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김서원은 오빠와 헤어진 후, 편의점으로 향했다. 약간 쳇기가 도는 듯 했다.그 이대원이라는 동행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유심히 지켜보다 일어섰던 송우현의 시선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나쁘게만 느껴졌다. 끈적끈적한 느낌이 드는 듯 했다. 

"어? 일찍 나왔네." 

서원이 오기 전 오후에 가게를 지키는 알바생과 함께 일하던 사장이 그 여자를 반갑게 맞아준다. "너무 이른 거 아냐?"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정도 이른 듯 하다. 생각에 잠기다 일찌감치 와버린 거였다.

"이런 날도 있어야죠."

 서원은 그저 웃어버린다. 편의점에는 손님이 많았다. 사실 두 사람도 버거운 그 시간대에 서원이 한 시간 일찍 온 것이 활력을 찾게 해 주었다. 

그렇게시간이 흐르고 바쁜 시간도 지날 즈음, 서원은 편의점에서 혼자가 됐다. 그제야 서원은 의자에 주저 앉는다. 잠도 덜 잔 데다, 낮에 일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 즈음,  전화가 걸려왔다. 

 "응, 오빠?"

 오빠는 서원이 식당을 나간 뒤에도 그 이대원이라는 사람과 함께 있었다. 이 대원은 그녀의 오빠와는 가까운 선후배 사이였고, 그 교수님이라는 아저씨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제자라고 했다.

 "서원아, 근데 말이야..."

 오빠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대원이가 너 관심있어 하던데.."

서원은 그 말에 '그래?'라고 반문할 뿐이다.

 " 따로 만나볼래?"

 서원은 그제야 오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빠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함부로 집에 데려오지 않았고, 아무나 식구들에게 소개하지 않았다. 신중한 성격에 조금 내성적인 면이 강했던 것이다. 그런 오빠가 친 여동생을 소개할 만한 사람이라면 그 이대원이라는 사람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러나 서원은 거절했다.

 "...왜?"

 오빠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래도 오빠가 소개한 사람인데...

"그냥... 아닌 거 같아서..."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서 오세..."

 수화기를 떼지도 않은 채 인사가 먼저 나갔다. 버릇이다. 그리고 서원은 당황했다.

 "서원아... 야..."

오빠의 목소리에 서원은 '좀 있다 전화를 걸겠노라'고 짧게 말한 뒤 바로 끊는다.

"어서 오세요."

 다시 인사를 하자 그가 웃는다.

"잘 지냈어요?"

그는 물건을 사러 온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서원은 그를 보고 망울만 있던 장미 한 송이가 '팍' 소리를 내며 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 유현승씨도 잘 지냈나요?"

 그 여자의 말에 그 남자가 웃는다.

 "네.. 그런 것 같네요..."

현승의 말이 웃기다고 생각하면서 그 여자는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 남자도 그 여자만 바라보고 있다. 보기만 해도 참 편안한 여자다 라고 느낀다.

 

그 남자 유현승은, 그 짧은 대화 후, 편의점에 사람이 많이 와서 그 여자가 더이상 얘기 할 수 없을 만큼 바빠도 편의점을 떠나지 않았다. 탁자에 앉아서 커피조차 마시지 않고 그저 그 여자를 기다렸다. 그 여자 김서원은 그런 그를 곁눈으로만 보았다. 그 여자는 너무 바빴고 손님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 남자에게 무언가 대접할 수 있기를, 그대로 편의점을 나가지 않기를 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렇게 시간이 한 참 흐른 후, 그 여자는 또 다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유현승 씨 뭐좀 마실래요?"

그 여자가 묻자 그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그럴까요? 김서원씨도 같이 마셔요 그럼."

"어떤 거 드릴까요? 제가 사드릴께요."

그 말에 현승은 미간을 약간 찌푸린다.

"전 커피면 되는데..."

"아무거나요?"

"네."

그 여자가 커피를 타는 동안 그 남자는 말없이 그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 여자도 그의 시선을 느껴 자기의 행동이 부자연스럽다는 걸 깨닫는다.

