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는 그대로 못 박힌 듯 서 있는다. 송우현은 그런 그녀를 보고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그 여자는 옆으로 흐른 머리카락을 귀뒤로 쓸어넘기고 커피숍 문을 열었다.  

 "올 줄 알았어요." 

 그 여자는 쭈삣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뭐 마실래요? 내가 살께요." 

 그가 일어나자 그 여자도 벌떡 일어난다. 그 때 당황한 건 오직 그 여자 뿐이다.  

 "아니면 밥을 살까요?" 

 그제서야 그 여자도 시계를 본다. 뭐라 말 할 새도 없이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끈다.  

 "뭐 먹고 싶어요?" 

 그 여자는 뭐라 말할 새도 없다.  

 "원래 말이 없어요?" 

 그 여자는 그를 올려다 보고 말없이 웃기만 한다.  

 "좋네요, 웃는 얼굴 보니까." 

 그도 같이 웃는다.  

 "성격...급하시죠?" 

 그 여자가 입을 연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도 웃는다.  

 "그냥...급하게 행동하시는 것 같아서..." 

 그 여자는 1분 이상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하는 그가 신기하다.  

 "맞아요. 나 성격 급해요. 그러니까 빨리 메뉴 정하세요. 밥 먹어야죠. " 

 그 여자는 다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앞을 본다.  

 "저쪽에 돈가스랑 우동 맛있게 하는 집이 있어요. 거기로 가요." 

 "네." 

 그 여자는 그에게 느끼는 호감을 애써 억눌렀다.  

 그 남자와 무리는 숙소에 도착했다. 이미 날이 저물어 사막으로 가기는 무리란다. 조바심을 치는 그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외려 태연하다. 로마에 오면 로마 법에 따르라고 했던가. 그 남자도 쓴 웃음을 짓고 말아버린다.  

 "시원한 거좀 마실까?" 

 짐이 제안하자 모두 좋다고 한다. 봄베이에서 라자스탄 시내까지는 꽤 먼 거리를 온터라 모두 허기져 있었다. 늦은 점심도 그 시간까지 그들을 지탱해 주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짐과 스코티쉬 남자와 중국인 한 명과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먼저 샤워 할테야?" 

 짐이 일행에게 묻자 스코티쉬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남자는 침대에 짐을 풀어 갈아입을 옷과 다이어리를 꺼냈다.  

 "뭐야? 중국언가? 아니면 일본어?" 

 짐이 그 남자의 다이어리를 보더니 짓궂게 물었다.  

 "이 봐, 이건 내 다이어리라구." 

 그 남자도 장난을 받아친다. 곁에 있던 중국인이 웃는다. 찬이라는 성을 쓴다.  

 "매번 기록으로 남기나 보지?" 

 찬이 묻자 그 남자가 도리질을 한다.  

 "그냥... 여행 중에는 기록을 남겨두는 게 나중을 위해서 좋을 것 같아서..." 

 찬이 끄덕인다.  

 "이 봐, 빨리 나오라구. 대기자가 줄을 섰어!" 

 짐이 화장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스코티쉬가 무어라고 소리쳐댄다. 다들 낄낄 웃고 만다.  

 "배가 고파 . 빨리 뭘 좀 먹었으면 좋겠어." 

 찬의 말에 그 남자의 허기도 배가 되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돈가스를 한 점씩 먹을 때마다 그의 시선을 느끼고 멈칫해야만 했다.  

 "...안 드세요?" 

 그 여자가 말하자 그는 웃기만 한다.  

 "자꾸 그렇게 보시면 저 체해요. 조금 있다 일도 해야 하는데..." 

 그 여자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해요. 그 쪽이 너무 맛없어 해서..." 

 머리 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네?"

 그 여자의 표정에 그는 외려 크게 웃어버린다.  

 "여기 맛있는 집 맞아요? 왜 그렇게 못 먹어요?" 

 아~. 그 뜻이었구나.... 그 여자도 그냥 웃어버린다.  

 "여기 맛있어요. 이 근처에서 밥 먹을 일 있으면 전 꼭 여기 오거든요." 

 그 여자가 애써 명랑한 표정을 짓는다.  

 "음~. 맛있는 거 맞네요. 그 쪽 표정에 속을 뻔 했잖아요." 

 그는 또 짓궂게 한 마디 하고는 앞에 놓인 우동과 돈가스를 빠르게 먹어버린다. 그 여자도 그제야 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그 여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버블티 전문점으로 그를 안내했다.  

 "밥 사셨으니까 제가 차 한 잔 살께요. 아까 커피는 마셨을테고 주스 드세요. " 

 그 여자도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조금은 익숙한 듯 하다.  

 "버블티?" 

 컵의 내용물을 보더니 그가 의아해한다.  

 "차나 주스 속에 요 젤리같은 동그란게 들어있는 모습이 거품 나는 모습 같대서 그렇게들 부르는 것 같아요. "  

 그 여자가 빨대를 입에 물며 설명해준다.  

 "특이한 거 좋아하네요." 

 그도 한 모금 마신다.  

 "맛있으니까." 

 그 여자가 웃자 그도 따라 웃는다. 이제는 눈맞춤을 해도 어색하지 않다.  

 "전 컴퓨터 공학 전공하고 있어요. 그 쪽은?" 

 "저요? " 

 그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인다. 속일 것도 없다지만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르는 일이라 무어라 해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한다.  

