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 궁리필로소피 8
P.M.S. 해커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당신은 지금 '고통'이라는 말이 정말로 울기를 뜻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ㅡ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고통을 표현하는 말은 울기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한다. (PI 244)

(-) 내면 세계에 있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사적이다. "어느 누구도 나의 고통을 가지지 못한다. 누군가 나를 불쌍히 여길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나의 고통은 내게, 그의 불쌍히 여김은 그에게 속한다. 그는 내 고통을 받지 않았고, 나는 그의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았다."
나는 당신과 똑같은 고통이 아니라 유사한 고통만을 가질 수 있다. 내면적인 경험은 어쩔 수 없는 사적인 소유물이다.
내적인 것들의 소유자가 어떤 경험을 하면, 그는 그 경험을 의심할 수 없다. 고통을 가지면서 내가 고통을 가지는지 의심할 수는 없다. 고통을 느끼면서 동시에 내가 틀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내가 고통을 가짐을 안다(-) "외부 세계를 탐구할 때 우리는 항상 의심을 버릴 수 없지만, 내면 세계에 관해서는 우리는 확실성을 가진다".


(-) 우리가 매우 부적절한 비유로 '내면'이라 부르는 것은 외면을 물들인다infuse. '내면'을 묘사하는 풍부한 어휘를 동원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우리는 외면을 기술할 수조차 없다. (-)

(-) 나는 그가 아픔을 본다. 즐거워하는 행동이 즐거워함을 인정하는 기준이듯이, 고통-행위는 고통스러움을 인정하는 기준이다. 그가 아프다는 사실은 볼 수 있지만, 그의 아픔은 볼 수 없다ㅡ아픔은 추론되어야 한다ㅡ고 반론을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이 응수할 수 있다. (1) 그 사람 역시 자신의 아픔을 지각할 수 없다. (2) 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없다면, 소리를 볼 수 없고 색깔을 들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제 머리에 찬바람을 쐬면, 다른 사람이 머리에 고통을 느끼도록, 두 육체를 이를테면 무선으로 연결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고통을 느낀 사람은 그 고통이 자신의 머리에서 느껴진다는 이유에서 자신의 고통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어떤 사람 A가 신체의 일부분을, 이를테면 손을 공유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나와 A의 팔에 있는 신경들이 이 공유된 손에 연결되어 있다고 해보자. 이제 말벌이 이 손을 쏘았다고 상상해보자. (-) 자, 이제 우리의 고통이 서로 같다고 해야 할까 다르다고 해야 할까? 만일 당신이 "우리는 같은 위치에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에 관한 기술도 서로 일치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고통은 그의 고통일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그의 고통은 그의 고통이니까."

(-) 다시 말해서, '나의 통증'이라는 문구는 내가 무슨 통증을 가지는지를, 나의 통증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 문구가 말하는 것은, 누구의 통증이냐는 것뿐이다. (-)


(-)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들을 '보기' 때문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


보기와 듣기는 우리의 주위 환경에 관한 정보를 얻는 방법들이다. 반면에 치통을 가지는 것, 침울하다고 느끼는 것, 무언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이나 정서 상태나 기대에 관한 앎을 얻는 방법들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P를 안다, 라는 말이 의미 있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람이 P를 모른다, 라는 말도 의미 있는 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안다 또는 모른다에 관한 명제는 경험적인 명제로서 가능한 두 경우 중 하나를 배제하는 한에서 의미 있기 때문이다. (-)

(-) 어떤 상황에서 앎에 관한 말이 유의미하다면, 알아냄, 알게 됨, 배움 등에 관한 말도 유의미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픔을 가질 경우,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알아내지 않는다. 우리는 아픔을 가질 뿐, 아픔을 알게 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올바른 의미에서 어떤 사람이 P를 안다면, 그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픔을 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느낌'에 호소하는 일, 즉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내가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아프다는 것(아픔을 가진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

(-) 애완 동물이 병들면, 우리는 그 동물이 자신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병들었다고 해보자. 고양이는 다행스럽게도 자의식이 없는 동물이어서 아픔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로하겠는가? (-) 자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이나 고통을 의식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행동의 동기를, 즉 무엇이 왜 자신을 행동하게 하는지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


나는 나에 관해 말할 수 있으며, 나의 말은 독특한 지위를 지닌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어떤 사적인 것을 들여다보면서 기술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의 말은 오히려 내면적인 것의 표현expression이다. '나는 이기고 싶다'는 말은 나의 심리 상태를 기술하는 말이 아니라, 심리 상태를 밖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어떠한다고 생각한다(또는 믿는다)'는 말은 의견을 내놓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분명히 지적되어야 한다.


