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기에르 주교 바로 살기 -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시리즈
생활성서사 편집부 지음 / 생활성서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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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인다는 것은 두렵다는 것입니다. 주저한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p.123

이 구절을 읽고 한참 생각에 잠겼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누군가에게 순명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보상이나 대가도 바라지 않고 대상에 대한 항구성을 유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지금 제 상황과 견주어 여러 번 자문해보았습니다. 서학과 관련된 모든 것이 배척당하고 신앙의 자유마저 위태로웠던 조선이란 낯선 이국의 땅,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은 세속적 관점에선 무모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신자들과 어울리기 싫어 제단체 활동은 모두 기피하고 미사만 겨우 참례하면서 하느님께 이런저런 불평만 늘어놓는 저같은 세속의 자식에겐 주교의 삶은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순명의 표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신앙 안에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고 그분이 제게 열어놓으신 길을 따르려고 나름 노력하지만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를 거두는 일은 언제나 제게 버겁게 여겨집니다. 저 또한 그들에게 별로 아름답지 않은 인간 군상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힘이 듭니다. 특히 제 친절과 배려를 악용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라면 더욱.

고향 레삭 도드를 떠나 동남아시아, 중국을 가로질러 조선을 향한 주교의 여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들에 대한 연민으로 기꺼이 십자가 고통을 감수했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채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주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별의 아픔을 혼자 삭히면서 조용히 떠날 수 있는 용기p.42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걸까요. 성모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채 나자렛을 떠나 공생활을 시작했던 예수님의 삶을 브뤼기에르 주교는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슬픔과 절망은 결국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어지기에 찰나의 아픔에 흔들려선 안된다는 걸 주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누구보다 인간이란 피조물을 사랑했지만 세상의 갈등과 인간적 기대치에 휘둘리지 않았던 브뤼기에르 주교. 보답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서러움과 원망, 슬픔을 내려놓지 못하는 건 저 뿐이 아니였습니다. 하느님도 배신당한 사랑에 아파하십니다. p.132
매 순간 당신의 신뢰를 저버리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나약한 존재, 하느님을 부정하고 세속적 정체성에 충실했던 지난 날을 회상하는 제 눈빛은 어느새 심연을 향하고 있습니다.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위태로운 심연의 가장자리,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두려워하던 제게 다가왔던 애틋한 온기를 기억합니다.
어쩌면 신앙은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내게 주신 위로와 희망과 약속을 기억하는p.64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내 안의 어두운 심연에 새겨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고통스런 투병으로 중단된 선교였지만 매 순간 영혼의 심연을 굽어보며 하느님 사랑을 새겨갔을 브뤼기에르 주교. 삶의 마지막 순간, 주교가 남겼던 마지막 한 마디를 읊조리며 두 손을 맞잡아봅니다. 상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심연의 공포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습니다. 망설임과 두려움이 제 자신을 압도하는 순간, 그분께 나아가는 여정이 버거워 무릎 끓고 싶을 때마다 브뤼기에르 주교를 떠올리고 오직 빛이신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길 청해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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