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헤드 셋을 귀에 꽂은 채 민영과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는 씨익 웃어버린다. 민영도 그를 따라 웃는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수현은 헤드셋을 걸어놓는다,

 "아니."

 두 사람은 처음 데이트를 했던 대형 서점에서 다시 만났다. 수현은 그 때와 지금의 변화가 믿을 수 없으리만치 달라졌다고 느꼈지만 민영에게 내색할 수 없었다.

 "배 안고파?"

 수현이 묻자 민영은 또 씨익 웃는다.

 "고파요"

 "그럼 지난 번 갔던 그 집 갈까?"

 "네."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민영의 물음에 수현은 짧게 대답했고, 수현의 질문에 민영은 여러 말을 했다. 민영은 자주 웃었고, 수현은 민영과 자주 눈을 맞췄다.

 "그럼, 콘서트는 언제쯤 하는 거예요?"

 주문 후 물수건에 손을 닦으며 민영이 물었다.

"2주 후."

수현은 민영의 컵에 물을 따라준다.

"준비 많이 하셨어요?"

 민영의 물음에 수현은 그저 웃는다.

"콘서트 티켓 보낼께. 꼭 와."

 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음식이 나오자 수현은 수저와 젓가락을 들어 민영의 자리에 놓아 준다. 민영은 어쩔 줄 몰라 한다. 수현은 게의치 않는다. 민영이 그랬던 것처럼, 수현도 잠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기도라고 할 것도 없겠지만, 수현은 마음으로 소원하는 것을 간절히 구해보았다. 눈을 떠보니 민영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곧 알았다.

 "빨리 먹어. 따끈할 때 안 먹으면 소냄새 난다며. "

둘은 잠시 말이 없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웃어버린다.

 "다 기억하고 계셨어요?"

 민영은 기억을 더듬어 오늘 수현이 보여준 모든 행동이 처음 자신이 한 것들이었음을 깨닫는다.

"응. 다 생각나."

그들은 유쾌한 식사시간을 보냈다. 물을 마시다가 웃고 반찬을 집어주다가 또 웃고 심지어 먹을 때도 웃음이 나와 손으로 입을 가리기 일쑤였다. 수현은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많은지라 두 사람은 지나 다니는 사람들에게 자주 부딪혔다. 방금 지나간 사람이 민영의 어깨를 세게 치고 간 터라 민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어깨로 갔다. 수현의 시선이 그런 민영에게 닿았다. 수현은 민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민영은 또 흠칫 놀라 수현을 올려다 보았다. 눈이 마주쳤으나 둘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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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먹고 그는 탈진해 있었다. 누가 봐도 만신창이였다.

 "형... 좋아하는 음악 하는 건데... 뭐가 이렇게 힘들어요?.... 왜 사는 게 이렇게 힘들기만 해요..."

 그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방울이 그가 앉은 바닥과 무릎과 손을 적시고 어디선지 비도 오는 듯 그의 머리칼과 어깨를 적시는 것 같았다. 그의 어깨를 잡고,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고 싶었다.

 "형... "

 그의 눈에서 흐르는 건 피였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얼어갔다.

 

 "서준아!"

 꿈이었다. 수현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나 흐르고 있었다. 옆의 침대에서 자고 있던 지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새벽 3시. 두통이 밀려 왔다. 수현은 한쪽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화장실로 향했다.

 '한동안 꿈도 안 꿨는데...'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민영은 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자전거, 그리고 두 사람... 잊어버릴 만하면 그 꿈을 꾸었다. 윤서준은 정말, 그렇게 재은을 데려간 걸까? 자전거 뒤에 태우고... 자살하면 갈 곳은 지옥이라던데, 윤서준도 재은도 그렇게 함께 자건거 타고 간 걸까?

 '바보같이...'

 눈물이 난다. 민영은 무릎을 감싸안고 얼굴을 묻어버린다.

'바보같이...'

생각만 해도 싫은 결과다. 민영은 가슴끝이 아려와 깊은 숨을 내리쉬었다.

 

 잠을 설친 바람에 입안이 꺼끌거렸고 신경이 곤두섰다. 콘서트 기획 회의가 있었고 수현은 아침도 거른 빈 속에 커피를 계속 마셔댔다. 바로 앞에서 회의를 주도하는 강시현이 이런 저런 의견을 물어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이 얼굴에 먼저 일었다. 그런 그와 그녀를 보고 안절 부절 못하는 지훈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정말 불편한 시간이 흐르고 겨우 회의가 끝날 즈음, 연거퍼 마신 커피로 속에서 신물이 치받아 올랐다.

