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은 자전거를 달려 서원의 집까지 왔다. 온 몸이 비맞은 듯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건 조금 있으면 서원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가 대신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짐의 선물 이후 두 사람은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없었다. 현승이 그녀를 찾아가는 그 시간에 서원은 편의점에 있었고, 그녀는 그에게 따뜻한 커피를 대접했었다. 그녀가 편의점에서 퇴근하는 그 시간부터 그녀의 일상이 궁금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너무 애틋해지는 데 어리둥절해 자신의 마음을 아꼈다. 그러나 그건 서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여보세요?"

"......"

분명히 신호음이 갔고 전화를 받는 기척도 있었지만 건너편에서는 침묵만이 돌아왔다. 현승은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고 다시 물었다.

"...여보세요? 서원씨?"

"....네...."

현승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돌았다. 그녀였다. 김 서원.

"...잘 지냈어요?"

그리움이 북받혔다. 그러나 내색할 수 없었다. 어차피 목소리뿐인 지금인 걸...

"....네..."

그렇게 말없이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걸었다.

"...편의점은 계속.."

"...그동안 잘 지내..."

그리고 두 사람은 웃었다. 분위기가 조금 편안해 졌다.

 "어디세요?"

현승이 물었다.

"저요?"

"네."

서원은 다시 말이 없었다.

"...서원씨?"

현승이 재차 묻자 그제야 목소리가 들렸다.

"... 여기요..."

"네?어디요?"

"...현승 씨 뒤요..."

현승이 돌아보자 100미터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서 서원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보는 서원의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여긴 어쩐 일로...?"

서원의 말에 현승은 그저 웃었다. 참 어색했다. 그러나 싫지 않았다.

 "...생각이 나서..."

현승의 말에 서원도 웃었다. 서원의 손에는 책이 든 가방이 들려있었다.

"책 사셨어요?"

"네..."

"들어 드릴께요."

현승은 서원이 뭐라 말 할 새도 없이 가방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과 그녀의 손이 닿았다. 그의 손은 땀에 젖어 있는지 끈적끈적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손은 역시나 작고 찬 기운이 돈다고 그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또 그렇게 말없이 서 있었다. 서원은 그의 모습과 자전거를 보고 방금 전까지 떠올랐던 꿈을 떠올렸고, 현승은 지금의 상황이 주는 떨림과 행복에 겨워 서 있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다. 만약 꿈이라면.... 깨기 전에 말하자...

 "할 말이..."

 서원의 눈이 그를 주시했다.

 "할 말이... 있어서..."

 그제서야 서원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눈 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늘이 깊이 진 터라 벤치는 시원했고, 공원 울타리를 점령한 장미는 이제 막 봉우리를 터뜨리는 참이라 장미향이 은근히 풍겨왔다. 그리고 진녹색 잎을 배경으로 빨간 장미가 대조를 이루어 진풍경을 이루었고, 엄마따라 산책 나온 꼬맹이들이 아장 아장 걷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으며 같이 웃고, 같이 그 시간을 즐겼다.

 "....만약에..."

현승이 입을 열었다.

 "..만약에...서원씨랑 내가요..."

서원이 현승을 돌아봤다. 현승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척 그녀와 눈을 맞췄다.

"이렇게...인사만 하는 사이에서...쪼금 더 가까워지면..."

서원의 눈빛도 흔들린다. 현승은 더이상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나간다.

"그럼...부담스러우세요?"

일순 그들 사이에서 묘한 침묵이 흐르고 그들은 약간 긴장한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현승은 그 순간의 침묵이 꼭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그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또다시 장미향이 그들을 중심으로 진동하는 듯 했고 서원은 현승의 귓전에서 흐르는 맑은 땀방울을 보았다.

"...아니요..."

