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 궁리필로소피 8
P.M.S. 해커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당신은 지금 '고통'이라는 말이 정말로 울기를 뜻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ㅡ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고통을 표현하는 말은 울기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한다. (PI 244)

(-) 내면 세계에 있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사적이다. "어느 누구도 나의 고통을 가지지 못한다. 누군가 나를 불쌍히 여길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나의 고통은 내게, 그의 불쌍히 여김은 그에게 속한다. 그는 내 고통을 받지 않았고, 나는 그의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았다."
나는 당신과 똑같은 고통이 아니라 유사한 고통만을 가질 수 있다. 내면적인 경험은 어쩔 수 없는 사적인 소유물이다.
내적인 것들의 소유자가 어떤 경험을 하면, 그는 그 경험을 의심할 수 없다. 고통을 가지면서 내가 고통을 가지는지 의심할 수는 없다. 고통을 느끼면서 동시에 내가 틀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내가 고통을 가짐을 안다(-) "외부 세계를 탐구할 때 우리는 항상 의심을 버릴 수 없지만, 내면 세계에 관해서는 우리는 확실성을 가진다".


(-) 우리가 매우 부적절한 비유로 '내면'이라 부르는 것은 외면을 물들인다infuse. '내면'을 묘사하는 풍부한 어휘를 동원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우리는 외면을 기술할 수조차 없다. (-)

(-) 나는 그가 아픔을 본다. 즐거워하는 행동이 즐거워함을 인정하는 기준이듯이, 고통-행위는 고통스러움을 인정하는 기준이다. 그가 아프다는 사실은 볼 수 있지만, 그의 아픔은 볼 수 없다ㅡ아픔은 추론되어야 한다ㅡ고 반론을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이 응수할 수 있다. (1) 그 사람 역시 자신의 아픔을 지각할 수 없다. (2) 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없다면, 소리를 볼 수 없고 색깔을 들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제 머리에 찬바람을 쐬면, 다른 사람이 머리에 고통을 느끼도록, 두 육체를 이를테면 무선으로 연결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고통을 느낀 사람은 그 고통이 자신의 머리에서 느껴진다는 이유에서 자신의 고통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어떤 사람 A가 신체의 일부분을, 이를테면 손을 공유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나와 A의 팔에 있는 신경들이 이 공유된 손에 연결되어 있다고 해보자. 이제 말벌이 이 손을 쏘았다고 상상해보자. (-) 자, 이제 우리의 고통이 서로 같다고 해야 할까 다르다고 해야 할까? 만일 당신이 "우리는 같은 위치에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에 관한 기술도 서로 일치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고통은 그의 고통일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그의 고통은 그의 고통이니까."

(-) 다시 말해서, '나의 통증'이라는 문구는 내가 무슨 통증을 가지는지를, 나의 통증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 문구가 말하는 것은, 누구의 통증이냐는 것뿐이다. (-)


(-)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들을 '보기' 때문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


보기와 듣기는 우리의 주위 환경에 관한 정보를 얻는 방법들이다. 반면에 치통을 가지는 것, 침울하다고 느끼는 것, 무언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이나 정서 상태나 기대에 관한 앎을 얻는 방법들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P를 안다, 라는 말이 의미 있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람이 P를 모른다, 라는 말도 의미 있는 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안다 또는 모른다에 관한 명제는 경험적인 명제로서 가능한 두 경우 중 하나를 배제하는 한에서 의미 있기 때문이다. (-)

(-) 어떤 상황에서 앎에 관한 말이 유의미하다면, 알아냄, 알게 됨, 배움 등에 관한 말도 유의미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픔을 가질 경우,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알아내지 않는다. 우리는 아픔을 가질 뿐, 아픔을 알게 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올바른 의미에서 어떤 사람이 P를 안다면, 그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픔을 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느낌'에 호소하는 일, 즉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내가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아프다는 것(아픔을 가진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