 "전 학교는 안 다니구요..." 

 그 여자는 솔직히 말하기로 한다.  

 "시간제나 사이버로 학점은행 등록해서 공부하고 있어요. " 

 말하면서 그 여자는 남자의 표정을 살핀다. 남자의 표정에서 미묘한 무언가가 잡힌다. 그럼 그렇지.... 

 "...과는요?" 

 "영문학이요." 

 그 여자는 담담히 말한다.  

 "왜 영문학을 하게 됬지요?" 

 그가 묻자 그 여자는 씹고 있던 버블을 꿀떡 삼킨다.  

 "원래 영어를 좋아했는데 좀 더 깊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계속 하게 됐어요." 

 그 여자는 안다. 아무리 자기가 최선을 다해 솔직해진다 해도 이 사람의 기준치에 자신이 맞을 리 없다는 것을.  

 "편의점 알바는 언제부터 했나요? " 

 "2년전 부터요" 

 "야간에?" 

 "네." 

 "왜요?" 

 이 사람의 질문은 거의 심문 수준이다. 그 여자는 서서히 이 사람과의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재수를 할까 해서  학비도 벌겸 시작했지요. 낮에는 공부하고....근데 대학에 가서도 내가 원하는 건 못 얻을 것 같아서 차라리 하고 싶은 걸 하자 싶어 계속 그 야간 알바를 하게 됐어요." 

 불편 스럽기는 해도 그 여자는 기왕에 말 나온거 다 얘기 하는게 좋을 성 싶다.  

 "하고 싶은 게 뭔데요?" 

 그가 집요하게 묻자 그 여자는 먼저 벽에 걸린 시계부터 봤다. 편의점에 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폭넓은 독서를 하는 것과 세계 여행을 하는 것. " 

 그 때, 그의 눈빛이 다시 미묘한 빛을 띄는 것을 그 여자는 보았다.  

 "독서와 여행이라...." 

 그가 다시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여자는 다시금 시계를 흘끔거린다.  

 "그동안 여행 다녀온 곳은 있나요?" 

 "그럼요." 

 단호한 그 여자의 말에 그는 잠시 말을 못한다.  

"어디어디?" 

 "필리핀 보루네오 섬이랑 일본 삿포로요."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이 보이고 그의 눈빛 조차 빛났다.  그녀는 그의 그런 변화에 어리둥절했다.  

 "저 이제 가야겠어요. " 

 그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팔을 잡는다. 아까 커피숍 이후에 두번 째 스킨십이다.  

 "전화 번호 줄래요? 난  그 쪽이랑 또 만나고 싶은데...." 

 그 여자는 그런 그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른다.  그러다 결심한 듯 전화번호를 준다.   

 "편의점까지 데려다 줄께요." 

 이번에는 그가 그 여자의 손을 잡는다. 순간 당황한 그 여자가 손을 뺀다.  

 "아니에요....그냥 저 혼자 갈래요."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만다.  

 "...그럼... 잘 가요. 전화 할게요. " 

 찻집 앞에서 둘은 헤어진다. 그 여자는 그의 다른 어떤 점보다 그의 피부가 닿았던 손의 느낌을 다시금 되새기고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걷다 코너를  돌 때, 예상치 못한 바람이 그녀을 한번 뒤흔들고 간다.  바람에 날린 먼지 때문에 그 여자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서서히 눈을 뜬다. 다시 길을 걷던 그 여자는 방금 전의 바람을 통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익숙해, 이 냄새...' 

 그 여자는 순간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돌아본다.  

 '아니야...아직.... 아니야...'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 바람 속에서 그 여자는 자신이 맡았던 그리운 어떤 것을 느꼈고 그 냄새는 방금 만나고 느꼈던 송우현에 대한 감정을 씻어내고 있었다.  

 그 남자와 무리는 노천 식당에 앉아 새빨갛게 구운 탄도리 치킨과 버터 난등을 시켜놓고 마구 먹어대고 있었다. 그들의 먹성은 대단해서 이미 세 마리를 다 먹고도 두 마리를 더 시켜 나눠 먹고 있었고 큰 버터 난조차도 개인당 5장씩은 먹고 있는 듯했다.  

 "와우~ 이거 너무 먹는 거 아냐?" 

 그 남자가 말하자 모두들 '야~'를 연발한다.  

 "먹어두라구. 내일부터는 힘든 여정이 될 테니까." 

 짐이 난과 닭다리를 접시에 덜어 놓으며 그 남자에게 말했다. 가이드 조차 동의의 빛을 보인다.  

 식사가 끝난후 모두들 몇 사람이 모인 노점상으로 달려갔다.  

 "뭘 하려는 거야?" 

 그 남자가 묻자 짐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빤" 

 "뭐?" 

 "이걸 빤이라고 해. 인도인들의 기호식품이지. " 

 잎사귀에 밤톨같은 것을 넣어 감싼 것이다.  

 "이걸 먹으면 입이 빨갛게 돼." 

 정말 대부분 사람들의 입이 빨갛다.  

 "씹어볼테야?" 

 짐이 묻자 그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닥 청결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그들을 보다가 그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봄베이에서 본 인도인들보다 더 특이한 복장을 한 여자들이 그의 곁을 스쳐갔다. 그들을 하염없이 보던 그는 갑자기 몰려온 흙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찬이 그 남자에게 물었다.  