"언제 퇴근하세요?"

커피를 받아들며 그가 묻는다.

"내일 아침 8시요."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밤에 무섭거나 심심하지 않아요?"

그의 말에 살며시 웃는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지금은 워낙 하던 일이라...일할 것도 있고 책도 늘 가지고 다녀서 심심할 겨를도 없구요..."

그가 생각난 듯 말한다.

"그래서 그렇게 책을 많이 가지고 다니셨구나."

"네"

그 말에 그 여자는 또 웃어버린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이 없다. 그 여자는 편의점에 들른 한 손님의 계산도 해 준다. 그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아까 식당에서 본 그 분, 누구세요?"

그 남자는 짐짓 모르는 척 물어본다.

"한 분은 저희 오빠시구요, 옆에 흰 티 입으시고 마르고 키 크신 분은 오빠 후배시래요. "

그 여자는 그 남자가 누구를 이야기 하는지 다 알거라고 생각했다.

"오빠 되시는 분이 우리 학교 나오신 것 같던데..."

"유 현승 씨도 그 학교 다니세요?"

그 여자의 눈이 동그래진다.

"네..."

"아~ 그렇구나. 유 현승 씨 공부 잘 하셨나보다.

"아, 잘 한건 아니고 그냥 열심히.."

그의 말에 그 여자는 또 웃어버린다.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고 또 웃기를 반복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는 그 누구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두 사람의마음과 귀에는 서로의 진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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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저 여자..." 그 남자만 그 여자를 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송우현도 그녀와의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 그 여자를 보고 시선을 멈추었다. "아는 사람이야?" "어." 그 남자가 묻자, 송우현이 시선을 거두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 커플은 중간 중간 사람들과 만나고 있었고, 그 여자는 소개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 여자의 얼굴은 그 남자가 만난 지금까지의 여자들과는 사뭇 다른 빛을 내고 있었다. "현승아, 나 잠깐 갔다올께." 송우현은 그녀에게조차 인사하는 것을 잊어버린 듯 급히 걸어갔다. 그는 조금 전 그 커플과 인사를 나눈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저래, 저 사람?" 그녀가 묻자 그 남자는 그제야 그녀를 보았다. "응...몰라."그가 고개를 젓자, 그녀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그렇게 안 봤는데, 싱거운 사람이네." 그녀의 말에 그 남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남자도 송우현이 알려고 하는 그것을 알고 싶었다. "자기야, 우리 그만 가자. 나 배도 고프고 좀 힘들어." "어? 어... 그래..." 그 남자는 다시 그녀의 가방을 든다. 그녀는 벤치에서 일어나 그 남자에게 바싹 붙어버린다. 같이 걸으면서 그 남자의 눈은 송우현을 주시한다. 다행인지, 송우현은 돌아서서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밝다. 송우현은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곧장 그녀에게 사과를 한다."죄송해요, 갑자기 자리를 떠서." 그녀는 '아니'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뭐가 알고 싶으셨던 거예요? 아까 봤던 그 커플 중의 여자, 아는 사람이에요?" 그 남자는 그녀가 현승에게 그렇게 물어봐 준 게 정말 고마웠다. "네, 사실 제가 얼마 전부터 마음에 두던 여자인데...." 그러더니 말을 끊는다. "하다 보면 긴 이야기거든요. 듣고 싶으시면 밥 한 번 사주시죠." 정말 송우현은 못 말리겠다 싶다. 그 남자는 그녀가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좋아요, 제가 궁금한 건 못 참거든요." 라며 함께 식사하는 데 동의한다. 송우현은 가면서도 여전히 그녀와 농담을 주고 받았고 그 남자는 곁에서 말이 없었다.  