 "지훈아"

 지훈은 수현의 안색이 안좋은 것을 보고 먼저 인상부터 쓴다.

 "나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집으로 가야할 것 같아."

 "몸이 안좋은 거야? 이따가 강시현씨가 섭외한 투자자들이랑 저녁 하기로 했다는데?"

수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니야, 나 거기 못 가. 이 상태로는 안 만나는 게 나을 거야."

 지훈은 전화를 걸어 수현의 상태를 알린다.

 "알았대. 가서 쉬어. "

 이미 수현은 그 자리를 뜨고 난 후였다.

 

 집에 도착한 수현은 현관 앞에서 못보던 화분들을 발견했다. 붉은 점토로 빚은 듯한 화분에 물감으로 그린 듯한 어린아이 그림들이 있었고, 금자란이며 페퍼민트 같은 식물들이 싱싱하게 자라 있었다.잎 위로 방울이 진 물이 보였다.

 '왔다 갔구나.'

 어느 새 수현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화분들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보고 싶었다.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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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이이이이이-.

 민영이다.

 "안녕하세요?"

 집 안으로 들어서던 민영은 무언가 다른 분위기에 우뚝 서 버린다. 매일 부스스한 모습에 티셔츠와  긴 파자마바지 차림이던 수현이 이미 면도까지 마친 깔끔한 상태에 외출 준비를 한 듯한 복장 때문이었다.

 "우와~. 이렇게 일찍 어디 가세요?"

 민영의 말에 수현은 웃는다.

 "아니, 너랑 아침 먹으려고."

 부엌 식탁을 보고 민영은 또 한번 놀란다.인제 만들어낸 계란 후라이와 베이컨, 토스트와 커피까지 한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침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민영은 할 말을 잃은 듯 그 식탁만 보다가 수현을 돌아보았다.

 "앉아. 보기만 하지 말고."

 수현이 자리를 권하자 그제야 민영이 앉는다.

 "아침에 빵 괜찮아? 내가 밥을 잘 못해서..."

 수현의 말에 민영이 손을 내젓는다.

 "아니에요. 저도 빵 좋아해요."

 "그래?"

 수현은 민영의 잔에 원두커피를 붓고 우유도 조금 붓는다.

 "시럽 좀 넣을래?"

 메이플 시럽을 권하자 민영이 고개를 젓는다.

 "빵에 잼 발라서 커피는 그냥 쓰게 마셔요. "

둘은 그제야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민영의 식사가 나무랄 데 없었지만, 오늘 수현의 아침은 정말 훌륭하다고 민영은 생각했다.

 "맛있어요."

 민영의 말에 수현이 웃는다.

 "그래? 많이 먹어."

 식사가 끝나고 수현은 민영이 오면 하던대로 자기가 손수 물을 끓여서 국화차를 내온다. 민영은 그런 수현의 행동이 어리둥절 하다.

 "선생님."

 "응?"

 민영은 잠시 뜸을 들인다. 국화차 향이 좋다.

 "무슨 일 있으세요?"

 "왜?"

 "...그게... 뭔가 다르신 거 같아서요... 아침도 준비해주시고..."

 민영의 말에 수현은 잠시 국화차 한 모금을 마신다. 처음에는 향만 맡고 끝내 마시지 못하던 차였다. 이제는 하루에 꼭 한 번은 마시게 된 차다. 주민영 덕분에.

 "민영아."

 민영은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한다. 수현은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이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내가 얼마 후면, 콘서트를 하거든."

 "네..."

 수현은 다시금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민영도 그를 따라 한 모금 마신다.

 "그래서 합숙을 할 거야."

 "그럼... 댁에도 못 들어오시겠네요. "

 그말에 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젠 네가 여기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아. "

 애인 되주기 소원을 시작하고 약속한 100일 중 50일이 훌쩍 넘어 있었다. 다른 날은 콘서트 준비로 합숙하고 연습하면 그저 흘러버릴 것이다.

 "그럼... 저 이제 피아노도 못 배우는 거예요?"

 그 말에 수현은 잠시 망설였다. 마주 앉아 기다리기에 조금 긴 시간이 흘렀다.

 "그건... 시간 되면 해 줄게."

 언제 시간이 될 지... 어떻게 기회를 만들지 알 수 없었지만, 수현은 그렇게라도 지금의 미안한 감정이 드는 걸 추스리고 싶었다. 반면, 어두웠던 민영의 얼굴은 다시 환해졌다.

 "그럼... 전화 주세요."

 민영은 국화차 한 잔을 다 마시고 자리를 뜬다.