(-) 애완 동물이 병들면, 우리는 그 동물이 자신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병들었다고 해보자. 고양이는 다행스럽게도 자의식이 없는 동물이어서 아픔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로하겠는가? (-) 자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이나 고통을 의식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행동의 동기를, 즉 무엇이 왜 자신을 행동하게 하는지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


나는 나에 관해 말할 수 있으며, 나의 말은 독특한 지위를 지닌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어떤 사적인 것을 들여다보면서 기술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의 말은 오히려 내면적인 것의 표현expression이다. '나는 이기고 싶다'는 말은 나의 심리 상태를 기술하는 말이 아니라, 심리 상태를 밖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어떠한다고 생각한다(또는 믿는다)'는 말은 의견을 내놓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분명히 지적되어야 한다.


우리는 말을 통한 의사 소통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의사 소통의 핵심이 다만 타인이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ㅡ그런데 의미는 정신적인 어떤 것이어서, 타인이 내 말의 의미를, 이를테면 그의 마음속으로 가져간다ㅡ에 있다고 여기기 쉽다. 타인이 그 의미를 가지고서 무슨 일을 할지의 문제는 언어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내가 말함으로써 그는 내가 아픔을 알게 된다. 내 말은 바로 이 앎이라는 심리적 현상을 일으킨다. (-)' (-) '시계는 우리에게 시간을 가르쳐준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 (PI 363)


학습을 통해 (-) 우리는 아픔을 말로 표현한다. (-) 사람들은 다치면 소리를 지르고 흐느끼고 상처를 감싼다는 것, 원하는 것을 잡으려고 노력한다는 것,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피한다는 것은 귀납적인 사례 축적을 통해 발견된 사실이 아니다. 먼저 자신의 고통을 귀납이 아닌 방식으로 확인한 다음, 타인의 고통과 고통-행위를 귀납적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사람은 치통을 앓으면서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보면서 본 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있고, 생각하면서 생각을 말로 전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치통으로 신음하거나, 본 것을 기술하거나,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면, 그는 우리가 은유적으로 내면이라 부르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의사가 이를 건드려 그가 비명을 지르는데도, 이를 보면서 우리가 '그건 단지 행동일 뿐이야ㅡ그의 고통은 여전히 감춰져 있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말하면, 우리는 '그것은 단지 말일 뿐이야ㅡ그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있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그가 자신이 보는 것을 우리에게도 보여준다면, 우리는 그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가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

(-) 우리는 겉모습에 속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또 다른 행동을 통해서만, 즉 더 많은 외면을 통해서만 속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너무 미끄러워 자리를 잡지 못하던 고통이 머물 자리를 얻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몸이 고통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ㅡ그렇게 말하는 것에서 우리는 왜 불합리함을 느끼는가? 내 손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손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옳은 이유가 무엇인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 몸일까'라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뭐라 대답해야 할까? 그것은 몸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유효할까?ㅡ아마도 이런 식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손에 아픔이 있을 때, 우리는 손이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 사람들은 손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하는 사람을 위로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본다.


만일 심리적인 술어들이 살아 있는 동물이나 사람 전체에 적용될 때만 의미를 지닌다면, 몸의 한 부분에만 적용된 심리적 술어들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뇌에 적용된 심리적 술어들 역시 무의미하다. 우리는 눈으로 보지 마음이나 뇌로 보지 않으며, 보는 주체는 마음이나 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다. (-) 뇌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뇌가 벙어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뇌가 말한다' 같은 말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 뇌는 의견을 가지지도 않고, 논증하지도, 가설을 세우지도, 추측하지도 않는다. 이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이다. 뇌가 망가지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뇌가 망가지면 치통을 가질 수도 없고 걸어다닐 수도 없을 것이다ㅡ하지만 치통을 가지고 치과 의사에게 걸어가는 것은 뇌가 아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날씨에 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우리가 이렇게 대답해야 하겠는가? "내 뇌가 생각하는 중이오. 1분만 더 시간을 주시오. 그러면 뇌가 내게 대답할 것이오. 그런 다음에 내가 당신에게 얘기하지요."