 "...어..눈을 못 뜨겠어..." 

 눈을 비비적 대던 그가 서서히 눈을 떴다. 곧 흐린 상이 뚜렸이 보였다.  

 "괜찮은거야?" 

 짐이 묻자 얼빠진 얼굴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건 뭐지?....'

그 바람은 꼭....연금술사의 마지막, '파티마의 바람'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라고?....뭐가 아니란 거지?....' 

 그 남자의 마음에 어렴풋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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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 틀 무렵, 사람들과 릭샤의 소음으로 그 남자는 일찌감치 잠에서 깼다. 어젯밤 샤워를 하고도 더워 잠을 설친 탓에 몸이 물먹은 솜처럼 처지는 듯 했다. 그럼에도 일어나 앉아서 제일 먼저 다이어리를 꺼내 일정표를 확인했다.  

 '9시. 로비에서 가이드와 만남' 

 시계를 보니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그 남자는 더 누울까 하다가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기로 한다.  

 그 여자는 다시금 손 끝에서 찬 공기가 맺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1시간 정도면 사장이 올 것이고 그날의 일은 끝나게 된다. 그 여자는 얼른 자신이 앉은 자리를 정리하고 청소 도구를 꺼냈다.  

 "여기 담배요." 

 "네..."

 그 여자는 청소기를 들다 말고 담배를 꺼내주었다.  

 "...지난 번엔 죄송했습니다...." 

 "네?" 

 손님 얼굴을 잘 보지 않던 그 여자는 뜬금없는 소리에 얼굴을 본다. 그 여자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자 남자는 멋적은 웃음을 짓는다.  

 "일전에 시끄럽게 했지요...가게에서..." 

 지금 생각해보니 가게 진열대를 쓰러뜨리면서 난동을 부렸던 사람 중 하나다.  

 "아.....괜찮아요...다 지나간 일인데요, 뭐....."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 여자의 표정은 당황스럽다.  남자는 담배와 거스름돈을 받더니 돌아선다.  

 "안녕히 가세....."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당황한다. 남자가 다시금 그녀 곁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제 이름은 송우현입니다. 혹시 따로 만날 수 있을까요?" 

 그 여자는 말도 할 수가 없다.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 너무 당황스러워 정말 뭐라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 

 "관심있어 그럽니다. 댁한테...." 

 그 여자는 도데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만나기로 한 가이드는 10시 반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그 남자는 짐을 가지고 로비에서 두 시간 가량을 기다려야만 했다. 중국의 '만만디'와 같은 사고 방식을 가진 인도인들의 습관에 대해 익히 조사를 했으나 약속 시간을 훨씬 넘긴 가이드를 보고서는 표정 관리 조차 되지 않았다.  

 "You're late."-늦으셨군요.  

 "No problem."-문제 될 것 없어요. 

 그 남자는 이 남자의 대답에 황당함을 느꼈다. 남의 시간을 두 시간이나 까먹고선 문제 될 게 없다니... 이 사람들은 '미안하다'란 말도 모르고 사나?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그 남자는 꿀꺽 삼켰다. 참자. 오늘 나는 라자스탄 사막으로 가야한다. 바로 이 사람과.  

 "Let's go!" 

 가이드는 앞서 길을 간다. 가면서 그 남자 이외에 다른 무리도 있을 거라고 귀띰해준다. 가이드를 좇아 몇 걸음 가지 않아 정말 관광객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보였다. 눈 파란 서양인들과 자신과 피부색이 비슷한 사람도 보였다. 그 남자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결코 같은 한국인은 아니란 걸 알았다.  

 "Where are you from?"-어디서 오셨죠? 

 그 남자는 먼저 말을 걸어 보기로 한다. 서양인들은 캐나다에서 온 사람이 태반이었고 그 외에는 스코틀랜드와 호주에서 온 이도 있었다. 동양인들도 그들 무리와 같은 패거리였는데, 영어 외에 그들의 언어는 잘 할 수 없는 중국인들이었다. 여행에서 만난 무리인만큼 친해지는 데는 그닥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 남자는 홀로 한국인이었음에도 그들 무리에 묻힐 수 있었다.  

 "Why do you wanna go lazasthan?"- 라자스탄엔 왜 가고 싶은 거지?

 자신을 짐이라고 밝힌 캐나다인 남자가 물었다. 

 "Because i believe there's something great thing to change my life."-왜냐하면 내 삶을 바꿀 무언가가 그곳에 있을 거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자신의 최선을 다해 '연금술사'와 그 책을 읽고 느낀 점, 책을 통해 본 자신의 '표지'등을 설명했다. 짐은 그 남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더니, 

 "너의 그 감성과 순수함은 놀랄 만해,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책의 이야기일 뿐이야. " 

 하며 그 남자의 행동에 우려를 표했다. 그 남자가 조용히 웃자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을 태운 밴이 돌팍길을 굴러가면서 요동을 쳐댔고 엔진 소리도 시끄럽게 울려댔다.  

 "너의 인연은 의외로 가까운데 있을 수 도 있어. 너를 위해 준비되고 너의 존재를 인식치 못해도 네가 오길 기다리는 어떤 인연이... 놀랄 만한 순간에 그렇게 너를 찾아갈 수도 있어." 