서원은 짧게 한 마디를 했고 천천히 고개를 드는  현승과 눈을 맞췄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현승은 가만히 서원을 안았다. 서로를 바라는 마음이 서로를 편안히 받아들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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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은 그녀를 잊기로 했다. 자신의 추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비치느니 차라리 그녀를 모르는 척 살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앞섰던 것이지 시작한 건 아니지 않은가. 책이 든 가방에 수건과 물병 등을 챙겨 넣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서원은 이제 막 정산을 끝내고 편의점을 나섰다. 어느 새 초여름 만큼의 햇살이 비쳤다.

'올해는 노래도 못 부르고 4월을 보냈구나...'

 서원은 정류장까지 걸으며 나직이 노래했다.

 "어느 새 하얀 꽃 씨를 날리는 4월의 바람이 내 앞에

 노란 민들레는 하늘 바라보고 졸리운 강아지 눈을 감네

 아지랑이 피고 멀리 기차 소리 골목길 꼬마들 노는 소리

 연못 속에 잠긴 겨울 낙엽들, 그 위로 4월이 맑게 비췬다.

 빠알갛게 핀 꽃 속에 새 봄이 가득

 겨우내 말랐던 가지가지마다 푸른 4월이

 새들이라도 노래를 해야지 하얀 나비 춤추는

 푸른 4월에

                                                             -홍순관'4월'"

 밤을 새고 가는 길도 그 날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버스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보며 그 노래를 계속 흥얼거렸다. 그래, 그렇게 지나간 4월처럼 그렇게 지나가는 거야. 감정도, 시간도. 그렇게 보내는 거지. 미련 가질 이유도, 그 어떤 이유도 없어. 그냥... 웃으면 되지. 아직.. 깊이 알고 멀리 보기에는 아직 어리니까... 그녀는 차창 밖을 보는 내내 그저 웃었다.

 

 현승은 모든 통학을 자전거로 했다. 학과에서 장려하는 모든 자격증을 따내려면 잠도 줄여야 하는 지금, 그나마 통학 시간을 늘려서 운동 겸 자전거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바쁜 스케줄은 그나마 그가 자신을 지켜낼 수 있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멈출 때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버렸다. 끊어내지 않으면 결국에는 눈물 짓고 말거야.... 무심결에 중얼거린 말을 그는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래...그렇게 눈물 짓고 말거야...'

그러나 그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끊어내지 못했다.

 

서원은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한동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커튼은 강해진 햇살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녀도 예전처럼 4시간 정도의 수면 뒤에는 가뿟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12시 반을 조금 넘은 시간.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어제 월급이 들어와서 출근 전 대형 서점에 들를 생각이었다. 책을 사는 것은 다른 데 관심없는 그녀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사치였다. 그녀의 눈이 책 더미에 문득 머물자 그녀는 모든 행동을 정지했다. 헌책방에서 지난 번에 사두었던 책들. 그리고 그 책을 가지고 카페에 들렀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의 마음에서 퍼즐 조각 하나가 '틱'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방을 나와 버렸다. 지나간 일이야. 이미 지나간 바람이라고...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야기하며 그녀는 집을 나섰다. 햇살에 눈이 부셔 일순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이미 강사는 교실을 나갔고, 다른 사람들도 분주히 짐을 챙겨 나가려고 했다. 잠시 졸은 것이다. 자전거로 통학하는 그에게 오후 강의는 쥐약이었다. 그도 자신의 짐을 챙겨서 강의실을 나왔다. 점심도 먹지 않고 학교에서 학원으로 곧장 온 터라 허기가 졌다. 다음 강의까지 아직 40여분간의 시간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현승의 눈에 그녀는 꼭 서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서원이 아니었고, 순간 그는 자신이 드디어 미쳐간다고 헛 웃음을 지었다. 라면을 넘기며 그는 그녀에 대한 잔상들을 꼭 꼭 넘겨버렸다. 아니야, 나는 괜찮아. 괜찮고 있잖아. 그는 혼잣말이 늘었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지 말자. 무슨 짓이야 정말... 상사병도 아닌게...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더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 먹는 것도 지금 사는 것도 지금 숨쉬는 것도, 더이상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고, 생각 속의 그녀가 숨쉬는 만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신간 코너를 돌던 서원은 한 여행 책자 앞에 그려진 자전거 앞에 시선을 두었다. 오직 자전거 뿐이었다. 그리고 그라데이션 처리를 한 주위 풍경이 그 자전거와 잘 어울렸다. 책의 제목이나 내용이 눈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 그저, 그 자전거가 눈에 띄어서 그녀는 한 참이나 그 자전거를 보았다. 그리고 불현듯 얼마전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뜰과 자전거, 온기가 돌았던 그의 등...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뱉어냈다. 한 번의 숨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며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 속에 빈 자리들이 늘어가는 것 같았고 그 빈 자리를 따뜻한 눈물이 채워버리는 듯 했다. 그리고 아팠다. 그녀는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 속의 그가 들이마시는 숨만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시간들이 지나고, 서원은 결심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굳이 잊으려고 하지 말자.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면 마음에 담아두자. 거짓말이 아니라면 고백하자. 아직, 나는 내 마음을 외면할 만큼 강한 사람은 못 된다.