 그 여자와 그녀의 오빠는 함께 학교 안을 거닐었다. "오빠 나한테 학교 구경 시켜주려고 오자고 한 거였어?" 그 여자가 묻자 오빠는 그냥 웃는다. "웃기는...." 오빠는 그 여자와 함께 어느 건물 앞에 멈춰섰다. "오늘이 나 많이 도와주신 교수님 생신이라서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려고..." 오빠는 다시 앞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 여자도 뒤따른다. "교수님!" 오빠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 반백의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했고, 오빠는 그 여자를 소개했다. 오빠의 교수님은 그 여자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보았다. 그 여자는 왜 이 분이 자기를 그렇게 볼까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분은 휴대폰 문자로 누군가를 부르는 듯 보였고, 곧 차를 들고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어? 선배." 큰 키에 마른 듯 보이는 그 사람은 성격도 서글서글했다. 교수는 그에게도 앉으라고 권했다. 오빠는 그와 그 여자를 서로 소개해주었다. "안녕하세요, 이대원 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김 서원입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나가 점심을 들기로 했으나 교수는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오빠는 그에게 준비해 간 구두 상품권을 드리고 좋은 구두를 사 신으시라고 권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나왔다.  그 여자는 이 모든 상황이 점점 어렵고 어색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귀고 싶다고 했죠." 송우현은 자신이 그 여자를 어떻게 만나고 거절받았는지를 낱낱이 얘기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간간이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점점 더 어색해지고 있었다. "그랬더니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라고 말하더라구요. 그래서 친구로도 안되겠냐고 했죠... 그랬더니..." 그러면서 그는 소주잔을 들어 한 입에 마셔버렸다.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에 그녀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게 그렇게 웃을 일인가? 순간 그녀의 행동이 그 남자는 불쾌하게 느껴졌다.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대요?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죠?" 그 남자는 말없이  소주잔을 들어  송우현처럼 한 입에 마셔버렸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뭐." 송우현의 말은 의외였다. "생각해보세요. 친구처럼 지내다 결국 남자쪽에서나 여자쪽에서 먼저 좋아지던가, 흐지부지 깨지던가 뭐 그렇게 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순간 말이 없어졌다. 갑자기 정색을 하는 송우현의 말이 불쾌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송우현이 그 여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예상했던 것 보다 더 깊었다는 걸 알았다. "분위기 갑자기 왜 이래? 술 잘 먹다가. 어서 술이나 먹자고" 그 남자는 그 여자와 송우현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아, 그래요. 그냥 한 말이니까 신경 쓰시지는 마세요." 송우현의 말에 "네..." 하며 그녀는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를 풀으려고 하는 동안 세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심결에 돌아본 그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여자였다. 김 서원. 그리고 서원도 그를 알아보고 무심결에 목례를 했다. "뭐야, 자기 아는 사람이었어?" 그녀의 물음에 그 남자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이번에는 송우현도 그를 보고 있었다. "유현승, 너 아는 사람이었어?" 그의 얼굴빛은 의외의 것이 있었다는 듯 놀람 비슷한 것이 있었다. "아, 그게..." 입을 채 열기도 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가버렸다. 그 남자는 그녀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어쨌든 따라나갔다.  