 차분하면서도 힘있는 그의 목소리에 그 남자는 더더욱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사막에서 자신이 찾고자 한 건 군대 생활 동안 쌓여왔던 외로움을 해결할 또다른 외로운 여정이었던 건 아닌지... 

 그 여자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했으나 잠을 잘 수 없었다. 편의점에서 본 그 남자는 오후 5시쯤 대학 근처의 커피 전문점에서 무작정 그녀를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그 여자가 뭐라 말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자신의 전화 번호를 남겨놓고 남자는 사라졌다.  

 '송...우현...' 

 누워서 그가 써놓고 간 메모를 바라본다. 이럴 땐 도데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여자는 배겟 밑으로 메모를 넣어버리고는 눈을 감아 버린다.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눈을 떴다. 다른 일행은 이미 차에서 내린 상태다. 잠을 설친 탓에 깊이 잠이 들었나 보다.  

 "are you okay?"-괜찮아? 

 짐이 묻자 그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가이드가 그들 무리를 데려간 곳은 한 노천 레스토랑이다. 일행은 거기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한다.  

 "인도 음식 중 어떤 걸 먹어봤지?" 

 그 남자의 맞은 편에 앉은 금발이 묻는다. 그 남자는 그녀의 이름을 생각해내려 애쓴다.  

 "치킨 브리아니" 

 "오우....그건 어때? 맛있어?" 

 "음... 괜찮았던 것 같아..." 

 금발은 그 남자의 치킨 브리아니를 다른 동료들에게 이야기하고 그들 모두 치킨 브리아니를 먹어보기로 한다. 그 남자는 이 여행객들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짐이라는 남자가 그랬는데 그는 이 무리 중에서도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았다.  

 "음~ 맛있는데." 

 음식이 나오자 그들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외국인들이 떼로 모여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처음 본 그 남자는 여러 대화를 오가며 음식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좋았다. 사실 한국에서는 다들 음식에만 집중할 뿐 누구하나 신나게 떠드는 적이 없고 혹시 그렇다 할 지라도 핀잔을 받기 일쑤였다.  

 "그런데.... 넌 어디서 영어를 배운거야? 영어를 아주 잘하는데?" 

 짐이 그 남자에게 묻자 그 남자는 먼저 '고맙다'고 한다.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영국인 선교사님 한 분이 그 교회에서 상주를 했거든. 그래서 좀 배웠지. "  

모두 다 그 남자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여행 속에서는 심지어 작은 일조차도 즐거운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숨이 턱에 받혔다. 그 여자는 커피숍 건너에서 가쁜 숨을 골랐다. 이미 약속 시간은 한 시간이나 늦어버렸다. 이렇게 오래 잘 줄 그 여자도 몰랐다.  

 '갔겠지? 갔을 거야...미안하지만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몰라....' 

 그 여자는 확인차 커피숍에 온 것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어떡하지? 갔을 거야..그런데 안 갔으면 뭐라고 하지?....'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가쁜 숨을 몰아 쉬고 통유리 안의 내부를 보았다.  

 '이...이런...' 

 그...송우현이라는 그가....시계와 밖을 번갈아 보던 그가...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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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는 환전을 한 후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프리야'라는 간판의 카레향이 진동하는 곳이었다. 보이인듯 한 어린 소년이 컵과 주전자를 가져오더니 물을 따라 주었다. 그 남자는 되도록이면 그 물을 마셔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짧은 여행 기간, 그것도 꽤나 거친 여행이 될 터에 물까지 잘못 마셨다가는 설사로 전 일정을 허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물이 아닌 음식은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 남자는 보이가 두고 간 메뉴판을 두고 가지고 온 다이어리를 폈다. 그 안에 꼭 먹어봐야 겠다는 음식 목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남자는 다이어리의 음식메뉴를 보고 메뉴를 훑었다. 무엇을 먹을지 결심이 서자 자기 쪽을 주시하던 보이와 눈이 마주쳤다. 보이는 즉시 왔다.  

 "치킨 브리아니-인도식 닭고기 볶음밥-?" 

 "오케이" 

 "콜라 한 병하고 생수도 주세요." 

 주문을 받은 보이가 가고 그 남자는 그제야 카메라를 집어들었다. 오전에 찍어둔 사진들을 확인하고 레스토랑 안쪽을 몇 컷 찍었다.  

 '이제 내일이야.... ' 

 카메라를 옆으로 치워놓고 보이가 일찌감치 가져다 준 생수를 마시며 그 남자는 혼잣말을 한다. 순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이 막 올라오는 카레의 진한 향 때문인지 부푼 기대 때문인지 알 수 가 없다.  

 

 그 여자는 집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집을 나선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 근처에 자주 가는 헌책방에 들러서 책을 몇 권 살 거라며 일찌감치 나왔다. 그러나 오빠와의 대화 이후 마음이 편치 않아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 일이라는 게 그런 걸까?원래 그런 걸까?' 

 그 여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가 좋아했다던 그 선배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와서 이제껏 좋아했던 사람을 내치는 게 사랑은 아닐거라고 중얼거린다. 사실 그 여자는 오빠가 이미 정리된 마음으로 담담히 생활해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신경쓰여 하는지 모른다. 그냥 가족 일이니까 그렇겠지 하고 넘어가지만 사실, 다른 집의 남매보다 그 여자와 오빠와의 가족애는 각별하다. 철들면서부터 그 여자의 가족은 그렇게 셋이었으니까.  