(-) 기계에게 부족한 것은 계산 능력이 아니라 생명이다. 생각의 뿌리는 기계적인 계산이 아니라 욕구와 고통, 희망과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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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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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그는 재판관이 재판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한다……

(-)



(-) 분별 있는 관찰자는 감정 이입을 넘어서 자신만의 관찰자적 관점에서 그들의 고통이 갖는 의미와 그것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잘못 생각한다. (-) 



휘트먼은 시인-재판관을 “형평을 맞추는 자”라고 불렀다. 이는 어떤 의미인가? 왜 문학적 상상력은 불평등보다는 평등에, 귀족적 이상보다는 민주적 이상에 더 긴밀히 관계하는가? 왜 법적 시선의 햇빛은 특별히 “무기력한 것들”에 관계하는가?

공감 능력이 뛰어난 독자로서 『어려운 시절』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이 특별히 쏠리는 부분이 있다. 즉, 주인공들의 고통과 고뇌가 독자와 작품 사이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핵심 부분 중 하나이기에, 우리의 관심은 특히 고통받고 두려움에 떠는 인물들을 향한다. 어떠한 역경도 겪지 않은 인물은 우리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한다. 쉽게 풀리는 인생에는 극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 감성은 독자에게 외부적 상황에 의해 고통받은 삶들에 대해 특별히 더 강한 동일시와 공감의 결합을 바탕으로 살펴보게 한다. (-) 사악한 배경은 필요하고 또 불가피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고, 자연의 재앙은 건물과 도시를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려는 비극은 불필요하다. 모든 전쟁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고, 굶주림과 가난과 절망적으로 불평등한 노동 조건도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처지에 놓여 있다는 생각으로 『어려운 시절』과 같은 소설을 읽는다면―우리의 감정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감정 이입적 동일시에 기초할 것이기에―우리는 자연스럽게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그들은 어떻게 하다가 이러한 상황이 되었는지,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었는지 등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가난하거나 억압받는 자들의 상황을 대하는 매우 나쁜 방식은 그것이 다르게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부유하고 잘사는 사람들의 상황과 나란히 두고 볼 대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식으로 우리의 사유는 극빈한 사람들의 운명을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행운과 비슷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선회한다. (-) 하지만 내가 보기에 휘트먼의 요지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정확하게 상상하여 사려 깊게 측정하고, 나아가 그것에 관여하고 또 그것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힘을 얻는 강력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만약 스티븐 블랙풀처럼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다면, 바운더비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들을 탐욕스럽고 둔감한 존재들로 그리면서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상황을 간과하게 될 것이다. (-) 만약 여성이 직장 내 성희롱 때문에 겪게 될 것들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범행은 법이 해결해야 할 심각한 사회적 범죄 행위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 경우건 분별 있는 관찰자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경험 앞에 멈춰 서게 된다. 그리고 관찰자적 시각에서 이 고통이 그 대상에게 적절하며, 합리적인 사람이 그러한 상황에서 충분히 느낄 만한 고통, 분노, 공포인지를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겪은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결정적인 단계이다. 이것 없이는 그 어떤 관찰자적 평가도 핵심을 빗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 집단 혐오나 집단 억압은 흔히 개인화의 실패에 기인한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다른 많은 형태의 유해한 편견은 흔히 집단 전체에 부정적인 특징을 귀속시키는 것에서 비롯한다. 때로 이는 한 집단을 싸잡아 기생충, 해충, 심지어 “짐짝” 등 인간 이하의 것으로 그리는―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묘사나 미국 인종주의의 많은 ‘사변적’ 특성처럼―극단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구성원 한 명 혹은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한 개별화된 앎을 존속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설령 누군가가 그들과 개별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방법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공감의 상상력이라는 문학적 태도로 개인을 대할 때, 최소한 잠시 동안이라도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인 묘사가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바로 그곳에서 대다수가 백인이었던 법학과 학생들에게 이 소설을 가르치던 그때, 우리 대부분은 사실상 선하면서도 지극히 무지하고 또 공감 능력이 없으며, 이 ‘경계선’ 너머의 삶은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하면서도 그러한 욕망을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혹은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소설 속 인물 메리 돌턴과 같은 입장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소설을 읽고 토론하는 경험은 최소한 백인 독자에게 그들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고, 만약 우리가 인종 문제에 대해 숙고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길러야 할 ‘공상’의 습관을 알려준다.