 

 현승은 그 길로 학원을 나왔다. 아직 시작도 안했다. 그렇다면 지금 시작하면 되는 거다. 그녀가 진실을 알려한다면 속이지 말자. 늘 정직하자. 일단 그렇게만 생각하자. 그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의 작은 손과 달같은 눈빛이 오버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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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은 계산을 하고 매장을 청소하고 책을 읽는 중간 중간 밖을 내다 보았다. 일주일 째, 현승은 나타나지 않았다. 밤마다 와서 커피 한잔에 사소한 대화들을 나누다 가고, 아침 퇴근 무렵, 자신을 만나러 와주었던 그가 이제는 그녀의 낙이 되다시피 했는데, 별안간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혹시 말실수라도 한 건 아닌지, 아니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행동으로 그를 불쾌하게 한 건 아닌지 서원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어떤 경우도 생각나지 않았다. 현승도 서원도 서로의 휴대폰 번호를 알고 있었으나 서원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했다. 여러번 문자를 적고 또 적다가 보낼 용기를 잃곤 했다.

 

 현승은 맞은 편 공중 전화 박스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 대한 자기의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강했지만, 그녀와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녀를 만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다. 자신만 생각하고 그녀를 만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옆에 서기에는 자신이 너무 혐오스럽다고 느꼈다.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그는 그곳에서 나와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과 입, 작은 키, 책을 든 손... 그 모든 것들이 조각처럼 떠올라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일으켰다. 그는 그 모든 잔상들을 떨쳐낼 생각도 않은 채 그저 걷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또 한 주가 흘러갔다.

 

  부엌 쪽에서 또 두런 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넷째 주 토요일, 오늘은 오빠도 엄마도 일을 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원은 잠시 누워 있다가 손을 뻗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시.아침에 들어와서 잠이 들면 꼭 이 시간 쯤 깨는 듯 했다. 서원은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일어나서 풀어헤친 머리칼을 잡아 묶었다.

 "일어났어?"

오빠와 엄마는 늦은 점심을 준비하고 있던 것 같았다.

 "뭐야?"

 채썰어 놓은 오이를 집어 먹으며 그녀가 묻는다.

 "오랜 만에 비빔국수 하려고. 매운 게 땡겨서 말야."

엄마가 삶아 놓은 국수를 그릇에 담으며 말한다.

 "맛있겠다."

 "어서 가서 씻고 와. 같이 먹자"

 오빠가 엄마의 손을 도우며 말하자 그녀는 화장실로 향한다.

 

 복학을 하고 첫 번째 시험이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운 덕에 현승은 그럭 저럭 시험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동아리나 친한 선배의 뒷풀이 요청이 있었지만, 일단 현승은 밀린 잠을 자고 싶었다. 학교를 나서서 가던 길, 현승은 지나가던 사람에게 눈길이 갔다. 낯이 익었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더듬어 다시 떠올리던 현승은 그가 서원과 함께 있던 동행 중 하나라는 걸 알았다. 그는 그녀의 오빠의 후배라는 사람이었고, 그의 옆에는 잘 웃고 다정한 성격인 듯한 여자가 있었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그녀에 대한 잔상이 그의 호흡을 적셔놓았다.

