그 밤, 가로등 불빛과 굵은 빗줄기를 한 몸에 받으며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방금 전 담배를 사갔던 사람이었다.  그의 뒷 모습이 짠해 보였다. 저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와서 따뜻하게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좋으련만... 그 여자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방향을 틀어 저만치 걸어가버렸다. 그 여자의 바람대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오지도 않았고, 우산도 없이 그저 터덜터덜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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