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기에르 주교 바로 살기 -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시리즈
생활성서사 편집부 지음 / 생활성서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망설인다는 것은 두렵다는 것입니다. 주저한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p.123

이 구절을 읽고 한참 생각에 잠겼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누군가에게 순명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보상이나 대가도 바라지 않고 대상에 대한 항구성을 유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지금 제 상황과 견주어 여러 번 자문해보았습니다. 서학과 관련된 모든 것이 배척당하고 신앙의 자유마저 위태로웠던 조선이란 낯선 이국의 땅,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은 세속적 관점에선 무모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신자들과 어울리기 싫어 제단체 활동은 모두 기피하고 미사만 겨우 참례하면서 하느님께 이런저런 불평만 늘어놓는 저같은 세속의 자식에겐 주교의 삶은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순명의 표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신앙 안에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고 그분이 제게 열어놓으신 길을 따르려고 나름 노력하지만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를 거두는 일은 언제나 제게 버겁게 여겨집니다. 저 또한 그들에게 별로 아름답지 않은 인간 군상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힘이 듭니다. 특히 제 친절과 배려를 악용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라면 더욱.

고향 레삭 도드를 떠나 동남아시아, 중국을 가로질러 조선을 향한 주교의 여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들에 대한 연민으로 기꺼이 십자가 고통을 감수했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채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주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별의 아픔을 혼자 삭히면서 조용히 떠날 수 있는 용기p.42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걸까요. 성모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채 나자렛을 떠나 공생활을 시작했던 예수님의 삶을 브뤼기에르 주교는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슬픔과 절망은 결국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어지기에 찰나의 아픔에 흔들려선 안된다는 걸 주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누구보다 인간이란 피조물을 사랑했지만 세상의 갈등과 인간적 기대치에 휘둘리지 않았던 브뤼기에르 주교. 보답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서러움과 원망, 슬픔을 내려놓지 못하는 건 저 뿐이 아니였습니다. 하느님도 배신당한 사랑에 아파하십니다. p.132
매 순간 당신의 신뢰를 저버리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나약한 존재, 하느님을 부정하고 세속적 정체성에 충실했던 지난 날을 회상하는 제 눈빛은 어느새 심연을 향하고 있습니다.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위태로운 심연의 가장자리,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두려워하던 제게 다가왔던 애틋한 온기를 기억합니다.
어쩌면 신앙은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내게 주신 위로와 희망과 약속을 기억하는p.64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내 안의 어두운 심연에 새겨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고통스런 투병으로 중단된 선교였지만 매 순간 영혼의 심연을 굽어보며 하느님 사랑을 새겨갔을 브뤼기에르 주교. 삶의 마지막 순간, 주교가 남겼던 마지막 한 마디를 읊조리며 두 손을 맞잡아봅니다. 상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심연의 공포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습니다. 망설임과 두려움이 제 자신을 압도하는 순간, 그분께 나아가는 여정이 버거워 무릎 끓고 싶을 때마다 브뤼기에르 주교를 떠올리고 오직 빛이신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길 청해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1
천주교서울대교구 엮음 / 가톨릭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수환 추기경님께