 '운명이란 걸 믿는 사람은 그렇게 갑작스레 다가온 사람이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운명은 사람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 똑똑하든 예쁘든, 능력이 얼마나 있든 그런 것도 다 소용 없구나. 한 순간에 그렇게 감정 가는 대로 자신의 인생을 맡기다니...' 

 이제는 또 누구에게 하는지 모르게 혼잣말을 한다.  

 "뭐래는 거야?" 

 서점 아저씨다. 

 "깜짝이야!" 

 어느 새 헌책방 앞에 도착해 있다.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그래? 너 그렇게 하면 꼭 정신줄 놓은 사람 같다고 하지 말랬지" 

 "습관인 걸 어떻게 해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헌 참고서나 교재등을 구하러 돌아다니던 그 여자에게 이제 이곳은 심심하면 찾아와서 괜찮은 서적을 구하는 곳이자 친구먹은 서점주의 마실 장소이기도 하다.  

 "괜찮은 책 있어요?" 

 책장을 둘러보며 그 여자가 묻는다.  

 "늘 있지. 셰익스피어 전집" 

 아저씨는 셰익스피어 광팬이다. 한 때는 연극패에서 단역등을 했다는데 결국 연극 배우로 성공은 못한 듯하고 남은 돈을 털어 헌책방을 냈단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극보다 더 엄청난 희곡을 써보겠다고 글에 매달리신지 어언 10년째다.  

 "그건 놔두세요. 아저씨 보물 건드렸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 여자는 몇 권의 책을 집어들고 카운터로 간다. 아저씨가 책상 겸 계산대로 쓰고 있는 터라 여러 자료들과 노트북으로 어지럽다.  

 "쓰는 건 잘 되세요?" 

 돈을 건네주며 그 여자가 묻는다.  

 "그냥 그렇지 뭐..." 

 아저씨가 말 끝을 흐리는 걸 보니 딱 막혔을 때 내가 왔나 보다 싶다.  

 "아저씨, 저 소원 하나 들어주실래요?" 

 책을 들고 나가려다 돌아서며 말한다. 아저씨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만약 아저씨 글 잘 되면 저한테 이 가게 주세요. " 

 "뭐?" 

  아저씨는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이 가게가 탐나니? " 

 그 여자는 살짝 웃는다.  

 "농민 일보 시 부분의 심사를 맡은 한 시인이 그러시던데요. '시를 계속 쓰다보면 언젠가는 시인이 돼 있을 것이다. 단지 타이밍이 다를 뿐이다'라고... 글을 계속 쓰시다보면 언젠가는  아저씨도 훌륭한 극작가가 돼있겠죠? 그럼 헌책방 운영 안 하셔도 수입이 괜찮으실 거구... 그 때는 저도 이 헌책방 운영하면서 열심히 책읽고 글 쓰려구요." 

 아저씨의 만면에 웃음이 띈다.  

 "희한한 말을 하는데 은근히 맘에 드네." 

 그 여자도 웃으며 가게를 나온다.  

  

 그 남자가 다시 릭샤를 타고 숙소로 오자 아직 자리를 뜨지 않는 몇 몇 아이들이 그에게 다가온다. 좀 전의 망설임 때문이었거나 정리된 생각이었거나... 어떤 건지는 모르겠어도 그 남자는 2루피 짜리 동전들을 꺼내 하나씩 준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와 프런트로 간다.  

 "헤이"  

 아까의 프런트 남자에게 다가간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 

 인도인 들이 좋아한다던 스윗을 내민다.  프런트 남자는 활짝 웃는다.  

 "내일 어디로 갈 거죠?" 

 돌아서려는 그 남자에게 그가 말한다.  

 "라자스탄...사막.." 

 "오케이...제가 알아봐 줄게요."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싶어 그 남자는 가볍게 목례하고  방으로 간다.   

 방 안 창문으로 하늘을 본다. 공해 탓인지 별은 보이지 않으나 회교도의 기도 음악이 전체를 울리고 있다. 저것이 하루 중 마지막 기도의 시간을 알리는 것일 것이다. 가로등의 누런 불빛에 밤하늘 빛도 탁해보인다. 민가의 노란 등도 고즈넉해보이는 이 밤. 늦은 밤 보초를 서려고 밖으로 나왔을 때 시간이 깊어갈 수록 마음을 짓누르던 그 외로움이 느껴지는 듯 했다. 군대에서의 시간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GOP에서의 야간업무였다. 동료가 곁에 있어도 결국 대화가 끊어지고 밤의 흐름 조차 소리를 내는 듯 했던 그 때 '연금술사'의 그 바람처럼 그에게도 오래 기다린 후 꼭 만나게 될 인연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 남자는 그것이 운명이 되었든 일생일대의 기회가 되었던 꼭 확인해 본 후 맞닥드리고 싶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내 이름을 가슴에 새길 그대여' 

 그 밤에, 그가 다이어리에 쓴 일부이다. 

 '머지 않아 우리는 곧 만날 겁니다. 나의 사랑이여...' 

 그 남자는 하품을 한 번 길게 하고 씻으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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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운 바람이 그 남자의 폐부를 감싸는 것 같았다. 아직도 영하를 넘나드는 설한의 한국과 달리 봄베이 공항에서 남자는 한 여름을 맞았다. 미풍에 커리 냄새가 섞여왔고, 뜻을 알 수 없는 그 나라의 언어도 들렸다. 그 모든 것들이 라자스탄 사막을 향해 가려는 그 남자의 기대감을 더욱 더 부추기는 듯 했다.  

