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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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재판관이 재판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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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별 있는 관찰자는 감정 이입을 넘어서 자신만의 관찰자적 관점에서 그들의 고통이 갖는 의미와 그것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잘못 생각한다. (-) 



휘트먼은 시인-재판관을 “형평을 맞추는 자”라고 불렀다. 이는 어떤 의미인가? 왜 문학적 상상력은 불평등보다는 평등에, 귀족적 이상보다는 민주적 이상에 더 긴밀히 관계하는가? 왜 법적 시선의 햇빛은 특별히 “무기력한 것들”에 관계하는가?

공감 능력이 뛰어난 독자로서 『어려운 시절』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이 특별히 쏠리는 부분이 있다. 즉, 주인공들의 고통과 고뇌가 독자와 작품 사이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핵심 부분 중 하나이기에, 우리의 관심은 특히 고통받고 두려움에 떠는 인물들을 향한다. 어떠한 역경도 겪지 않은 인물은 우리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한다. 쉽게 풀리는 인생에는 극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 감성은 독자에게 외부적 상황에 의해 고통받은 삶들에 대해 특별히 더 강한 동일시와 공감의 결합을 바탕으로 살펴보게 한다. (-) 사악한 배경은 필요하고 또 불가피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고, 자연의 재앙은 건물과 도시를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려는 비극은 불필요하다. 모든 전쟁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고, 굶주림과 가난과 절망적으로 불평등한 노동 조건도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처지에 놓여 있다는 생각으로 『어려운 시절』과 같은 소설을 읽는다면―우리의 감정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감정 이입적 동일시에 기초할 것이기에―우리는 자연스럽게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그들은 어떻게 하다가 이러한 상황이 되었는지,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었는지 등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가난하거나 억압받는 자들의 상황을 대하는 매우 나쁜 방식은 그것이 다르게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부유하고 잘사는 사람들의 상황과 나란히 두고 볼 대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식으로 우리의 사유는 극빈한 사람들의 운명을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행운과 비슷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선회한다. (-) 하지만 내가 보기에 휘트먼의 요지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정확하게 상상하여 사려 깊게 측정하고, 나아가 그것에 관여하고 또 그것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힘을 얻는 강력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만약 스티븐 블랙풀처럼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다면, 바운더비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들을 탐욕스럽고 둔감한 존재들로 그리면서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상황을 간과하게 될 것이다. (-) 만약 여성이 직장 내 성희롱 때문에 겪게 될 것들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범행은 법이 해결해야 할 심각한 사회적 범죄 행위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 경우건 분별 있는 관찰자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경험 앞에 멈춰 서게 된다. 그리고 관찰자적 시각에서 이 고통이 그 대상에게 적절하며, 합리적인 사람이 그러한 상황에서 충분히 느낄 만한 고통, 분노, 공포인지를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겪은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결정적인 단계이다. 이것 없이는 그 어떤 관찰자적 평가도 핵심을 빗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 집단 혐오나 집단 억압은 흔히 개인화의 실패에 기인한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다른 많은 형태의 유해한 편견은 흔히 집단 전체에 부정적인 특징을 귀속시키는 것에서 비롯한다. 때로 이는 한 집단을 싸잡아 기생충, 해충, 심지어 “짐짝” 등 인간 이하의 것으로 그리는―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묘사나 미국 인종주의의 많은 ‘사변적’ 특성처럼―극단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구성원 한 명 혹은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한 개별화된 앎을 존속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설령 누군가가 그들과 개별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방법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공감의 상상력이라는 문학적 태도로 개인을 대할 때, 최소한 잠시 동안이라도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인 묘사가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바로 그곳에서 대다수가 백인이었던 법학과 학생들에게 이 소설을 가르치던 그때, 우리 대부분은 사실상 선하면서도 지극히 무지하고 또 공감 능력이 없으며, 이 ‘경계선’ 너머의 삶은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하면서도 그러한 욕망을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혹은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소설 속 인물 메리 돌턴과 같은 입장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소설을 읽고 토론하는 경험은 최소한 백인 독자에게 그들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고, 만약 우리가 인종 문제에 대해 숙고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길러야 할 ‘공상’의 습관을 알려준다.

(-) 우리는 특수하고도 끔찍한 불이익을 당한 개별 인물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 우리는 비거 토마스가 자신의 엄마,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과 사는 너저분한 단칸방으로 들어간다.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두 개의 철제 침대 사이로 난 좁은 공간에 한 흑인 소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태양에 비친 비거 토마스는―이 이미지는 휘트먼의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는” 태양을 분명 떠올리게 한다―이미 감옥에 있는 처지다. 무심하게 죽여버린 생쥐와 같이 그는 무기력한 상태에 갇힌 것이다.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사적 공간이 없을 때, 그리고 방을 기어 다니는 생쥐 때문에 언제든 불쌍한 “수치심에 대항한 음모”가 나를 침범할 때, 우리는 자기 존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구석에 몰린 생쥐가 사납게 달려드는 방식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비거를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감지하게 된다. 요컨대 우리가 어느 정도는 비거의 눈을 통해, 또 어느 정도는 구경꾼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우리는 어떻게 모든 지점에서 그의 희망과 공포가, 성적 욕구가, 정체성이, 그가 살고 있는 더러운 공간에 의해 좌우되는지를 본다.

더러운 공간만이 아니다. 비거의 자아 개념과 감정적 삶을 지배하는 힘은 인종적 불평등과 증오다. (-) 백인 독자들은 비거와의 동일시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의 외부적 환경뿐 아니라, 그의 감정과 욕망은 사회적·역사적 요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 우리는 비거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려 하지 않는 한 소설을 읽어나갈 수 없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그의 분노와 수치의 감정을 껴안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관찰자이기도 하다. 관찰자로서 우리는 대상을 향한 그의 몇몇 감정들의 부적절함을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피부색에 대한 수치심, 그리고 백인 가정을 향한 염원과 두려움의 비극적 조합 같은 것 말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그의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타당한 것들이지만, 소설은 그것들의 잔혹하고도 자의적인 사회적 기반을 보여준다. 이는 관찰자인 우리로 하여금 보다 넓은 범위의 감정을 느끼도록 해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비거의 곤경, 즉 그를 지금의 상태로 만든 인종주의의 구조에 대한 원칙적인 분노에 깊은 공감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서서 그는 자신이 살인을 한 이유에 대해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죽였는지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이유를 해명하자면 자신의 삶 전부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거 이야기의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 독자는―거의 모든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비거의 생애 전체를 설명하는 데 참여하고, 결국 그의 폭력적인 성격의 기원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소설은 이러한 이해가 비거의 범죄와 처벌에 있어서 정의로운 결정을 내리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제안한다. (-)



(-) 백인을 증오의 무리가 아닌 인간으로 보는 것, 이것이 희망의 시작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비거의 상황에서 이는 또한 절망이기도 하다. 그 속에 진정한 삶과 인간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비거는 이에 대한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이것들의 가치를 발견한다. 또한 그의 절망은 자신을 불행에 빠뜨린 권력들이 변하지 않은 채 존속한다는 것과 희망이 그 누구를 위해서도 지금은 실현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타인을 위해 그러한 희망을 현실로 만들려면 대규모의 제도적·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아우르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 작별 인사가 전부다. "저 멀리서 쾅 하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철벽에 부딪히며 닫히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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