 "아는 사람이야?" 오빠가 그 여자에게 물었다. "어... 외국에서 만난 친구분이 있어. 그런데 그분을 앞서 만났던 한국분이 저 분이셨거든. 선물을 전해 달라셔서 전해드렸거든. " "그래? 우리 학교 다니는 사람 같은데?" 오빠가 다시 그들을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그 남자도 따라 나갔다. 그 곁에 같이 있었던 송우현만 그들 쪽을 보고 있었다. "식사 어떤 걸로 하실래요? 여기는 삼겹살이랑 주물럭이 제일 괜찮아요." 이대원은 그들에게 식사를 권했다. 그 여자는 잠시 송우현을 돌아보고 옆의 동행에게 눈치채지 않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송우현의 시선이 자꾸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붙잡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로 들어가 버렸다. "도데체 왜 그래?" 그가 차문을 잡은 채 그녀에게 묻자 그녀는 자꾸 그의 손을 뿌리쳐댔다.  "몰라서 물어?" "뭔데?" "자기랑 끝이야." "야!" 그는 더더욱 힘을 주었다. "너, 지금 이렇게 가면 음주운전이야. " 그 말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니까 나와. 택시태워 보내줄테니까 제발 나와. 무엇 때문에 화났는지 지금 말 안 할거면 나중에 해도 돼. " 그러나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발 나와." 그러나 그녀는 고개만 돌려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정말이야... 이제 자기랑은 끝이야...그러니까 이대로 가게 내버려둬." 그녀의 말에 그 남자도 잠깐 숨을 참는다. "왜?" 그녀는 그와 눈을 맞추었다. "현승씨는... 한 번도 내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어. 우린 그저 육체적으로만 놀았지.... 그런데 현승씨 마음이 누구에게 가 있었는지 오늘 알게 됐거든." 그 남자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그녀를 더 지켜보게 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의 팔을 뿌리치고 차문을 닫고 그렇게 가버렸다. 그 남자는 그렇게 멍하니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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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는 멍하니 그 여자가 비운 자리를 보고 있다. 서원은 알바하는 편의점까지 책을 들어주겠다는 현승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혼자서 그 많은 책을 들고 가버렸다. 자신이 마신 라떼 컵만 치워달라고 부탁하면서...현승은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부터 방금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사라진 순간까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상했다. 그녀의 모습이 자꾸 점층되어서 그의 뇌를 채우는 듯 머릿속이 그녀로 가득 메꿔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인정하고 싶었다. 아니 인정하고 있었다. 김서원이라는 작은 여자에게 끌리고 있는 자신을.  

 그 여자는 책을 들고 가면서 그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조금 전 헤어지기까지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잘생겼네...' 그리고 그 비오는 날 밤, 여자친구인 듯 보이는 사람에게 담배를 사다주던 그를 또한 떠올린다. 그리고 웃는다. '그런거지 뭐...' 서원은 그냥, 힘든 밤이 시작되기 전, 잘생기고 친절한 사람을 만났다는 데 의의를 두자고 생각하고 더이상의 감정은 말자고 또 다짐 비슷한 걸 해본다.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추위도 한 풀 꺾여서 정말 봄기운이 완연한 저녁이었다.  

 "무슨 생각해?" 그녀가 그 남자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그 남자는 고개만 젓는다. "오늘 자기 딴사람같아." 그녀의 말에 그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 본다. "왜?" "나 안아주는 것도 전같지 않고. 뭔지 달라보여." 그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껴안아준다. "그럴리가..."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됐어. 자기 그렇게 하니까 더 이상해." 그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방을 나간다. "왜? 내가 뭘 어쨌는데?" 대꾸가 없다. 그는 한숨을 쉬며 천정을 올려다 본다.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와는 꼭 이런 식의 만남이 이어진다. 언제나 그녀의 집에서 만남을 가졌고, 그 편의점 앞에서 헤어지는 것으로 만남이 끝난다. 편의점... 아...순간 그 남자는 얼굴을 가린다. 김서원이라는 여자가 떠오르자 자신의 그런 모습이 창피하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그 여자는 편의점 일을 하는 틈틈이 밖을 내다본다. 혹시라도 그 잘생긴 남자가 들러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러나 일주일이 넘도록 그 남자는 편의점에 들르지 않았다. 그 여자는 자신의 그런 모습에 또 한번 쓴 웃음을 짓고 바닥 청소를 시작했다.  