 "사막아, 내가 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오빠의 시선은 스크린에 집중되어 있지 않은 듯 했다. 그렇다고 조는 것도 아니었건만,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뭐야?"  

"응?" 

 "뭔데 영화에 집중도 못하고 그랬어? 그 영화 재미없었어?" 

 "아니...." 

 여자의 시선이 따가왔는지 오빠는 또 예의 그 허당 웃음을 짓는다.  

 "밥 먹자." 

 "잊었어? 우리 집에서 밥 먹고 나온지 두 시간 조금 지났어.봄동에 퍽퍽 무쳐서 먹은 게 누군데 그래?' 

 또 오빠의 허당 웃음. 

"그래...그럼 커피라도 마실까?"  

"........." 

  

봄베이 YMCA 건물 게스트 룸에 짐을 풀고 그 남자는 밖으로 나왔다. 간단히 요기라도 해야 했고 몇 가지 물품도 사고 싶었다. 그러자면 가지고 있던 달러도 환전을 해야 했다.  

 "Do you know where's the Thomas Cook?" -토마스 쿡이라는 데가 어딘지 아십니까?

 프런트에 있는 남자에게 물어보자 강한 인도 억양으로 어디라고 얘기하지만 잘 알아 들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말해 주세요...." 그 남자가 당혹스런 표정을 짓자 새까만 피부의 남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Do you want to exchange your money?" -환전하고 싶으세요?-그 말은 꼭 그 남자의 귀에 "뚜 유 웡 뚜 익쓰챙지 여 머니?"라고 들린다. 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프론트에서 나와 그 남자를 밖으로 안내하더니 밖에서 일렬로 서있는 릭샤맨 들중 한 사람에게 안내한다.  

 "He'll take you there."-이 사람이 거기로 안내할 겁니다.- 그 남자는 프론트를 벗어나 자기를 릭샤맨에게까지 데려다 준 인도인이 고맙다. 그는 그저 웃으며 다시 프론트를 향해 갔다. 그 남자가 릭샤에 올라타려 하자 한 소녀가 '엉끌'하면서 손을 내민다. 그냥 봐도 까만 손이 먼지 탓인지 더 지저분해 보인다. 남자는 그 소녀를 무심결에 보다가 어느 새 모여든 더 많은 아이들을 보았다. 어린 아이들, 그 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한 쪽 손에 안고 구걸하는 더 어린 아이들까지....남자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른다. 공항에서 환전한 돈은 얼마 남지 않아서 릭샤를 지불하면 동전마저 털어야 할 판이었다. 그 남자가 갈등하는 사이, 어느 새 YMCA를 지키던 워치맨이 다가와 그들을 그 남자로부터 떼어낸다. 남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릭샤로 들어가 앉는다. 야전 조끼 안 쪽에 고이 들어앉은 여권과 달러를 느끼고 한 손으로는 주머니에 있는 몇 안남은 루피를 만지작 거린다. 릭샤가 움직이면서 스치는 사람들과 그들의 눈빛을 본다. 특히 동정을 바라다 그냥 자리를 비껴간 아이들이 그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남자도 조금의 가책을 느낀다. 참...잊을 수 없는 눈빛이다.   

 그 여자는 커피로 목과 마음을 녹이며 쇼윈도 밖으로 시선을 꽂은 지 오래다. 오빠가 도데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여자와 그녀의 오빠는 원래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 여자가 정상적인 대학생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도, 더 많은 세상을 보기 위해 그 힘든 일 마다않고 하면서 혼자서 제 3국 위주로 거친 여행을 하기 시작했을 때도, 고등학교 때 3년을 짝사랑한 학교 근처의 화방 남자 아이에게 결국 고백하지 않고 졸업을 맞았을 때도 그 여자도 지금의 오빠처럼 침묵했고, 그 시간의 외로움 가운데 그 여자의 오빠도 침묵으로 그 녀 곁에 있어주었었다. 그건 모두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아버지 없이 그녀와 그녀의 오빠를 키운 엄마도 힘든 일이 있을 때 조용히 손으로 작업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침묵으로 그 시간을 꼼꼼히 채워나갔었다. 그리고 그런 긴 침묵 끝에 그들은 꼭 자기만의 결론을 가지고 그 결론을 지켜나갔었다.  

 " 나 말이야...." 

 오빠가 운을 떼다 말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 여자는 말없이 오빠를 쳐다본다. 

 " 사실 그동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처음 듣는 얘기다. 그동안 오빠를 좋아해서 직접 쓴 편지나 메일을 보낸 다른 동급생이나 후배들은 본 적 있지만 오빠는 그 어떤 여자친구들과 밥 한번 먹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학교 입학하고서 처음 들어간 동아리 선배였는데....군대 있을 때부터 가깝게 지냈어. 그 선배가 여러 번 면회를 와 주어서..." 

 오빠의 얼굴에 그림자가 보였다. 

 "그런데?" 

 오빠의 얼굴에 쓴 웃음이 번졌다. 

 "그 선배 때문에 공부도 열심히 해서 회계사 시험도 잘 본건데... 다음 달에 결혼한대...." 

 "뭐?" 

 그 여자의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오빠 뒤로 앉은 사람이 뒤돌아본다.그녀는 무시한다. 

