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거칠게 그리고 지루하게 내렸다. (-) 장마가 시작된 지 일주일째다. 그 일주일 동안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비오는 날이면 첫사랑이 생각나네요. 첫사랑이 생각날 때마다 마음이 괴로워요. 장마가 일찍 끝났으면 좋겠네요. 성심병원 수간호사…… 수와진 파초…… 불꽃처럼 살아야 돼 오늘도 어제처럼 저 들판에 풀잎처럼 우리 쓰러지지 말아야 해 (-) 이은미의 목소리로 듣죠. 서른 즈음에.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
라디오소리는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들려올 것 같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도 라디오는 조용필과 윤도현과 수와진과 이은미의 노래를 틀어줄 것 같다. (-) 이제 갓 환갑을 넘긴 엄마의 분별력은 장마철로 접어든 지난 일주일 동안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었다. 사방에 꽉찬 습기가 엄마의 뼈와 살을 아프게 하고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야아, 너네 아버지가 날 버렸다."
(-) 처음에는 몰랐다가 한달 동안 엄마 입에서 같은 말이 반복됐을 때야 그게 치매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한살인 나는 엄마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당분간 엄마를 떠나 먼 곳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뿐. 나는 내가 태어나 살던 이 고장을 떠나 먼 곳으로, 도시로 나가 살고 싶은 그 열망 하나로 간호학원을 다녔다. 간호학원을 마치자마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형제들은 제 살 곳으로 떠났으며 엄마와 나만 남았다. 오빠들은 내게 말했다.
"면소재지에 병원이 두 개나 있다."
언니도 말했다.
"치과도 있고 한의원도 있어."
두 명의 오빠와 한 명의 언니 중 두 오빠가 신용불량자이고 언니는 이혼하여 모자가정의 가장이다. (-)
나는 우산을 받고 마당으로 나가 아욱잎을 뜯는다.
"야야, 근데 너네 아버지가 진짜 날 버린 거니?"
아욱을 포기해버릴까? 꽃이 핀 아욱을 보면 왈칵 무섬증이 인다. 야들야들한 아욱잎이 주던 기쁨, 그 보드라운 잎을 뜯어 부드러운 아욱된장국을 끓여먹었던 행복감에 비례해서 부숭부숭하게 꽃이 돋아나기 시작한 직후부터 뻣뻣해진 아욱잎을 보면 생에 대한 아득한 절망감이 엄습해온다. 내가 이것을 심어놓고 불과 두 번밖에 끓여먹지 못했구나. 두 번밖에 끓여먹기 못해서 절망스러운 게 아니라, 야들야들한 아욱이 어느새 부숭부숭 꽃을 피우는 동안 아욱밭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그 아욱밭을 잊고 있던 동안의 나의 행적이 스스로 무서운 것이다. 아욱이 꽃을 피우고 꽃이 지고 아욱은 늙어가고 이윽고 녹아 없어져버린 연후에야 내가 아욱밭에 와서, 아욱밭에 주질러 앉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아욱을 찾느라 슬피 울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진저리를 피는 것이다. (-)
그러나 수아와 내가 병원문을 잠그려는 순간, 하얀 지프차가 연세가정의원 앞에 멈추었고 한 잘생긴 남자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나와 수아 앞으로 왔다. 그가 농공단지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가슴이 몹시 아픕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것은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수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문 닫을 시간인데요."
밤에 수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남자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우선 윗옷 단추를 끌러줬다고 말했다.
"윗옷 단추를 끌렀다고?"
그 다음에는 물을 갖다주고 등을 두드려주었다고 말했다.
"등을 두드려줬다고?"
그 다음에는 팔다리를 주물러주고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고 말했다. 수아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꺄악!"
(-) 급하게 입고 나온 얇은 블라우스 속 맨살에 소름이 돋아났다. 남자가 몰고 온 하얀 레저용 지프차에 몸을 실었다. 남자가 히터를 틀어주었다. 음악도 틀어주었다. 나는 낮게 읊조렸다. 별이 빛나는 밤에.
"프랑크 뿌르쎌의 메르씨 셰리예요."
나는 부끄러웠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남자가 존경스러워졌다. 뭔가를 정확히 가르쳐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는 여자에게 확실히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부끄럽고 남자가 존경스러운 것이 슬펐다. 나는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프로의 씨그널 음악으로만 알고 있는 것을 남자는 누구의 어떤 음악이라는 것으로 정확히 알고 있다. 나는 남자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음을 느꼈고 그래서 슬펐다. 슬퍼도 하는 수 없는 그런 슬픔이었다. (-)
그날 밤, 노트북 없으면 글을 못 쓰는 '글 쓰는 사람'은 술에 취해서 나를 데려다주지 못했다. 나는 밤길을 걸었다. 그리고 엄마를 생각했다. 이런 밤에, 엄마가 나를 기다리면서 마당을 뱅뱅 돌지 않게 할 방법은 없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나는 엄마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치매에는 손을 놀리는 것이 좋다고 했다. 엄마는 화투를 칠 줄 모르고, 그렇다고 나이든 엄마를 손 놀리게 한답시도 피아노학원에 보낼 수도 없고, 우울증적 치매에는 무엇보다 녹색세상을 열어주는 것이 좋다는 말을 라디오에서 들은 것도 같아서 나는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더구나 엄마는 농사 경험도 풍부하다.