 

  실내는 결코 정숙하지 못했다. 홀에 모인 여중생들은 내내 웅성웅성 소리를 냈고, 몇 몇 학생들은 들락 날락 하기까지 했다.

 "시끄럽다 참... 그지?"

 옆의 재은이 민영에게 속삭이자 민영은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입에 댄다. 이제 막 누군가가 또 등장한다. 피아노 앞에 앉기 전 그가 인사하자 박수치는 무리 따라 민영도 박수를 친다. 뿔테 안경 빼고는 아무 것도 인상적일 수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남자 였다. 그러나, 그가 피아노를 치는 순간, 웅성대던 소리가 없어졌다. 그렇게 한 곡을 끝내고, 여중생들은 또 한번 박수를 쳤다. 앞 전까지 그저 치던 박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때, 윤서준이 등장했다. 여중생들은 이제 소리까지 질러댔다.

 "반갑습니다. 윤서준입니다. "

 그는 앞서 피아노를 치던 그 뿔테안경 연주자가 치는 선율에 맞춰 그의 노래를 불렀다. 재은과 민영은 그 피아노 연주자가 그가 지금 부른 노래의 작곡자 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됐다.

 콘서트 후, 재은과 민영이 밖으로 나오자, 아이들이 뭉텅이로 모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윤서준이었다.

 "재은아, 넌 사진 찍으러 안 가?"

 재은은 고개를 저었다.

 "사진 찍으려다가 밟혀 죽겠다."

 그말에 민영이 의아해 한다.

 "웬일이야? 네가 윤서준을 마다하고?"

 사실 민영은 재은의 부탁으로 부모님 카메라까지 빌려온 상태였다. 그 때였다.

 "저기요..."

 또래만한 같은 중학생이었다.

 "저희 사진 좀 찍어주세요. "

 그가 카메라를 내밀자 얼떨결에 카메라를 받아들고 민영이 그들을 따라왔다. 그 곳에는 몇 몇의 여중생들과 아까 그 피아노 연주자가 함께 있었다.

 "하나, 둘, 셋."-찰칵!

 그렇게 두어 번을 찍어주고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민영도 자기 가방 속에서 카메라를 꺼내 그 여중생에게 건네준다.

 "저희도 찍어주세요. "

 민영은 순간 눈이 마주친 그 연주자와 인사하고 재은과 그의 곁에 선다.

 "하나, 둘, 셋."-찰칵!

 10년 전. 그렇게 민영과 수현은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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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늦은 저녁, 민영은 늘 오던 시간보다 늦게 왔다. 피곤에 젖은 듯한 모습에 마음이 쓰였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선생님, 오늘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실래요?"

 민영은 자기 가방에서 MP3를 꺼내서 틀고 이어폰을 건넸다.

 "뭔데?"

 "일단 들어봐요."

수현은 그렇게 노래를 들었다.

 "그거, 제가 4월이면 늘 혼자서 부르는 노래 거든요. 선생님 그거 피아노로 쳐주실 수 있으세요?"

 수현이 아무 말없이 민영의 얼굴만 보고 있자, 민영은 어쩔 줄 모르는 듯 얼굴을 붉힌다.

 "뭐... 부담스러우시면, 안 하셔도..."

 그 말에도 아무 말이 없자, 민영은 MP3를 챙겨 가방에 넣는다.

 "아니..."

 수현은 그런 민영을 막는다.

 "해볼께."

수현은 민영에게서 다시 음원을 받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민영은 부엌에 들어가 물을 끓인다.

금새 집 안에 국화향이 퍼진다.

 '어느 새 하얀 꽃 씨를 날리는 4월의 바람이 내 앞에...'

 민영이 그의 옆에 앉았고, 기분 좋은 국화향에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수현은 피아노를 쳤다. 짧은 곡이었지만, 손에 익은 대로 화성을 달리 해 그렇게 세 번을 쳤다. 민영은 내내 눈을 감고 그 곡을 감상하고 있었고, 수현은 그녀가 우려낸 국화차 향보다 더한 향이 그의 주위에서 뿜어내는 것 같음을 느꼈다.

 

 강시현은 수현의 콘서트를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외려 그의 콘서트를 위해 외부 투자자를 늘렸고, 기획에서 연출까지 욕심내서 좋은 것들을 골라냈다. 오래 같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잠깐씩이라도 자주 부딪히는 터라 수현은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지훈도 중간에서 안절 부절 못하고 있었다.  

 "너한테 그 사람, 어떤 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일은 일이지 않냐?"