 "어쩌다가..아니 내말은 오빠 군대 면회까지 갔을 정도면 오빠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은데 왜 오빠랑 잘해 볼 생각을 안 한 거냐고?" 

 오빠의 입에서 한 숨 이 새어나왔다.  

 "한 번은 면회를 와서 밥을 먹는데 그 때 선임이 나랑 같이 있었어. 휴가를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나랑 같이 식사는 하고 가고 싶다고 해서...그 때 그렇게 된 거같아...." 

 그 여자는 그런 오빠의 얘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우연히 한 번 밥먹은 사람과 이전 사랑을 잊을 만큼 사람의 사랑이 이토록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일까? 

 "....이 얘기 너만 알고 있어. 엄마는 모르시게 해. " 

 그 여자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빠는....괜찮아, 그래서?" 

 오빠는 힘없이 미소를 지어보인다.  

 "음...잘 견디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둘 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라..." 

 오빠의 얼굴이 초췌한 듯 보인다. 그 여자는 더이상의 할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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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갈 때나 버스를 타고 갈 때 또는 그냥 걷는 그 걸음을 비껴서 바로 옆으로 누군가가 자꾸 지나간다.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타인일 수 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것도 알게 되는 건 없다. 나는 그냥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스치고 피할 뿐이다. 내가 어떤 날을 만나 어떻게 사는지도 어떤 사람도 알 수 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관심 조차 갖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늘 아는 사람과 부대끼고 익숙한 환경 속에서 그냥 그렇게 진행되는 삶이 어느 새 일상으로 굳어버린 지금.하지만 그 익숙한 일상도 처음이 있었다. 그리고 생판 몰랐던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경험이 있다.바로 옆에서 일어난 일도 우리는 무관심 한 척할 뿐 그저 '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지진으로 구제받지 못한 생명을 구하러 성금을 보낼 때도, 내 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철로로 뛰어내려 생명을 구한 것도 다 그와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어쨌든, 어떤 사람은 좋고 어떤 사람은 나쁘다 할 흑백 놀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현실이 지금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고 부터, 어떤 사람들의 사랑도 결코 운명이나 우연 따위가 아님을 알았다.  그것을 나는 섭리라고 부른다.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섭리, 학교나 직장 또는 그 외에 전혀 모른 사람과 친구가 되는 섭리, 어떤 선생의 제자가 된 섭리...그 중에서도 한 쌍의 남녀가 만나 평생지기로 언약하는 제일 되는 섭리 말이다. 지금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 속의 이들은 서로 만나기 전까지 '그 남자'와 '그 여자'라고만 하겠다. 이들도 한 때는 이름이 중요치 않은 각자의 삶에 충실한 타인이었으니 말이다.  

 

 보딩을 하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 남자는 공항 내 커피 숖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카라멜 카푸치노를 한 잔 받아와서 다이어리를 폈다. 그 남자는 군에서 막 제대를 하고 복학 전 열흘 일정으로 인도에 다녀온다. 군 생활 동안 벼르고 별렀던 여행이니 만큼 병무청과 시청을 돌아다니면서 허가증을 받아내고 여권을 만들었던 것은 일도 아니었다.  복학 후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두 갚겠다고 하고 부모님께 200만원을 빌렸다. 생각외로 준비해야할 비용이 초과해서 들어갔었지만, 어떤 것도 그 남자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일정을 확인하고 달러로 환전할 돈을 챙긴다음 , 커피 잔을 들었다. 이제 2주 후면 복학이다. 그동안 너무 하고 싶었던 공부. 그 남자는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던 학교 공부가 군 생활동안  그리워서 내내 미칠 지경이었다. 멋 모르고 1년을 보냈던 만큼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그러나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엄마? 어, 조금 있다가 비행기 타요." -그래, 조심히 잘 다녀오고...- "네, 다녀와서 연락 드릴께요..." 부모님은 처음 그 남자의 여행 계획을 듣고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 생활 2년을 잘 견딘 아들이 대견해 허락했다. 커피잔을 비우고 그 남자는 일어섰다. 환전을 한 뒤 보딩을 해야 했다.  