 강의가 시작되면서, 그 남자는 교수님과 같은 과 내에 다른 교우들을 만나느라 조금 바쁜 시간을 보냈다. 군대시절, 공부만은 열심히 하자 마음먹었던지라 학교생활과 교우관계등 될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싶었다. 그녀와의 만남도 지속되었던 터라, 그의 귀가도 늦어졌다. 김서원에 대한 마음은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괜한 죄책감이 생겨 묻어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녀의 집에서 그의 집에 가려면 꼭 그 편의점을 지나야 했지만 그의 의식 속에 그곳은 건드려서는 안될 성역처럼 되었던 터라 그는 가능한한 그곳을 멀리 피해서 다녔다. 자신의 그런 행동에 스스로 비웃기도 했지만 그런 행동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서원아!" 그 여자는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 한쪽 눈만 뜬 채 부르는 곳을 보았다. 오빠였다. "...왜..." 다시 돌아눕자 오빠가 들어와 이마를 만져본다."열 없어. 안 아파..." 그 여자의 오빠는 여행 전 일로 혹시라도 그 여자의 컨디션이 이상하다 싶으면 어디가 아픈건 아닌지 신경을 썼다. "못 일어나겠어?" 그 여자는 고개만 돌려서 오빠를 본다. "잠이 늘은 것 같아. 아님 내가 늙었던가" 그 말에 오빠는 소리내서 웃는다. "더 잘거야, 그럼? 알바 가기 전에 나랑 데이트 안할래?" "응?" "데이트... 지난 번에 오빠랑 영화 보러 간 이후 한 번도 같이 뭐 한 게 없잖아." 생각해 보니 그렇다. "알았어. 그럼 맛있는 거 사줘야 돼." "그래.그럼 준비하고 나와." 오빠는 그렇게 방을 나가고 그 여자도 일어난다.  