 연습실로 수현이 부탁한 톨컵 사이즈 라떼를 들고 찾아온 지훈이 그의 눈치를 보고 운을 뗐다.

 "뭐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수현은 모르는 척 했다.

 "강 시현 씨 말이야. 볼 때마다 벌레 씹은 표정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수현은 말없이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너 콘서트 잘 해 보겠다고 외부 투자자들 섭외하고, 당일 일정도 잘 셋팅하는 것 같던데."

 "누가 뭐라고 했어?"

 그가 조용히 쏘아붙이자, 지훈은 잠시 입을 닫았다.  

 "참, 지난 번 너희 집에서 먹었던 밥 생각 나더라."

 화제를 바꾼 지훈의 말에 수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래?"

유순해진 그의 답에 지훈의 경직된 표정이 풀리는 듯 했다.

 "궁금했던 건데, 그 밥 네가 한 거야?"

지훈의 물음에 수현은 희미하게 웃을 뿐 말이 없다.

"뭐야? 너 아니구나. 누구야? 그 우렁각시."

그 말에도 수현은 댓구가 없다.

 지훈이 가고, 수현은 민영이 부탁했던 곡이 떠올라 다시금 연주하기 시작했다. 민영을 만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녀가 메꿔주는 잠깐의 저녁 시간이 일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처음에는 귀찮고 부담스러웠던 그 시간이 이제는 외려 행복하기까지 하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 때, 연습실 문이 열리고... 강시현이 들어섰다. 

 "곡 괜찮네. 직접 쓴 거야?"

 수현은 댓구하지 않고 그녀를 응시할 뿐이다.

 "정말 여전하다니까. 사람 무안하게 쳐다만 보는 거."

 시현이 커피 컵을 내밀었으나 수현은 받지 않는다.

 "당신 좋아하는 메이플 시럽 라떼야. "

 그 말에도 미동도 않는 수현을 보고 시현은 컵을 피아노 옆에 내려 놓는다.

 "수현 씨가 지난 번에 나랑 한 이야기 중에... 사실 아닌 것도 있어."

 그렇게 말하며 시현은 맞은 편 의자에 앉는다.

 "나... 수현 씨 아이... 지운 거 아냐."

 시현은 한 호흡 쉰다.

 "그 때 결혼은 무리였지만... 수현 씨를 사랑했던 것 보다 내 일이 중요한 건 아니었어. 그리고 아이는... 그냥 낳아서 기르려고 했어. 믿기 어렵겠지만..." 

 수현도 심호흡을 가만히 한다.

 "그런데... 아이 놓쳤어. 수현 씨한테 말하기도 전에... "

둘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말... 왜 하는거야?"

수현의 물음에 시현이 그를 똑바로 본다.

 "나,수현 씨 사랑했다고. 수현씨가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수현 씨가 생각하는,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리고...나 아직도 수현 씨 좋아."

 수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본다. 한 번도 그녀를 잊어본 적 없었다. 윤서준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그녀에 대한 그리움도 때때마다 물밀듯이 밀려온 적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현실로 다가온 그녀와의 재회가 왜 추억만큼 간절하지 않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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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현은 그녀와 마주 앉아 있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그녀와 달리 수현의 잔은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시는 그녀를 볼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이별을 통보하고 떠났던 그녀도 10년동안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자신 앞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 건지. 하루도 그녀의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하루도 그녀를 잊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날이 없던 그였다. 10년이 흐르고, 이제 막 조금씩 윤서준에 대한 기억도 그녀의 기억도 사라지려고 하는 지금, 왜 그녀가 다시 신기루처럼 나타난 것인지... 분노는 아닌데, 자꾸 분노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 꿀꺽 꿀꺽 삼켜버렸다.

 "여전하네, 사람 그렇게 쳐다보는 거. "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안하잖아. 그렇게 보고 있으면. "

 "너, 뭐야?"

 수현의 말에 그녀의 말이 끊어진다.

 "너 뭐하는 건데?"

 다그치는 수현의 말에 그녀는 의자 깊숙이 등을 받친다.

 "무슨 말이 그래? 나 뭐하는지 아까 사장님이 소개했잖아."

 "아니, 너 여기서 뭐하냐고. 지금 내 앞에서 뭐하냐고."

 "수현씨."

 "10년 전에 너랑 나랑 헤어졌어. 나한테 말 한마디 안하고 있다가 순식간에 통보하고 사라져서 한 번도 못 마주치고 산 지 10년이야. 그런데 지금 왜 내 앞에 나타난 거냐고." 

 "보고 싶어서."