2009년 2월 16일,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셨을 때 제 나이는 서른한 살이였습니다.
동년배 친구들처럼 삶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이나 비전도 없고, 타인의 작은 지적에도 일희일비 흔들리며 비틀대던 서른한 살.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알지 못해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던 서른 한 살, 신앙에 대한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성당에 다니며 나름 가톨릭 신자로서 소양을 쌓으며 세례를 받긴 했지만, 가톨릭 신앙에서 강조하는 인내와 절제, 청빈이란 덕목은 당시 스무 살을 갓 넘었던 제겐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누가봐도 세상 물정 어둡고 타인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갔던 철부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상하고 능력 있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 안주하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온 제게 '가난'이란 단어는 전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껴본 적은 있었지만 그들을 위해 뭔가 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죠. 어딜 가나 환대 받고 관심받는 게 당연했던 시절, 그때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기아 상태에 가까운 존재라는걸. 순간의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결이 맞지도 않는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의 선 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늘 휘둘리고 상처를 받았으며 고가의 사치품들을 구입하고 쌓아두며 스스로 행복하다 자부했지만 정작 누군가의 위로와 온기가 필요한 순간 앞에서 저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내면의 공허와 결핍을 필사적으로 메꾸려는 시도는 항상 저의 바람과 어긋난 결과를 가져왔으며 급기야 소통의 부재와 단절로 이어졌습니다. 마흔 중반에 이른 지금, 그때 저를 돌아보면 참으로 어렸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고 그들에게 끊임없이 내면의 결핍을 투사하며 사랑을 갈구했던 시절, 애정결핍의 전형과도 같았던 저를 안쓰럽게 여겨준 사람은 부모님뿐이었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철없고 어리석은 딸을 걱정하셨던 아버지, 아버지께 저는 아픈 손가락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내면의 결락은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고 나름 순수하게 베풀었던 친절과 배려를 악용하는 경우를 접하면서 점점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며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만 키워가던 제 참담한 심정을 추기경님은 헤아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가톨릭 교회 고위 성직자였던 추기경님은 결코 당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변방에 머물러 소외받고 배척당했던 작은 이들 곁에 머물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추기경님. 생전 막역한 친분을 쌓으셨던 故 정일우 신부님은 상계동 철거민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몇 시간이나 머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추기경님을 애틋한 눈빛으로 회상하기도 하셨습니다.
그저 말없이 곁을 내어주며 그들의 서러운 속내에 귀를 기울이고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것. 낡고 허름한 판자촌에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힘겹게 삭히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온기를 베풀어주셨던 추기경님.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했던 유신 시대, 추기경님은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여 독재 정권과 마주하셨고, 죄없이 희생당한 무고한 목숨들에 대한 연민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문득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 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인류의 구세주를 잉태하고도 어떤 특권도 누리지 않으신 채 묵묵히 하느님 뜻에 맞갖은 겸손과 사랑을 실천하셨던 성모님.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겐 한없이 인자하셨지만, 약자를 기만하고 탄압하는 기득권자들의 위선엔 단호하게 맞서셨던 추기경님의 인품은 아마 성모님을 닮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에 대한 회한과 자책으로 마음이 괴롭고,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감을 견디지 못해 삶이 괴로울 땐 추기경님의 인자한 미소를 떠올립니다.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슬픈 일은 다시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왈칵 밀려올 때, 그 말이 얼마나 처연하게 가슴에 와닿던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추기경님이 돌아가셨을 때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셨던 아버지. 두분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순 없지만 하느님 곁에서 평온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두분을 떠올리면 입가엔 자연스레 웃음이 지어집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제 어깨를 다독이시는 추기경님의 다정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이제까지 저지른 죄악과 허물들로 마음이 무거워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제 귓전에 추기경님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갑니다.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해... 하느님 앞에서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어.'