 

 그 날은 햇빛이 따뜻했다. 오빠는 서원에게 같이 나가자고 했지만 서원은 그 햇빛을 느낄만큼 피곤이 다 풀린 건 아닌 듯하다고 말했다. 대신, 엄마가 서원 대신 오빠의 데이트 상대가 되어서 쇼핑을 하러 나가고 집에 혼자 남은 서원은 음악을 들으며 소파에 누워 있었다.

 'Such lie you've told to me. but  I'm willing to let it go. Could be you've tried before...'

 사람들은 식당 안에서 따뜻한 미역국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있었다. 그녀도 방금 먹은 국밥에 몸도 마음도 훈훈해진 듯했다. 그런데, 그 식당 문 밖으로 보슬비가 내리는지 운동장 같은 뜰이 젖어 있었고 어떤 사람이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그곳을 돌고 있었다. 자세히 보자, 그는 유 현승이었고, 서원은 그에게 '오빠'라고 했다. 현승의 얼굴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젖어있었고 눈은 맑았다.

"같이 탈래?"

 그의 손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입은 하얀 티에서는 온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그녀는 어느 새 그의 자전거 뒤에 타고 있었고, 그의 등에 가만히 기대어 있었다.

 

 눈을 뜨자, 이미 음악은 끝나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옆으로 몸을 틀었다.

'이상한 꿈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서원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떨어진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꼭 반으로 쪼그라든 것같은 이 기분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그는 고개를 두어번 젓고서 다시 잠을 청했다. 매일 자는 그 방이 그 날따라 추웠다. 그는 이불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덮어쓰고 생각의 끈을 끊어내려 했다. 그럼에도 그의 발끝에서부터 한기가 밀려왔다. 그 한기는 그를 심연속으로 데려가며, 그를 더욱더 외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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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 짐!

 그동안 잘 지냈나? 아들하고는 어때?지금도 간간이 너와 있었던 그 며칠을 떠올리고 있어.

 많이 늦었지만 지난 번 너의 선물 고마웠어. 처음에는 같은 남자한테 조각상을 보낸 게 이해가 안 되더라구. 솔직히 너와 난 만나지 얼마 안 됐잖아? (웃음)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네가 진짜로 내게 보냈던 건 눈에 보이는 그 조각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란 걸 알았어. 네가 그 조각상을 보냈던 메신저... 서원과의 인연 말이야...지금은 딱히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야.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그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거야.사실, 두렵기도 해. 무언가에 많이 오염된 듯한 내게 그녀는 순수함 그 자체라서. 

 

 "밤에 일하고 그러면 힘들지 않아요?"

 수저를 챙겨주면서 현승이 물었다.

 "힘은 드는데,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안 힘든 일 없잖아요."

 서원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하자 현승도 같이 미소 짓는다.

 "그래도 찾아보면, 낮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텐데. "

 "여러 가지 찾아는 봤는데, 여행 가고 책 사서 보고 저축도 좀 하려면, 이 일이 제일 나았어요."

  현승은 서원의 한결같은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초승달이 되는 그녀의 눈이 정말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여행 많이 가나봐요?"

 현승이 물었다.

"여행 가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은 많지 않아요. 여름하고 겨울 비수기 때 가는 여행인데, 가 봤자죠. 그런데, 앞으로 꾸준히 가면 가 본 곳도 여러 곳 되겠지요 뭐."

 서원의 말에 현승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여행, 나랑 같이 갈래요?"

국물을 떠마시던 서원의 숟가락이 흔들리고 국물이 옷섶에 흘렀다.

"어머, 어떡해~"

 허둥대는 그녀에게 현승이 냅킨을 주었다.

 "괜찮아요? 데인 데는 없어요?"

