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계산을 하고 매장을 청소하고 책을 읽는 중간 중간 밖을 내다 보았다. 일주일 째, 현승은 나타나지 않았다. 밤마다 와서 커피 한잔에 사소한 대화들을 나누다 가고, 아침 퇴근 무렵, 자신을 만나러 와주었던 그가 이제는 그녀의 낙이 되다시피 했는데, 별안간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혹시 말실수라도 한 건 아닌지, 아니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행동으로 그를 불쾌하게 한 건 아닌지 서원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어떤 경우도 생각나지 않았다. 현승도 서원도 서로의 휴대폰 번호를 알고 있었으나 서원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했다. 여러번 문자를 적고 또 적다가 보낼 용기를 잃곤 했다.

 

 현승은 맞은 편 공중 전화 박스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 대한 자기의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강했지만, 그녀와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녀를 만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다. 자신만 생각하고 그녀를 만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옆에 서기에는 자신이 너무 혐오스럽다고 느꼈다.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그는 그곳에서 나와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과 입, 작은 키, 책을 든 손... 그 모든 것들이 조각처럼 떠올라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일으켰다. 그는 그 모든 잔상들을 떨쳐낼 생각도 않은 채 그저 걷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또 한 주가 흘러갔다.

 

  부엌 쪽에서 또 두런 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넷째 주 토요일, 오늘은 오빠도 엄마도 일을 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원은 잠시 누워 있다가 손을 뻗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시.아침에 들어와서 잠이 들면 꼭 이 시간 쯤 깨는 듯 했다. 서원은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일어나서 풀어헤친 머리칼을 잡아 묶었다.

 "일어났어?"

오빠와 엄마는 늦은 점심을 준비하고 있던 것 같았다.

 "뭐야?"

 채썰어 놓은 오이를 집어 먹으며 그녀가 묻는다.

 "오랜 만에 비빔국수 하려고. 매운 게 땡겨서 말야."

엄마가 삶아 놓은 국수를 그릇에 담으며 말한다.

 "맛있겠다."

 "어서 가서 씻고 와. 같이 먹자"

 오빠가 엄마의 손을 도우며 말하자 그녀는 화장실로 향한다.

 

 복학을 하고 첫 번째 시험이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운 덕에 현승은 그럭 저럭 시험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동아리나 친한 선배의 뒷풀이 요청이 있었지만, 일단 현승은 밀린 잠을 자고 싶었다. 학교를 나서서 가던 길, 현승은 지나가던 사람에게 눈길이 갔다. 낯이 익었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더듬어 다시 떠올리던 현승은 그가 서원과 함께 있던 동행 중 하나라는 걸 알았다. 그는 그녀의 오빠의 후배라는 사람이었고, 그의 옆에는 잘 웃고 다정한 성격인 듯한 여자가 있었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그녀에 대한 잔상이 그의 호흡을 적셔놓았다.

 

 그 날은 햇빛이 따뜻했다. 오빠는 서원에게 같이 나가자고 했지만 서원은 그 햇빛을 느낄만큼 피곤이 다 풀린 건 아닌 듯하다고 말했다. 대신, 엄마가 서원 대신 오빠의 데이트 상대가 되어서 쇼핑을 하러 나가고 집에 혼자 남은 서원은 음악을 들으며 소파에 누워 있었다.

 'Such lie you've told to me. but  I'm willing to let it go. Could be you've tried before...'

 사람들은 식당 안에서 따뜻한 미역국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있었다. 그녀도 방금 먹은 국밥에 몸도 마음도 훈훈해진 듯했다. 그런데, 그 식당 문 밖으로 보슬비가 내리는지 운동장 같은 뜰이 젖어 있었고 어떤 사람이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그곳을 돌고 있었다. 자세히 보자, 그는 유 현승이었고, 서원은 그에게 '오빠'라고 했다. 현승의 얼굴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젖어있었고 눈은 맑았다.

"같이 탈래?"

 그의 손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입은 하얀 티에서는 온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그녀는 어느 새 그의 자전거 뒤에 타고 있었고, 그의 등에 가만히 기대어 있었다.

 

 눈을 뜨자, 이미 음악은 끝나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옆으로 몸을 틀었다.

'이상한 꿈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서원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떨어진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꼭 반으로 쪼그라든 것같은 이 기분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그는 고개를 두어번 젓고서 다시 잠을 청했다. 매일 자는 그 방이 그 날따라 추웠다. 그는 이불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덮어쓰고 생각의 끈을 끊어내려 했다. 그럼에도 그의 발끝에서부터 한기가 밀려왔다. 그 한기는 그를 심연속으로 데려가며, 그를 더욱더 외롭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