영원한 자의 빛, 영원에 대한 신앙. 추기경님의 말씀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하늘에서 다시 뵐 날을 기다리며 막달레나 드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찾아 떠나다! - 제임스 마틴 신부
제임스 마틴 지음, 성찬성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느님도 이해하실 수 없는 게 세상엔 더러 존재하지요. 예를 들자면...예수회 사제들 속내라든가." 영화 <Pope Francis>에 등장하는 대사다. 형식적인 규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신앙의 본질에 누구보다 충실한 교황님의 신심과 덕행을 절로 가슴에 새기게 됐던 대사였다. 그 시점부터 교황님을 비롯 예수회 사제들에 대한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분들의 저서를 읽으며 예수회 특유의 독특한 영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제임스 마틴 신부의 <나를 찾아 떠나다!>도 그런 연유에서 선택한 책이었다. 순종과 정결을 미덕으로 삼으면서 가난한 삶을 지향하는 사제들과 비슷한 결을 가졌지만 제임스 마틴 신부의 여정은 다소 남다르다. 어린 시절부터 성당에 다니며 남다른 신심을 키워가다 부르심에 응답해 성소를 품고 살아가는 보편적 사제의 삶과 다른 행보가 이 책엔 담겨 있었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대기업에 입사해 뉴욕에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아갔던 신부는 누구나 선망하는 주류의 삶을 영위했고, 영적인 갈망이나 영성적 깨달음은 그와는 거리가 먼 세계처럼 여겨졌다. 부모님을 따라 잠깐 성당에 다녔던 유년기 시절의 관성을 따라 가끔 미사에 참례하긴 했지만, 단순한 기복 신앙을 넘어서지 못했고 부르심의 은총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듯 보였다. 직장 생활의 갈등과 피로가 누적되고,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하면서 그의 일상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구축해온 여피적 삶에 균열이 찾아온 것이다. 생전 읽지도 않았던 영성 도서를 탐독하고,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을 읽으며 예수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관련 책자를 뒤적이며 성소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는 주저한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속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엄청난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개념조차 희박했다. 직장 생활에서 겪는 좌절감과 매너리즘, 인간관계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고 뉴욕이란 대도시의 화려함은 공허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면의 결락을 메우기 위해 그는 예수회 입회를 결정한다. 주변의 충고와 만류를 뿌리치고 세상과 인연을 끊은 것이다. 처음엔 그의 선택이 다소 무모하게 여겨졌다. 당장 눈 앞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도피처로 예수회를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경쟁심을 조장하는 기업 세계 특유의 냉혹함과 인간성 경시, 물질중심적 가치관에 대한 환멸을 견디지 못해 예수회 입회를 서둘렀지만 그에겐 신앙의 본질에 대한 기본적 성찰이 부족했다. 대기업 문화에 익숙한 젊은이가 금욕과 절제를 기본 모토로 깔고 있는 수도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런지 우려가 됐다. 그러나 부르심의 은총은 그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인도했다. 성찰과 내려놓음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매 순간 하느님께 닿으려는 그의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예수님과 함께 있고, 그분과 동행하고, 좋은 친구에게 의지하듯이 그분에게 의지할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p.176' 예수님을 친구처럼 의지하면서 기도와 봉사로 영성 생활에 매진하던 그는 '기도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p.221' 된다. 사소한 일마다 지시를 받는 일상이 적잖은 스트레스로 다가왔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끼며 신부는 기도와 묵상, 봉사에 집중한다.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을 돌보며 가끔 육체적 혐오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점점 의식이 꺼져가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는 기록은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하루하루 죽음과 가까워지는 그들의 모습은 고통받는 예수님과 닮아있었다. 부활의 찬란한 영광보다 십자가 고통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운명,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자 영성의 본질이라는 깨달음이 강하게 와닿았다. 대기업의 과도한 경쟁 구도와 서열 문화 안에서 늘상 인정 욕구에 시달리며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부쳤던 지난 날을 돌아보며 신부는 고백한다. '기도와 진짜 신앙은 거룩한 사람들의 몫이지 나와는 상관없었다. 하느님은 아주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예수회원으로서의 내 삶을 채우고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나를 덮쳐 왔다. p.373' 불완전한 인간 본질에 대한 통찰은 우리를 언제나 용서하고 사랑하며 기다리시는 예수님에 대한 순명으로 그를 이끌었으며 전혀 다른 존재로 그를 각성시켰다. 병원에서 일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십자가 수난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던 그분의 신비는 완전히 신부를 사로잡았다. 나자렛의 평범한 소녀였던 성모님의 잉태처럼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삶의 초대로 그는 예수회 사제의 길을 걷게 됐고 세속적 타성에 물들었던 과거를 떠나보내게 된다. 하느님과 무관한 인생을 살아왔노라 거듭 강조했던 제임스 마틴 신부. 책을 읽으면 그런 고백이 겸손의 표현으로 느껴질 정도로 부르심의 은총은 매 순간 신부에게 열려있었다. 여피적 정체성에 충실했던 젊은 시절, 간헐적으로 바쳤던 기도 안에서 천사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을 것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던 성모님, 구세주의 어머니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느님 안에서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난 제임스 마틴 신부의 거룩한 여정에 오직 은총만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은 늘 미안하다
김용태 지음 / 생활성서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표지의 엇갈린 폰트를 보고 한참 생각에 잠겼습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말은 ‘사랑한다’가 아니라 ‘미안하다’라는 한 마디라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건네기 힘든 말이라며 덤덤하게 고백했던 영화 평론가가 떠올랐습니다. ‘더 주지 못해서, 이것밖에 해 줄 수 없어서, 이 정도밖에 안돼서’(p.9) 그저 미안한 마음, 그 진심을 마주보고 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표지에서 느껴져 마음이 저렸습니다. 온전히 전하지 못한 진심의 무게가 버거워서, 엇갈린 사랑의 타이밍이 아파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제때 건네지 못했던 마음을 헤아리고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담긴 책 <사랑은 늘 미안하다>는 세상에서 소외된 작은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말하면서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저자인 김용태 신부님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안타까움은 적극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며 작은 이들을 지나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을 설파하십니다. 영적인 갈증에 시달리는 사마리아 여인과 가장 높은 직급의 세관장이었으나 볼품없는 용모와 세속적 기질 때문에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았던 자캐오에게 다가가 그들의 공허와 결핍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셨던 예수님. 세상의 변방에 머물러 빛으로 나아갈 수 없던 작은 이들, 그들의 아픔에 귀 기울기고 공감하며 진정한 연대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의 삶을 따를 것을 신부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인을 추궁하고 단죄하기보다 그들의 나약함을 끌어안아주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베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마음이 ‘악惡’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에서 기인한다는 걸,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걸 알면서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극명히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자신의 아들을 배신한 제자를 내치기는커녕 따스한 손길로 다독여주시며 부활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간직하셨던 성모님 또한 하느님 사랑의 분명한 징표였습니다. 십자가의 어둠을 극복하는 부활의 빛은 이미 성모님 안에 내재해 있던 것.(p.63)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 속에서 하루하루 고통으로 신음했던 작은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들의 아픔을 보듬고 헤아리셨던 예수님의 삶은 삼위일체 정신의 발현, 그 자체였습니다.

