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바람이 그 남자의 폐부를 감싸는 것 같았다. 아직도 영하를 넘나드는 설한의 한국과 달리 봄베이 공항에서 남자는 한 여름을 맞았다. 미풍에 커리 냄새가 섞여왔고, 뜻을 알 수 없는 그 나라의 언어도 들렸다. 그 모든 것들이 라자스탄 사막을 향해 가려는 그 남자의 기대감을 더욱 더 부추기는 듯 했다.  

 "사막아, 내가 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오빠의 시선은 스크린에 집중되어 있지 않은 듯 했다. 그렇다고 조는 것도 아니었건만,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뭐야?"  

"응?" 

 "뭔데 영화에 집중도 못하고 그랬어? 그 영화 재미없었어?" 

 "아니...." 

 여자의 시선이 따가왔는지 오빠는 또 예의 그 허당 웃음을 짓는다.  

 "밥 먹자." 

 "잊었어? 우리 집에서 밥 먹고 나온지 두 시간 조금 지났어.봄동에 퍽퍽 무쳐서 먹은 게 누군데 그래?' 

 또 오빠의 허당 웃음. 

"그래...그럼 커피라도 마실까?"  

"........." 

  

봄베이 YMCA 건물 게스트 룸에 짐을 풀고 그 남자는 밖으로 나왔다. 간단히 요기라도 해야 했고 몇 가지 물품도 사고 싶었다. 그러자면 가지고 있던 달러도 환전을 해야 했다.  

 "Do you know where's the Thomas Cook?" -토마스 쿡이라는 데가 어딘지 아십니까?

 프런트에 있는 남자에게 물어보자 강한 인도 억양으로 어디라고 얘기하지만 잘 알아 들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말해 주세요...." 그 남자가 당혹스런 표정을 짓자 새까만 피부의 남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Do you want to exchange your money?" -환전하고 싶으세요?-그 말은 꼭 그 남자의 귀에 "뚜 유 웡 뚜 익쓰챙지 여 머니?"라고 들린다. 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프론트에서 나와 그 남자를 밖으로 안내하더니 밖에서 일렬로 서있는 릭샤맨 들중 한 사람에게 안내한다.  

 "He'll take you there."-이 사람이 거기로 안내할 겁니다.- 그 남자는 프론트를 벗어나 자기를 릭샤맨에게까지 데려다 준 인도인이 고맙다. 그는 그저 웃으며 다시 프론트를 향해 갔다. 그 남자가 릭샤에 올라타려 하자 한 소녀가 '엉끌'하면서 손을 내민다. 그냥 봐도 까만 손이 먼지 탓인지 더 지저분해 보인다. 남자는 그 소녀를 무심결에 보다가 어느 새 모여든 더 많은 아이들을 보았다. 어린 아이들, 그 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한 쪽 손에 안고 구걸하는 더 어린 아이들까지....남자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른다. 공항에서 환전한 돈은 얼마 남지 않아서 릭샤를 지불하면 동전마저 털어야 할 판이었다. 그 남자가 갈등하는 사이, 어느 새 YMCA를 지키던 워치맨이 다가와 그들을 그 남자로부터 떼어낸다. 남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릭샤로 들어가 앉는다. 야전 조끼 안 쪽에 고이 들어앉은 여권과 달러를 느끼고 한 손으로는 주머니에 있는 몇 안남은 루피를 만지작 거린다. 릭샤가 움직이면서 스치는 사람들과 그들의 눈빛을 본다. 특히 동정을 바라다 그냥 자리를 비껴간 아이들이 그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남자도 조금의 가책을 느낀다. 참...잊을 수 없는 눈빛이다.   

 그 여자는 커피로 목과 마음을 녹이며 쇼윈도 밖으로 시선을 꽂은 지 오래다. 오빠가 도데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여자와 그녀의 오빠는 원래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 여자가 정상적인 대학생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도, 더 많은 세상을 보기 위해 그 힘든 일 마다않고 하면서 혼자서 제 3국 위주로 거친 여행을 하기 시작했을 때도, 고등학교 때 3년을 짝사랑한 학교 근처의 화방 남자 아이에게 결국 고백하지 않고 졸업을 맞았을 때도 그 여자도 지금의 오빠처럼 침묵했고, 그 시간의 외로움 가운데 그 여자의 오빠도 침묵으로 그 녀 곁에 있어주었었다. 그건 모두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아버지 없이 그녀와 그녀의 오빠를 키운 엄마도 힘든 일이 있을 때 조용히 손으로 작업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침묵으로 그 시간을 꼼꼼히 채워나갔었다. 그리고 그런 긴 침묵 끝에 그들은 꼭 자기만의 결론을 가지고 그 결론을 지켜나갔었다.  

 " 나 말이야...." 

 오빠가 운을 떼다 말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 여자는 말없이 오빠를 쳐다본다. 

 " 사실 그동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처음 듣는 얘기다. 그동안 오빠를 좋아해서 직접 쓴 편지나 메일을 보낸 다른 동급생이나 후배들은 본 적 있지만 오빠는 그 어떤 여자친구들과 밥 한번 먹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학교 입학하고서 처음 들어간 동아리 선배였는데....군대 있을 때부터 가깝게 지냈어. 그 선배가 여러 번 면회를 와 주어서..." 

 오빠의 얼굴에 그림자가 보였다. 

 "그런데?" 

 오빠의 얼굴에 쓴 웃음이 번졌다. 

 "그 선배 때문에 공부도 열심히 해서 회계사 시험도 잘 본건데... 다음 달에 결혼한대...." 

 "뭐?" 

 그 여자의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오빠 뒤로 앉은 사람이 뒤돌아본다.그녀는 무시한다. 

 "어쩌다가..아니 내말은 오빠 군대 면회까지 갔을 정도면 오빠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은데 왜 오빠랑 잘해 볼 생각을 안 한 거냐고?" 

 오빠의 입에서 한 숨 이 새어나왔다.  

 "한 번은 면회를 와서 밥을 먹는데 그 때 선임이 나랑 같이 있었어. 휴가를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나랑 같이 식사는 하고 가고 싶다고 해서...그 때 그렇게 된 거같아...." 

 그 여자는 그런 오빠의 얘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우연히 한 번 밥먹은 사람과 이전 사랑을 잊을 만큼 사람의 사랑이 이토록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일까? 

 "....이 얘기 너만 알고 있어. 엄마는 모르시게 해. " 

 그 여자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빠는....괜찮아, 그래서?" 

 오빠는 힘없이 미소를 지어보인다.  

 "음...잘 견디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둘 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라..." 

 오빠의 얼굴이 초췌한 듯 보인다. 그 여자는 더이상의 할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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