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그녀와 마주 앉아 있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그녀와 달리 수현의 잔은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시는 그녀를 볼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이별을 통보하고 떠났던 그녀도 10년동안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자신 앞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 건지. 하루도 그녀의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하루도 그녀를 잊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날이 없던 그였다. 10년이 흐르고, 이제 막 조금씩 윤서준에 대한 기억도 그녀의 기억도 사라지려고 하는 지금, 왜 그녀가 다시 신기루처럼 나타난 것인지... 분노는 아닌데, 자꾸 분노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 꿀꺽 꿀꺽 삼켜버렸다.

 "여전하네, 사람 그렇게 쳐다보는 거. "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안하잖아. 그렇게 보고 있으면. "

 "너, 뭐야?"

 수현의 말에 그녀의 말이 끊어진다.

 "너 뭐하는 건데?"

 다그치는 수현의 말에 그녀는 의자 깊숙이 등을 받친다.

 "무슨 말이 그래? 나 뭐하는지 아까 사장님이 소개했잖아."

 "아니, 너 여기서 뭐하냐고. 지금 내 앞에서 뭐하냐고."

 "수현씨."

 "10년 전에 너랑 나랑 헤어졌어. 나한테 말 한마디 안하고 있다가 순식간에 통보하고 사라져서 한 번도 못 마주치고 산 지 10년이야. 그런데 지금 왜 내 앞에 나타난 거냐고." 

 "보고 싶어서."

 수현은 숨을 '흡'하고 마시고는 뱉지 못한다.

 "10년전에는... 수현 씨가 아니라 내 일이 더 중요했을 때였어. 내가 얼마나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수현 씨도 알잖아. "

 "그래서... 네 일 때문에, 내 청혼도 거절하고 떠난 거잖아. "

 "그 땐... 결혼을 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여유롭지 않았으니까."

이제 시현은 마시지도 않는 찻잔을 들어 만지작 거리고 있다.

 "그 땐 내가 아직 내 일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하던 때였어. 그런데, 그 때 마침 미국지사에서 현장 근무 요원으로 내가 뽑혔던 거야. 놓칠 수 없는 기회였어. "

 "그래서... 거기로 갔잖아. 날 버리고... "

 "수현씨. 그 때 수현씨랑 나는 아직 어렸어. 우리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잠시 둘은 말이 없다. 수현도 시현도 그저 그들 자리 옆에 난 창 밖만 보고 있을 뿐이다.

 "하나만 물어보자."

 수현의 말에 그녀가 그를 돌아본다.

 "너 그때... 임신 하지 않았어?"

 수현의 눈에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당황한 빛이 잡힌다. 시현은 애써 태연한 척이다.

 "...무슨 말이야?"

 "속일 생각 마. 다 알고 하는 얘기니까."

 수현은 한 호흡 쉰다.

 "너 그 때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 네 말대로 나, 어렸지만  고민 많이 했고, 너랑 같이라면 그 아이도 키우고 싶었어.... 그런데 그날, 넌 그 아이 지웠고, 나랑 끝냈어. "

 시현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진다.

 "그걸.. 어떻게..."

 "나랑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어떻게 그런 짓을..."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

 "더는, 우리 보지 말자. 내 콘서트, 너 아니라도 코디 해 줄 사람 많을 거야. 넌 신경 꺼."

 그렇게 앉아있는 그녀를 혼자 두고 수현은 까페를 나온다. 머릿 속이 복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했다.

 

  밤이 늦어서야 연습이 끝났다. 수현은 연습 시간 내내 피아노보다 강시현과의 만남을 계속 떠올렸다. 잊고 있었던 듯한 분노가 치밀었고, 또 아련한 아픔 때문에 스러지기도 했다. 잡다하게 떠오르른 생각을 정리해보려 민영이 다니는 어린이집 앞에서 택시를 세우고 집까지 걸었다. 비도 왔었는지 거리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선생님!"

 부르는 소리에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수현의 집 앞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선생님!"

 가로등 불빛 있는 쪽으로 그 그림자가 걸어오자 수현은 그제야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주민영이었다. 앉아서 꽤 기다렸던 듯 그녀가 쓰고 있는 모자와 어깨가 젖어있다.

 "어쩐 일이야? 얼마나 기다린 거야?"

 민영은 말없이 웃기만 한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피곤한 빛이 가득했다.

 "많이 기다렸어? 들어가자. 따뜻한 거라도 마셔."

 수현의 말에 민영은 손사래를 친다.

 "아니에요. 얼른 들어가서 저도 자야죠. 선생님 보려고 잠깐 왔어요."

 민영은 손가방을 뒤져 무언가를 꺼낸다.

 "이거, 선물이에요. 오늘 거기 갔다온 기념."

 헝겊으로 만든 부엉이 모양 휴대폰 고리다.

"고마워. 이뿌네."

 시현으로 인해 경직된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든다.

 "마음에 들어요?"

 수현이 대답대신 미소짓자, 민영의 얼굴도 환해진다.

 "와~ 다행이다."

 민영은 가슴에 자기 손을 얹는다.

 "걱정했는데. 그럼 전 가요."

 "어딜?"

 "집에요."

 수현은 민영의 앞을 막은 자기의 행동이 의아스럽다. 민영도 그렇기는 마찬 가지다.

 "그냥 가도 괜찮겠어? 내가 데려다 줄까?"

 수현은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느꼈다.

 "됐어요. 밤도 늦었는데, 얼른 가셔서 쉬세요. 전 걱정하지 말구..."

 그제서야 수현은 민영의 어깨를 잡았던 자신의 손을 푼다.

 "그래... 그럼 잘 가."

 "네. 안녕히 계세요."

 민영과 수현은 그렇게 헤어진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하루가 정말 길었던 두 사람에게, 잠깐의 만남이 피로회복제 같은 역할을 한 듯 싶었다. 민영은 수현이 잡았던 자신의 어깨를 잡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수현도 민영이 준 부엉이 고리를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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