우리는 말을 통한 의사 소통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의사 소통의 핵심이 다만 타인이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ㅡ그런데 의미는 정신적인 어떤 것이어서, 타인이 내 말의 의미를, 이를테면 그의 마음속으로 가져간다ㅡ에 있다고 여기기 쉽다. 타인이 그 의미를 가지고서 무슨 일을 할지의 문제는 언어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내가 말함으로써 그는 내가 아픔을 알게 된다. 내 말은 바로 이 앎이라는 심리적 현상을 일으킨다. (-)' (-) '시계는 우리에게 시간을 가르쳐준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 (PI 363)


학습을 통해 (-) 우리는 아픔을 말로 표현한다. (-) 사람들은 다치면 소리를 지르고 흐느끼고 상처를 감싼다는 것, 원하는 것을 잡으려고 노력한다는 것,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피한다는 것은 귀납적인 사례 축적을 통해 발견된 사실이 아니다. 먼저 자신의 고통을 귀납이 아닌 방식으로 확인한 다음, 타인의 고통과 고통-행위를 귀납적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사람은 치통을 앓으면서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보면서 본 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있고, 생각하면서 생각을 말로 전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치통으로 신음하거나, 본 것을 기술하거나,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면, 그는 우리가 은유적으로 내면이라 부르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의사가 이를 건드려 그가 비명을 지르는데도, 이를 보면서 우리가 '그건 단지 행동일 뿐이야ㅡ그의 고통은 여전히 감춰져 있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말하면, 우리는 '그것은 단지 말일 뿐이야ㅡ그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있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그가 자신이 보는 것을 우리에게도 보여준다면, 우리는 그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가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

(-) 우리는 겉모습에 속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또 다른 행동을 통해서만, 즉 더 많은 외면을 통해서만 속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너무 미끄러워 자리를 잡지 못하던 고통이 머물 자리를 얻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몸이 고통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ㅡ그렇게 말하는 것에서 우리는 왜 불합리함을 느끼는가? 내 손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손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옳은 이유가 무엇인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 몸일까'라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뭐라 대답해야 할까? 그것은 몸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유효할까?ㅡ아마도 이런 식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손에 아픔이 있을 때, 우리는 손이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 사람들은 손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하는 사람을 위로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본다.


만일 심리적인 술어들이 살아 있는 동물이나 사람 전체에 적용될 때만 의미를 지닌다면, 몸의 한 부분에만 적용된 심리적 술어들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뇌에 적용된 심리적 술어들 역시 무의미하다. 우리는 눈으로 보지 마음이나 뇌로 보지 않으며, 보는 주체는 마음이나 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다. (-) 뇌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뇌가 벙어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뇌가 말한다' 같은 말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 뇌는 의견을 가지지도 않고, 논증하지도, 가설을 세우지도, 추측하지도 않는다. 이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이다. 뇌가 망가지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뇌가 망가지면 치통을 가질 수도 없고 걸어다닐 수도 없을 것이다ㅡ하지만 치통을 가지고 치과 의사에게 걸어가는 것은 뇌가 아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날씨에 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우리가 이렇게 대답해야 하겠는가? "내 뇌가 생각하는 중이오. 1분만 더 시간을 주시오. 그러면 뇌가 내게 대답할 것이오. 그런 다음에 내가 당신에게 얘기하지요."


(-) 기계에게 부족한 것은 계산 능력이 아니라 생명이다. 생각의 뿌리는 기계적인 계산이 아니라 욕구와 고통, 희망과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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