(-) 우리는 특수하고도 끔찍한 불이익을 당한 개별 인물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 우리는 비거 토마스가 자신의 엄마,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과 사는 너저분한 단칸방으로 들어간다.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두 개의 철제 침대 사이로 난 좁은 공간에 한 흑인 소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태양에 비친 비거 토마스는―이 이미지는 휘트먼의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는” 태양을 분명 떠올리게 한다―이미 감옥에 있는 처지다. 무심하게 죽여버린 생쥐와 같이 그는 무기력한 상태에 갇힌 것이다.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사적 공간이 없을 때, 그리고 방을 기어 다니는 생쥐 때문에 언제든 불쌍한 “수치심에 대항한 음모”가 나를 침범할 때, 우리는 자기 존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구석에 몰린 생쥐가 사납게 달려드는 방식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비거를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감지하게 된다. 요컨대 우리가 어느 정도는 비거의 눈을 통해, 또 어느 정도는 구경꾼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우리는 어떻게 모든 지점에서 그의 희망과 공포가, 성적 욕구가, 정체성이, 그가 살고 있는 더러운 공간에 의해 좌우되는지를 본다.

더러운 공간만이 아니다. 비거의 자아 개념과 감정적 삶을 지배하는 힘은 인종적 불평등과 증오다. (-) 백인 독자들은 비거와의 동일시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의 외부적 환경뿐 아니라, 그의 감정과 욕망은 사회적·역사적 요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 우리는 비거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려 하지 않는 한 소설을 읽어나갈 수 없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그의 분노와 수치의 감정을 껴안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관찰자이기도 하다. 관찰자로서 우리는 대상을 향한 그의 몇몇 감정들의 부적절함을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피부색에 대한 수치심, 그리고 백인 가정을 향한 염원과 두려움의 비극적 조합 같은 것 말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그의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타당한 것들이지만, 소설은 그것들의 잔혹하고도 자의적인 사회적 기반을 보여준다. 이는 관찰자인 우리로 하여금 보다 넓은 범위의 감정을 느끼도록 해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비거의 곤경, 즉 그를 지금의 상태로 만든 인종주의의 구조에 대한 원칙적인 분노에 깊은 공감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서서 그는 자신이 살인을 한 이유에 대해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죽였는지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이유를 해명하자면 자신의 삶 전부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거 이야기의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 독자는―거의 모든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비거의 생애 전체를 설명하는 데 참여하고, 결국 그의 폭력적인 성격의 기원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소설은 이러한 이해가 비거의 범죄와 처벌에 있어서 정의로운 결정을 내리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제안한다. (-)



(-) 백인을 증오의 무리가 아닌 인간으로 보는 것, 이것이 희망의 시작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비거의 상황에서 이는 또한 절망이기도 하다. 그 속에 진정한 삶과 인간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비거는 이에 대한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이것들의 가치를 발견한다. 또한 그의 절망은 자신을 불행에 빠뜨린 권력들이 변하지 않은 채 존속한다는 것과 희망이 그 누구를 위해서도 지금은 실현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타인을 위해 그러한 희망을 현실로 만들려면 대규모의 제도적·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아우르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 작별 인사가 전부다. "저 멀리서 쾅 하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철벽에 부딪히며 닫히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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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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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하는 데 십오분과 재료 어쩌구가 주어졋다면 재료를 알뜰하게 쓰레기도 거의 만들지 않고 사용하며 시간도 알차게 썻고 요리도 맛잇엇는데 혼자 먹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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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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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사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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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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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육체적 심리적 자기 혐오─뭐라고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자부심의 상실 같은─는 우울증의 가장 보편적인 증세였다. 병이 진행되면서 나는 나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으로 인해 점점 더 고통받았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감을 눈부시게 회복시켜줄 상을 받기 위해 나흘 일정으로 황급히 파리로 날아왔던 것이니, 내가 느끼는 비애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나의 상황과 역행하고 있었다.