 활자가 흔들렸다. 손 끝에 냉기가 서리는 것 같았다. 체력이 조금씩 떨어지는 걸 느끼면서 그 여자는 환해진 바깥을 다시 보았다. 7시 50분. 근무 시간 종료 10분 전. 그 여자는 읽던 책을 덮고 앉아 있던 자리를 정리했다.  "여어, 수고했어." 사장이 들어오느라 연 문 틈으로 찬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순간 그 여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셨어요.?" 그 여자는 앞 치마를 벗고 겉옷을 입는다. "어떻게 간 밤에는 괜찮았나?" 사장이 카운터로 들어서며 넌지시 물어본다. 지지난 밤, 만취한 대학생들이 프론트 진열대를 쓰러뜨렸고, 놀란 그 여자가 경찰에 신고해서 무마가 됐던 것이다. "네, 괜찮았어요." 그 때 일을 생각하고 그 여자는 살짝 웃었다. "아, 그리고 말야..."사장이 한 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 여행, 꼭 이번 주말에 가야겠어?"무슨 말인가 했다. 학기가 시작되면서 낮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생이 더이상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게 되자 다른 사람을 구할 때까지 낮에 일을 사장이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야간 타임을 하던 그 여자가 열흘을 비우게 되면 그 열흘까지 고스란히 사장의 몫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24시간을 운영하는 편의점이 그런 사정으로 열흘을 문을 닫을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이,사장님. 한 두 번 일도 아인고 매 해마다 여름, 겨울이면 저 단기 배낭 여행 가는 거 아시잖아요." "그야, 알지.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사람이 없어. 지금 낮에 일하는 것도 보통 힘든게 아닌데, 야간까지 하면 나 죽는다 죽어, 응? 넌 불쌍하지도 않냐? 나이 불혹도 훨씬 지나 심근경색으로 죽겠다 죽어." 사장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저렇게 한다."에이, 그러니까 술 좀 줄이시라니까요. 심근경색이시면 사장님 음주량이 문제지 그게 어디 일하고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 여자는 짐짓 역정을 내는 척한다. 사실 이 편의점에서 이미 2년을 일한 그녀였다. 사장의 사정을 모른 척 할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여행 일정도 3월로 미뤄둔 상태였다. "그럼, 사장님, 제가 여행 일정 미루면 시급 좀 올려주시는 건 어떠세요?"그런 사정을 모르는 사장은 또 한 숨부터 쉰다. 2년을 여행일정 빼고 아파도 밤을 지켜준 이쁜 알바생이었다. "그래...그러지 뭐...한 300원 올려주면 되나?""에이, 째째하게스리...500원."         이미  퇴근 시간도 20분이 지난 상태였다. 사장과 그 여자는 늘 사소한 대화를 하면서 하루를 마감하고 시작한다. 하품을 길게 하면서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르는 소리에 혼곤한 잠에서 깬다. 올려다 보니 스튜어디스가 음료를 권한다. "물 한잔 주시구요....주스도 한 잔 주세요." 자리를 고쳐 앉으며 그 남자는 스튜어디스가 건네준 음료수 잔들을 받았다. 2시간 쯤 잔 것 같았다. 물 한 컵을 다 들이키고 주스로 입을 적셨다. 처음에 비행기를 탔을 때의 그 긴장과 흥분은 난데 없고 4시간 내리 이어진 비행에 조금씩 지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남아있던 주스 잔을 비우고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연금술사' -군에서 누가 두고 간 것을 10번도 더 읽고 보초를 서야했던 그 많은 밤을 생각으로 채웠던 책이었다. 그래서 제대 후 서점에 가서 바로 산 책이 이 연금술사 였다. 그 남자는 그 책을 읽고 꼭 사막에 가고 싶었다. 시간과 금전상 이집트 까지는 무리였고 어느 여행 책자에서 봤던 인도의 라자스탄 사막으로 목적지를 정한 것이었다. 그 남자는 그 사막으로의 여행이 그의 인생에 한 전환점이 되주길 바랐다. 꼭 손에 넣을 보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파티마와 같은 아름다운 인연이 그의 인생에 한 부분을 빛내 주길 빌었다. 군 생활이 시작되고 불안하고 힘든 나날의 연속일 때 그래도 그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마음에서였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연금술사는 감탄을 터뜨렸다.-그는 이제 막 그 책의 '서'를 읽은 참이었다.밤이 더 아름다울 사막이, 그 평생을 빛내줄 아름다운 인연이 곧 다가온다.  

 코 끝에 냉기가 서렸다. 등에서 다가오는 온기와 몸 전체로 받는 냉기가 꼭 물속에 기름 넣은 꼴 같았다. 그 여자는 몸을 돌려 바닥에 손바닥을 대었다. '...우이쒸...울 엄마 또 보일러 껐어' 이불을 몸에 돌돌 감아버리고 다시 돌아누웠다. 한 참을 그렇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오후 1시. 어림잡아 너댓시간은 잔 셈이다. "추워 죽겠어. 보일러 왜 자꾸 꺼?" 화장실 가는 길에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한 소리를 한다. "왠 일이야, 이 시간에 다 깨고?" 엄마는 딴 소리다. 보일러 때문에 한 잔 소리 할 때마다 저렇게 시침 뚝이다. "추워서 잠이 와야 말이지.... 밤새 일하다 온 귀한 딸 꼭 그렇게 냉대하셔야겠수?"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방으로 간다. "춥기는 뭐 춥다고 그러니? 볕이 따뜻한데...시장에 가니까 봄동이 다 나왔더라 얘."그 여자는 방에서 이불을 개다 말고 다시 부엌으로 나온다."그래서 겉절이 한 거야?"통에 겉절이를 넣다 말고 잎을  하나 말아 그 녀의 입에 넣어준다. "응,요새 너나 네 아빠나 입맛이 없는 것 같아서...."봄동의 맛이 고소하다. "점심 먹을 거지? 네 오빠도 쪼금 있다 도착한다더라.""오빠가? 회사 안가고 왜?" 오빠는 그녀보다 5살이 위다.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다 학사장교로 월급도 받으면서 있다가 모은 돈으로 등록금도 내고 학원비도 마련해서 작년 말 회계사 시험에 합격해 회사에서 연수 중이었다. "내일부터 합숙이라더라. 그래서 오늘 일찍 들어가 쉬라고 그랬대."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있다 문이 열렸다. 오빠다. 엄마나 그 여자나 얼굴에 함박 웃음이 인다. 조금 피곤하지만 오늘은 점심먹고 오빠와 데이트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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