 그 남자는 학교에 놀러온 그녀를 데리고 캠퍼스 여기 저기를 같이 거닐었다. 운전을 주로 하고 다니던 그녀는 걷는 것을 무척 힘들어했다. 그래서 벤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앉아서 쉬었다 다시 거닐기도 했다. "많이 힘들어?" 그녀에게 음료수 캔을 건네며 그 남자가 물었다. "응, 오랜만에 자기 때문에 많이 걷는 것 같아." "그래?" "응, 그냥 우리 집에 갈까?"  그 남자는 조용히 웃는다. "유현승?" 그 남자가 돌아보자 송우현이 보인다. "어, 우현아." 그 남자는 송우현에게 그녀를 소개한다. 송우현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곧잘 친해져서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 그의 재주 때문인지 그녀도 마음을 놓고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 남자는 그런 그들을 보다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멈췄다. 화단을 지나 걸어가는 한 쌍이 보였다. 성숙해보이는 남자에 비해 여자는 너무 어려보였다. 그 여자는 김서원이었다.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정스레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서로 닮아보였고,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그 남자는 순간, 쇳덩어리 하나가 쨍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너무나 반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김서원의 모습에 묘한 슬픔같은 같이 일었다. 뭔가 소중하게 다가왔던 것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많은 책을 들고 나타났던 김서원의 모습이 눈에 선했고, 타지마할 모형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던 모습도 떠올랐다. 지금 자신 앞에 보이는 김서원은 그래서 신기루 같았다. 사무치도록 절실한 그런 신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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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승은 서원이 앉은 자리 옆에 그녀의 책들을 놓아둔다.  낯이 익다.  "뭐 좀 마실래요?" 그의 말에 잠시 고개를 들고 메뉴판을 훑는 그녀의 눈길이 재빠르다. "유 현승 씨는요? 뭐 마셨어요?" 그 녀는 책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자신의 가방 앞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든다. "아, 아니요. 저는 오시면 같이 마시려고..." "그래요? 그럼 제가 사드릴께요. 뭐 드실래요?" 그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도 일어선다. "제가 살게요, 서원씨 뭐 드시고 싶으세요?" 일어나서 보니 이 '김 서원'이라는 여자, 정말 작구나 싶다. "전 바닐라 라떼 좋아해요." 그 남자는 서원에게 앉아있으라는 뜻으로 어깨를 잠시 잡는다.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으나 서원이 흠칫 놀라는 것 같아 카운터로 걸어가던 그 남자는 잠깐 그녀를 돌아본다. 그녀의 어깨가 참, 작다 싶다.  그 여자는 앉아서 책을 정리한다. 마음에 드는 책들을 이것저것 고르다보니, 비용은 그렇다치고 들고 갈 일이 걱정이다. 더구나 알바가 끝나고 밤을 샌 아침이라니...잠시 깊은 숨을 내쉰다. 괜찮아, 김서원. 언제나 있는 일은 아니잖아. 커피를 든 현승이 돌아오자 그녀의 생각이 멈춘다.  "바닐라 라떼, 맞죠?" 현승이 컵을 건넨다. "네, 감사합니다." 그 여자는 뚜껑을 열어 한 모금을 마신다. "아, 참... 이거요." 서원이 그제야 짐이 준 물건을 그에게 건넨다. "짐 아저씨가 보냈어요." 짐에 대한 그녀의 표현이 참 친근하다. "네..." 그 남자는 백 속에 든 물건을 꺼내 포장을 뜯어낸다. 상자 속에 든 타지마할 모형이었다. "타지마할이네...." 서원의 말에 현승이 그녀를 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 말없이 웃는다. 현승은 타지마할을 보며 그 밤을 생각하고, 서원도 자신이 방문한 그 때를 떠올린다. 그 남자의 휴대폰이 울린다. 그녀다. 그 남자는 불현듯 서원을 바라본다. 커피컵이 서원의 얼굴 반을 덮었고 그녀의 눈만 손톱 달처럼 웃고 있다. 그 남자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만난지 30분도 되지 않은 이 작은 여자가 그 카트녀와의 만남보다 더한 행복을 느끼게 했다. 외려 지금 전화를 주고 있는 그녀가 갑자기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섰다. 그러나 그 남자는 전화를 받았다. "응..."  서원은 타지마할 모형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현승의 시선은 그런 서원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서원은 손도 작았다. 도데체 작지 않은데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럼...이따가 보자..응...." 현승의 통화가 끝나자 서원이 시계를 본다. "이제 짐 아저씨 심부름도 했으니까 가볼께요. " "벌써요?" 서원은 말없이 상자 속에 모형을 넣어준다. "좀 있다 알바가 있어서요. 커피 잘 마셨습니다." "알바요?" 현승이 되묻자, "편의점이요, 야간..." 답변을 하며 가방을 메던 그녀의 말이 끊어진다. 잠시 두 사람은 몇 초동안 뚫어져라 서로를 본다. "혹시..." 그렇게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한다. "그 알바..."  "그 손님..." 언어는 다르지만 또 같은 순간 말을 내놓는다. 그러더니 소리내서 웃어버린다. "아, 그 분이셨구나..." "아, 거기 계시는구나..." 현승은 그녀의 담배를 사러 들렀던 편의점의 그 머리젖은 소녀를 떠올리고 좀 챙피한 생각이 든다. 서원도 비를 맞고 걸어가던 그의 생각이 나 좀 챙피한 생각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승이 애인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서원은 조금 쓰게 웃었지만 현승은 이 작은 여자로 인해 이상한 평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다. 어느새 이 작은 여자가 현승의 마음 속에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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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자는 알람 소리에 어렵사리 눈을 떴다. 밤중에 비까지 맞은 데다 여행 후 알바 복귀 첫 날에, 시차로 인한 피곤까지 그녀의 컨디션을 괴롭혔다. 여행 전까지 기껏해야 5시간을 채우던 수면 시간이 6시간 반으로 늘어났다. 일단 누운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컴퓨터를 켰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짐이 부탁했던 일을 실행하기 위해 그 여자는 이 메일을 보냈었다.  

 "자, 이걸 가져가라고." 짐은 그 여자에게 잘 포장된 상자를 넣은 백을 건넸다. "저한테 주시는 거에요? " 그 여자가 너무 좋아하자, 짐은 외려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친구한테."  그 여자는 급 실망한 표정을 짓다가 그저 웃어버렸다. "그냥 만나면 어색할 테니까." 그 여자는 도데체 짐이 왜 자기와 그 사람이 만나는 것에 연연할까 싶었다. "짐, 제가 꼭 그 사람을 만나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그 여자가 묻자 짐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날 위해서 꼭 만나줘."  