 

 

시상식 당일이었다. (-) 나는 퐁 루와얄 호텔에서 아침 늦게 일어났다. 오늘은 기분이 상당히 좋은 것 같은데, 라고 혼잣말을 하고 아내 로즈와도 얘기를 나눴다. 약한 진통제 할시온 덕분에 불면증을 가까스로 진정시켜 잠을 몇 시간 잔 후라 기분이 꽤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덧없이 이지러질 이런 쾌활함은 거의 의미 없는 반복현상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밤이 오기 전에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빠져들 것인지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당시 매 단계 악화되는 상황을 조심스럽게 감시 관찰하고 있었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지적 선언은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에 등장하는 바로 이 문장이다. "진정으로 진지한 철학적인 주제는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으나 언제나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자살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그 전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

(-) 그는 어떠한 자살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지프의 신화』에 죽음을 지배하는 생의 승리라는 엄숙한 메시지(희망이 부재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가까스로)가 담겨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살에 관한 카뮈의 진술과 이 주제에 관한 그의 집착이, (-)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정서장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여주인공 엠마 보바리가 마을 신부에게 도움을 청하는 순간이다. 간통으로 인한 죄의식에 시달리다 미칠 지경이 되어 지독한 우울증에 빠진 엠마─마침내 자살로 치닫고 마는─는 신부에게 이처럼 비참한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달라고 주저하면서 부탁한다. 하지만 단순한데다 그다지 현명하지도 않은 (-) 진부한 종교적 충고나 들려주는 신과 남자, 어느 누구로부터도 위안을 받을 수 없었던 엠마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 

 

 

(-) 억지스런 농담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진심이었다. (-) 강한 성욕의 소유자들에게는 음탕한 백일몽이 환상이 아니라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날 상담 시간에는 위안거리가 전혀 없었다. 나는 정말 비참한 기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시간을 맞이할 차비를 했다. 손님 몇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식사는 반갑지도 그렇다고 공포스럽지도 않았다.(-) 그 같은 무심함 자체야말로 우울증의 병리학적인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이 상태는 익숙한 고통이 시작되려는 고통의 문지방이 아니라 고통의 평형현상이다. 말하자면 정신이 (-) 고통을 흡수할 수도 없는 상태인 셈이다.

고통에는 사람들이 그걸 경험하면서도 경감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사람들은 날마다 다양한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비롭게도 그런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

그러나 우울증에는 이와 같은 구원에 대한 신념, 혹은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럭저럭 견딜 만한 치료법이 있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더욱 극심한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름아닌 이 절망감이 고통보다 더욱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킨다. (-) 이 병의 경우에는 고통에서 고통으로 이동한다. (-)

 

 

(-)최초로 우울증의 발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병이 지나가야 할 모든 과정을 전부 다 거쳐야만 낫는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니, 그것은 확신에 가깝다. 이것은 힘든 일이다. 안전한 해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모독이다. 그러나 모독이 될지라도 반복해서 그런 격려를 보여주면, 그리고 그런 격려가 충분히 끈질기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라면 위험에 빠진 사람은 거의 언제나 구출된다. 극히 심각한 우울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비현실적인 절망 상태에서 과장된 병마와 치명적인 위협으로 인해 갈가리 찢기고 분열된다. 친구, 사랑하는 사람, 가족, 존경하는 사람들은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생명의 가치를 설득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울증 환자에게 생명의 가치는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종종 갈등을 일으키지만, 그런 헌신은 무수히 많은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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