현승이 묻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녀가 좀 진정된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현승의 사과에 서원은 괜찮다고 한다. 서원은 다시 숟가락을 든다. 앞섶에 묻는 국물 자국이 신경 쓰이는 듯 자꾸 시선을 그 쪽에 둔다.

 "그런데...."

현승은 분위기를 전환 시키고자 화제를 바꾼다.

 "김 서원씨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그 말에 서원은 다시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유 현승 씨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데요?"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현승이 대꾸하자, 서원은 짓꿎은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얘기해주세요. "

 현승의 표정이 좀 더 환해진다.

 "저는, 지금 공부하고 있는 거 전공 살려서 일하면서 사회 복지 재단 같은 데를 설립하려구요. 빌 게이츠가 그랬던 것처럼..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그냥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

현승은 자신의 얘기에 얼마만큼의 현실성이 있을까 늘 고민했었다. 사람끼리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라고 했지만, 자신의 한 말이 정말로 진심에서 나온 이야기일까 순간 자신에게 되물었다.

 "와~ 멋진데요. "

 이 여자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혹시 눈치 채지는 않았을까?

"저도 유 현승씨랑 조금 비슷해요. "

"정말요?"

"네. 저는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거든요. 그래서 제 책의 인세가 나오면 세계 오지 여러나라에 학교가 없는 곳에 학교를 세우는 일을 하려고 해요. 만약 학교를 세울 수 없을 정도로 제 글 솜씨가 형편 없다면 어떤 곳이든 가서 그곳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려구요. 어떤 식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아이들이 배움의 기회를 갖고 글을 안다면, 그 아이들이 변화시킬 세상은 대단하지 않겠어요?"

고민하는 자신과 반대로 서원의 눈은 반짝 반짝 빛이 났다.결코 밤새 일하고 나온 사람같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자그마한 여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꿈의 크기에 현승은 진심을 넘어 압도당하는 희망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현승은 그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과 붉은 빛이 도는 두 뺨과 웃음을 머금은 입술, 그녀의 모든 것이 즉석 사진기에서 뽑은 것처럼 조각조각 오버랩 됐다.

 

 이제 알겠어, 짐? 그녀의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지... 단지 좋아하는 감정에 매여 혹시 내가 그녀의 꿈을 방해할까봐,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모든 목적의 방향키를 내가 바꿔버릴까봐 나는 그게 두려운거야.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내 자신을 순결히 지켜온 그런 사람도 아니고,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따를 만큼  박애 정신이 강한 사람도 아니야. 철저히 이기적이지. 오직 그녀만을 원하는... 짐, 어떻게 생각해? 그녀의 꿈을 위해, 내가 내 마음을 접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 내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걸까? 심지어 그녀를 보지 못하는 하루 반나절 동안에도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행복감을 느껴. 그런데, 만약, 이대로 그녀를 보지 못한다면... 고민하고 있어. 그리고 너의 조언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해. 사실, 나에 대한 그녀의 마음도 모르는데 이러는 게 좀 웃기기도 해. 나... 정말 우습지?

 아들에게 안부 전해줘. 또 메일 보낼께.

 한국에서

 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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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 현승은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7시. 새벽 3시에 들어와 네시간도 채 못 잤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 눈이 떠진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재촉하지 않았다면 그 남자는 편의점에서 밤을 샜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그 여자가 주는 안정감에 그저 앉아 있고만 싶었다.

 

그 여자 서원은 날이 하얗게 샐 때까지 그 남자와 주고 받았던 대화를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참 사소하기 그지없던 대화였지만 쳇기도 사라지고 밤사이의 피곤을 덜어낼 만큼 청량감을 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어느 새 사장이 들어와 있었다.

"나오셨어요?"

매장 거울을 닦던 서원이 돌아서며 웃는다.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싱글벙글이야?"

그 말에 서원은 `아니`라고 답하며 거울을 마저 닦는다.

"많이 피곤하겠다."

