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저녁, 민영은 늘 오던 시간보다 늦게 왔다. 피곤에 젖은 듯한 모습에 마음이 쓰였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선생님, 오늘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실래요?"

 민영은 자기 가방에서 MP3를 꺼내서 틀고 이어폰을 건넸다.

 "뭔데?"

 "일단 들어봐요."

수현은 그렇게 노래를 들었다.

 "그거, 제가 4월이면 늘 혼자서 부르는 노래 거든요. 선생님 그거 피아노로 쳐주실 수 있으세요?"

 수현이 아무 말없이 민영의 얼굴만 보고 있자, 민영은 어쩔 줄 모르는 듯 얼굴을 붉힌다.

 "뭐... 부담스러우시면, 안 하셔도..."

 그 말에도 아무 말이 없자, 민영은 MP3를 챙겨 가방에 넣는다.

 "아니..."

 수현은 그런 민영을 막는다.

 "해볼께."

수현은 민영에게서 다시 음원을 받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민영은 부엌에 들어가 물을 끓인다.

금새 집 안에 국화향이 퍼진다.

 '어느 새 하얀 꽃 씨를 날리는 4월의 바람이 내 앞에...'

 민영이 그의 옆에 앉았고, 기분 좋은 국화향에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수현은 피아노를 쳤다. 짧은 곡이었지만, 손에 익은 대로 화성을 달리 해 그렇게 세 번을 쳤다. 민영은 내내 눈을 감고 그 곡을 감상하고 있었고, 수현은 그녀가 우려낸 국화차 향보다 더한 향이 그의 주위에서 뿜어내는 것 같음을 느꼈다.

 

 강시현은 수현의 콘서트를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외려 그의 콘서트를 위해 외부 투자자를 늘렸고, 기획에서 연출까지 욕심내서 좋은 것들을 골라냈다. 오래 같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잠깐씩이라도 자주 부딪히는 터라 수현은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지훈도 중간에서 안절 부절 못하고 있었다.  

 "너한테 그 사람, 어떤 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일은 일이지 않냐?"

 연습실로 수현이 부탁한 톨컵 사이즈 라떼를 들고 찾아온 지훈이 그의 눈치를 보고 운을 뗐다.

 "뭐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수현은 모르는 척 했다.

 "강 시현 씨 말이야. 볼 때마다 벌레 씹은 표정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수현은 말없이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너 콘서트 잘 해 보겠다고 외부 투자자들 섭외하고, 당일 일정도 잘 셋팅하는 것 같던데."

 "누가 뭐라고 했어?"

 그가 조용히 쏘아붙이자, 지훈은 잠시 입을 닫았다.  

 "참, 지난 번 너희 집에서 먹었던 밥 생각 나더라."

 화제를 바꾼 지훈의 말에 수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래?"

유순해진 그의 답에 지훈의 경직된 표정이 풀리는 듯 했다.

 "궁금했던 건데, 그 밥 네가 한 거야?"

지훈의 물음에 수현은 희미하게 웃을 뿐 말이 없다.

"뭐야? 너 아니구나. 누구야? 그 우렁각시."

그 말에도 수현은 댓구가 없다.

 지훈이 가고, 수현은 민영이 부탁했던 곡이 떠올라 다시금 연주하기 시작했다. 민영을 만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녀가 메꿔주는 잠깐의 저녁 시간이 일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처음에는 귀찮고 부담스러웠던 그 시간이 이제는 외려 행복하기까지 하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 때, 연습실 문이 열리고... 강시현이 들어섰다. 

 "곡 괜찮네. 직접 쓴 거야?"

 수현은 댓구하지 않고 그녀를 응시할 뿐이다.

 "정말 여전하다니까. 사람 무안하게 쳐다만 보는 거."

 시현이 커피 컵을 내밀었으나 수현은 받지 않는다.

 "당신 좋아하는 메이플 시럽 라떼야. "

 그 말에도 미동도 않는 수현을 보고 시현은 컵을 피아노 옆에 내려 놓는다.

 "수현 씨가 지난 번에 나랑 한 이야기 중에... 사실 아닌 것도 있어."

 그렇게 말하며 시현은 맞은 편 의자에 앉는다.

 "나... 수현 씨 아이... 지운 거 아냐."

 시현은 한 호흡 쉰다.

 "그 때 결혼은 무리였지만... 수현 씨를 사랑했던 것 보다 내 일이 중요한 건 아니었어. 그리고 아이는... 그냥 낳아서 기르려고 했어. 믿기 어렵겠지만..." 

 수현도 심호흡을 가만히 한다.

 "그런데... 아이 놓쳤어. 수현 씨한테 말하기도 전에... "

둘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말... 왜 하는거야?"

수현의 물음에 시현이 그를 똑바로 본다.

 "나,수현 씨 사랑했다고. 수현씨가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수현 씨가 생각하는,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리고...나 아직도 수현 씨 좋아."

 수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본다. 한 번도 그녀를 잊어본 적 없었다. 윤서준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그녀에 대한 그리움도 때때마다 물밀듯이 밀려온 적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현실로 다가온 그녀와의 재회가 왜 추억만큼 간절하지 않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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