책을 덮고 다짐했습니다. 비록 녹록치 못한 여정이 될지라도 예수님과 성모님의 삶을 가슴에 새기며 살겠노라고.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향한 사랑(Caritas)을 지향하며 나의 작은 것부터 봉헌하는 삶을 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어긋난 타이밍으로 전할 수 없던 진심이 후회와 회한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소중한 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그분 안에서 부활의 빛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사랑, 그 자체로 우리를 용서하고 매 순간 새로운 존재로 각성시키는 그분의 뜻이 드러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부족한 글을 맺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민, 사랑으로 가는 길
윤해영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펼치기 전 말씀 한 구절을 묵상해본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마르 6,34-

가톨릭 신앙의 본질이 누군가를 불쌍하고 가련하게 보는 마음, 연민이란 감정에서 기원한다는 걸 안다면 인간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고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마음 한 켠 내놓을 여유조차 없던 시절, 순수하게 베풀었던 친절이 외려 생각지 못한 상처로 돌아와 인간에 대한 환멸만 키워갔던 내 마음엔 도저히 연민이란 감정이 스며들지 못했다. 윤해영 수녀님의 <연민, 사랑으로 가는 길>이란 책은 마음의 빗장을 단단하게 걸어 잠근 채 사람들과 소통 자체를 거부했던 과거를 반추하며 상처에 매몰되어 주변을 보지 못했던 내 모습을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주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세상의 중심이 조금씩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남도 보이기 때문이지요. (중략) 인간에 대한 연민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인간에 대한 연민만이 이 세상을 살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p.134~p.135

이 구절에서 몇 달 전 버스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이 떠올랐다. 퇴근길 버스 안은 승객들로 가득했고 사람들의 표정은 대부분 피로로 지쳐있었다. 아무도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어보였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동안 누적된 스트레스 때문에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할 여유가 나에겐 없었다. 하지만 내 앞에 서계신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과 마스크 밖으로 보이는 지친 눈빛, 손잡이를 잡고 겨우 몸을 지탱하고 계신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등을 조심스레 두드리며 자리를 양보했다. 고맙다며 연신 고개 숙여 인사하시는 할머니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잔상이 되어 내 가슴에 자리 잡았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때마다 홀로 골방에 틀어박혀 나는 매일 똑같은 생각만을 반복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내가 그렇게 호구 같은가?” 부당한 처사에 목소리를 높일 수 없던 처지를 한탄하며 자기 연민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던 과거. 상처에 매몰되어 주변을 보지 못했던 내 시야에 하느님의 빛이 닿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던 순간, 내 마음 한 귀퉁이를 물들이며 영혼을 휘감던 따스한 물결은 나를 세상으로 이끄는 그분의 손길이었다.

사람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오죽했으면 너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이렇게 네 곁에 있기를 원했겠느냐? p.168

6월 도서는 고전 문학을 읽으려고 생각했지만 ‘연민’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이 책을 선택 했는데 소소한 일상의 순간마다 관여하시는 하느님의 섬세함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했다. 인간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매 순간 우리를 향하시는 그분의 뜻을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단 하나의 진실만이 선명한 울림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연민은 가톨릭 신앙의 단초이며 그분을 닮아가려는 사랑의 몸짓이라는 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