 수현은 숨을 '흡'하고 마시고는 뱉지 못한다.

 "10년전에는... 수현 씨가 아니라 내 일이 더 중요했을 때였어. 내가 얼마나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수현 씨도 알잖아. "

 "그래서... 네 일 때문에, 내 청혼도 거절하고 떠난 거잖아. "

 "그 땐... 결혼을 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여유롭지 않았으니까."

이제 시현은 마시지도 않는 찻잔을 들어 만지작 거리고 있다.

 "그 땐 내가 아직 내 일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하던 때였어. 그런데, 그 때 마침 미국지사에서 현장 근무 요원으로 내가 뽑혔던 거야. 놓칠 수 없는 기회였어. "

 "그래서... 거기로 갔잖아. 날 버리고... "

 "수현씨. 그 때 수현씨랑 나는 아직 어렸어. 우리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잠시 둘은 말이 없다. 수현도 시현도 그저 그들 자리 옆에 난 창 밖만 보고 있을 뿐이다.

 "하나만 물어보자."

 수현의 말에 그녀가 그를 돌아본다.

 "너 그때... 임신 하지 않았어?"

 수현의 눈에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당황한 빛이 잡힌다. 시현은 애써 태연한 척이다.

 "...무슨 말이야?"

 "속일 생각 마. 다 알고 하는 얘기니까."

 수현은 한 호흡 쉰다.

 "너 그 때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 네 말대로 나, 어렸지만  고민 많이 했고, 너랑 같이라면 그 아이도 키우고 싶었어.... 그런데 그날, 넌 그 아이 지웠고, 나랑 끝냈어. "

 시현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진다.

 "그걸.. 어떻게..."

 "나랑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어떻게 그런 짓을..."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

 "더는, 우리 보지 말자. 내 콘서트, 너 아니라도 코디 해 줄 사람 많을 거야. 넌 신경 꺼."

 그렇게 앉아있는 그녀를 혼자 두고 수현은 까페를 나온다. 머릿 속이 복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했다.

 

  밤이 늦어서야 연습이 끝났다. 수현은 연습 시간 내내 피아노보다 강시현과의 만남을 계속 떠올렸다. 잊고 있었던 듯한 분노가 치밀었고, 또 아련한 아픔 때문에 스러지기도 했다. 잡다하게 떠오르른 생각을 정리해보려 민영이 다니는 어린이집 앞에서 택시를 세우고 집까지 걸었다. 비도 왔었는지 거리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선생님!"

 부르는 소리에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수현의 집 앞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선생님!"

 가로등 불빛 있는 쪽으로 그 그림자가 걸어오자 수현은 그제야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주민영이었다. 앉아서 꽤 기다렸던 듯 그녀가 쓰고 있는 모자와 어깨가 젖어있다.

 "어쩐 일이야? 얼마나 기다린 거야?"

 민영은 말없이 웃기만 한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피곤한 빛이 가득했다.

 "많이 기다렸어? 들어가자. 따뜻한 거라도 마셔."

 수현의 말에 민영은 손사래를 친다.

 "아니에요. 얼른 들어가서 저도 자야죠. 선생님 보려고 잠깐 왔어요."

 민영은 손가방을 뒤져 무언가를 꺼낸다.

 "이거, 선물이에요. 오늘 거기 갔다온 기념."

 헝겊으로 만든 부엉이 모양 휴대폰 고리다.

"고마워. 이뿌네."

 시현으로 인해 경직된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든다.

 "마음에 들어요?"

 수현이 대답대신 미소짓자, 민영의 얼굴도 환해진다.

 "와~ 다행이다."

 민영은 가슴에 자기 손을 얹는다.

 "걱정했는데. 그럼 전 가요."

 "어딜?"

 "집에요."

 수현은 민영의 앞을 막은 자기의 행동이 의아스럽다. 민영도 그렇기는 마찬 가지다.

 "그냥 가도 괜찮겠어? 내가 데려다 줄까?"

 수현은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느꼈다.

 "됐어요. 밤도 늦었는데, 얼른 가셔서 쉬세요. 전 걱정하지 말구..."

 그제서야 수현은 민영의 어깨를 잡았던 자신의 손을 푼다.

 "그래... 그럼 잘 가."

 "네. 안녕히 계세요."

 민영과 수현은 그렇게 헤어진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하루가 정말 길었던 두 사람에게, 잠깐의 만남이 피로회복제 같은 역할을 한 듯 싶었다. 민영은 수현이 잡았던 자신의 어깨를 잡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수현도 민영이 준 부엉이 고리를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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