 그 여자는 애써 자기는 짐의 선물만 갖다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짐이 상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스스로 다짐 비슷한 걸 해본다.  

 그 남자는 누운 채로 노트북을 켰다. 아픈 건 아니었지만 비를 흠뻑 맞으며 밤새 집까지 걸어온 탓에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짐으로부터 이메일이 와있었다.  

 '안녕, 잘 지내고 있지? 나도 여기 캐나다에 무사히 도착했어. 그동안 우리 아들이 너무 보고 싶었는데 나와 만나지 못하는 동안 많이 커있더라구. 아들도 나를 만나 너무 행복해했어. ...그리고 한국에 가자마자 걸프랜드가 생겼다구? 흐음...현자같던 네가 가자마자 그렇게 됬다는 것에 일단 딴지를 걸고 싶다. 어쨌든, 여기서 만났던 한국인소녀에게 선물을 하나 보냈어. 곧 연락을 할 거야. 내 선물이나 받으라구. ' 

 그 남자는 피식 웃어버렸다. 외국인들은 남의 개인사에 그닥 관심을 갖지 않는다던데 짐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짐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고, 그의 말을 안 들을 수 없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때, 그 남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자 목소리다. 짐이 부탁한 선물을 갖고 왔다던... 그 남자는 그녀와 곧 만날 약속을 잡는다.  

 그 여자는 오랜만에 헌책방에 들른다. "아저씨!" 노트북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아저씨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이구, 오랜만이네!" 그 여자도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한다.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그렇지.. 여행은 좋았어?"  "그럼요." 그 여자는 자신이 갖고 있던  종이 백중 하나를 꺼낸다. "자, 아저씨 선물이에요." "이게 다 뭐야?" 아저씨가 종이백에 든 상자를 열어본다. "인디안 스윗이에요. 우유랑 맹고랑 같이 넣고 만든거라 많이 달지도 않고, 맛있어요. " 작은 조각을 집어들어 입에 넣어본다. 아저씨의 표정이 더욱더 밝아진다. "오~ 딱 내스타일인데. 고맙다." 그 여자는 아니라고 말하며 책을 둘러본다. "좋은 책 좀 들어왔어요?" 아저씨는 다른 조각 하나를 입에 넣는다. "그냥 그렇지 뭐. 한번 골라봐." 그 여자는 찬찬히 책들을 둘러본다. 여행으로 팔다리 아닌 눈과 귀가 바빴다면 이제는 뇌를 채우고 싶었다.  

그 남자는 그녀와 만날 약속을 미루고 그 여자가 말한 카페에 앉아 있다. 짐이 얘기한 사람이 도데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고 또 선물이 궁금하기도 했다.  언뜻 본 시계가 약속시간 5분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때 카페 문이 열렸다. 무거워보이는 가방을 메고 손에도 종이백 하나와 책두서너권이 들려있었다. 정말 평범해 보이면서 활력 있어 보이는 자그마한 여자였다.  

 카페에 들어서자 마자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힌 지도 모른 채 휴대폰을 집어든다. "여보세요..." 들려있던 책들이 미끄러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턱으로 휴대폰을 괴면서 책들을 이리저리 줍는다. "네, 오셨나요?" 그 때 어떤 손이 그녀가 주체할 수 없는 책들을 다 주워든다. 그 남자가 말없이 그 여자의 책을 주워들자 그제야 둘은 만난다. 그 여자가 조심스레 묻는다."유 현승씨?" 그 남자가 그 여자의 얼굴을 본다. "네, 제가 유 현승입니다. 김 서원씨 맞으시죠?" 그 여자는 먼저 미소를 짓는다. "네, 제가 김 서원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둘은 악수를 했다. 그 남자는 그 여자의 손이 따뜻하다 느꼈고,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손이 솥뚜껑처럼 자기 손을 덮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는 그 여자의 미소가 참 따뜻하고 활기차다 느꼈고, 그 여자는 그 남자의 미소가 참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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