사장의 말에 또 그 여자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 여자는 마지막으로 냉장 식품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편의점을 나온다. 햇빛에 눈이 부신다. 약간 어지럽지만 눈을 한 번 감았다 뜬다. 그리고 꿈결처럼 자기 앞에 서 있는 그 남자를 본다. 처음에는 형체만 있는 실루엣 뿐이었다. 그러나 시야를 확보할수록 그의 모습이 뚜렷해졌고, 그 여자는 그런 그의 모습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그 남자가 먼저 인사하자 그 여자도 고개를 숙였다 든다.

 "여기는 어떻게?"

 "...졸리지는 않으세요?"

 그 남자의 말에 그 여자는 반사적으로 웃어보인다.

 "학교 가시는 길이세요?"

그 남자는 그 여자의 질문에 그냥 웃을 뿐이다.

 "집 어디세요? 가셔서 좀 쉬어야 할 텐데..."

 그 여자는 뭐라 말할 지 알 수 가 없다. 그런 그들 곁으로 몇 사람이 지나가고, 그들은 조금 더 가까워진다.

"사실은 김서원씨 아침밥 먹이고 집에 바래다 주러 왔어요.괜찮죠?"

그 여자는 이번에도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혹시.. 부담 스러우세요?"

서원의 침묵에 그 남자 현승도 조금 경직된 듯하다.

"아니요... 그건 아니구..."

사실, 서원은 뭐라 할 수 없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했다. 만약 현승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번에 거절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현승이 일부러 찾아와 준 것에는 기쁜 마음이 더 앞섰다. 그것이 스스로 당황 스러웠던 것이다.

"저쪽으로 돌아가면 콩나물 국밥 맛있게 하는 데가 있어요. 같이 가요."

 현승이 그 여자에게 말하며 서원이 메고 있던 가방을 강제로 빼낸다. 서원은 그가 하는 대로 그저 내버려둘 뿐이다.

 

 "정말 일부러 저 때문에 오신 거예요?"

 그의 말대로 정말 콩나물 국밥은 맛있었다.

 "네."

 솔직한 그의 말에 서원은 또 웃어버린다.

 "안 피곤해요? 새벽 두시에 나가셨잖아요."

 그 여자의 말에 그 남자도 웃는다.

 "제가 나갔나요? 쫓아내셨으면서..."

 그 말에 그 여자는 또 웃는다. 정말 사소한 대화지만 그들은 그들의 언어보다 더 많은 의미를 서로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분홍색 우산으로 머리 위로 내리는 보슬비를 걷어내고 있었다. 발목에서 느껴지는 비의 촉감이 외려 기분 좋게 폭신했다. 그 여자는 바로 앞에 보이는 카페로 걸어가고 있었다. 카페 앞에는 얼굴을 하얗게 칠한 검은 정장의 마네킹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한 사람이 앉을 수 있을 만큼의 자리가 있었다. 그 마네킹의 중절모와 정장입은 어깨가 비에 젖어있다. 그 여자는 그 마네킹을 훑어보다 그의 옆에 앉아서 우산을 같이 쓴다. 그 여자가 앉은 벤치는 편안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마네킹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사실 마임을 하는 남자였음을. 어느 새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고 그의 품에서 온기가 돌았다. 그녀가 올려다보자 그의 눈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 전체에 미소가 번져있었다. 얼굴이 하얘서 이상했을 법도 한데, 그 여자는 그의 얼굴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버스가 덜컹거리자 그 여자는 그제야 눈을 떴다.

"어머."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현승의 어깨를 베개 삼아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잘 잤어요?"

그가 묻자, 챙피한 듯 그녀가 얼굴을 가린다.

"깨우지 그랬어요."

그녀가 말하자, 그가 웃었다.

"너무 곤히 자길래... "

 서원은 너무 챙피했지만 곧 얼굴을 든다.

"졸리면 더 자요. 난 괜찮으니까."

 그의 말에 서원은 그저 웃으며 그를 올려다 본다. 그리고 곧 깨닫는다. 방금 전에 본 그 마임하는 남자의 편안한 얼굴이 바로 그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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