나는 남자에게 무공해채소를 조달해주기 위해 텃밭을 일구려는 게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누누이 각인시켰다.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마당을 일구어 채소밭을 만들고 드디어 첫물 고추가 열렸을 때, 나는 그 누구보다 남자를 생각했다. (-) 그는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고추는 저러다 가지가 휘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저리주저리 열렸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 고추를 보면 그만큼 늘어난 고추가 겁이 날 지경이었다. (-) 엄마는 울면서 빽빽이 돋아나온 상추를 솎아주었다. 농작물을 자식 대하듯 하는 엄마의 심성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집에 있었다. 집 안에서는 음악소리가 났고 그리고 그는 여전히 나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지고 간 것들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위태롭게 반짝이던 몇낱의 별들은 어느 사이 다시 두꺼운 구름 너머로 사라졌다.
"무공해채소예요."
"무공해고 뭐고 이제 그만 가져오세요."
"나는 당신에게 이 채소들을 갖다주기 위해 지난봄 내내 마당을 일구어 텃밭으로 만들었어요. 텃밭을 일구는 동안 손에서 피가 나기도 했죠."
"나는 연이씨에게 손에서 피가 나도록 텃밭을 일구라고 한 적이 없어요."
"나는 당신 집에 오는 택시비 때문에 사람들 다 하는…… 통화중에 다른 전화 왔다고 신호해주는 장치도 못했어요."
"무슨 장치?"
나는 문득 무안해져서 말하지 않았다.
"그건 장치한다고 하지 않고 설정한다고 하는 거야. 것도 모르니?"
"장치든, 설정이든 하여간요. 난 누구처럼 엠피스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에게 노트북도 사줄 수 없어요.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무공해채소뿐이었어요. 나를 가지고 장난치지 마세요. 나는 이제 겨우 스물한살이에요. 스물한살 처녀한테 이러시면 죄받겠죠? 더군다나 당신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고 비록 노트북 없으면 못 쓰지만 이런 집도 구해서 글도 쓰고 하는 사람이잖아요?"
"야, 그동안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래? 너 올 때마다 내가 음식 해주고 음악 들려주고 했던 거 생각 안 나? 생각난다면 이러면 안되지. 너가 이러는 거 행패 부리는 거야. (-) 내가 나쁜 만만 먹었어도 정미소 지날 때 너 가만 안 뒀지. 근데 나 너한테 한번도 험하게는 안했잖아. (-) 내가 잘나가는 사람 같으면 뭐 이런 데서 이러고 있겠냐? 나도 (-) 너같이 돼먹지 못한 계집애한테 이런 수모를 당할 사람이 아니란 거 너 알어? 야, 내가 아무리 이런 집에서 이렇게 산다고 니 눈에 내가 거지로 보이냐? 이거 필요 없으니 가져가, 썅. 총년이 발랑 까져가지구서는. 에잇 재수없어."
나는 남자가 내던진 비닐봉지에서 쏟아져나온 나의 고추와 상추와 치커리와 가지를 수습했다. 손이 심하게 떨리고 심장은 그보다 더 떨렸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후드득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비에 젖어 걸을 때, 뒤에서 누군가도 비에 젖어 걸어오고 있었다. 칠흑같은 밤이다. 남자다. 대화를 나누는 걸로 봐서 두 사람이다. 나는 겁이 났다. (-) 나에게 융단폭격 같은 말폭격을 퍼부어대던 남자가 무섭고 칠흑같은 밤이 무섭고 내 뒤에 오는 누군가가 무서웠다. 나는 세상이 무섭다는 것을 그날 밤 뼈저리게 체험했던 것이다. 나는 소리없이 뛰었다. 그제야 눈물이 앞을 가렸다. 눈물이 앞을 가려, 발을 헛디뎠다. 신발이 벗겨지고 뭔가 날카로운 것이 발바닥을 찔렀다. 정미소 안으로 몸을 숨긴 뒤에야 나는 채소 봉지를 놓친 것을 알았다. 남자들이 정미소 앞에서 딱 멈추었다.
"잠깐만, 이게 뭘까?"
두 남자가 정미소 처마밑에서 뭔가를 펼치고 있었다. 나는 어둠속에 몸을 바짝 숨기고 숨을 죽였다.
"깐쭈, 그거 돈 아니야?"
"이건 고추야, 싸부딘. 상추도 있어. 월급날, 소주 마시고 삼겹살을 상추에 싸먹어.
생각만 해도 즐거운가. 깐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어둠속에 몸을 숨긴 채로 그러나 나도 모르게 입을 달싹여 남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불렀다.
노랫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쌀겨 냄새 가득한 정미소 안으로 스며들었다.
"싸부딘, 여기 상추도 있고 고추도 있어. 집에 고추장 있어. 소주는 사야 해. 삼겹살은 없어. 삼겹살도 사야 해. 우리 소주 마시자."
"좋아."
두 사람이 빗속으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명랑하게 사라졌다. 싸부딘과 깐쭈가 사라진 길 너머로 내가 지나온 길이 보였다. 그 길 너머 그 남자네 집이 보였다. 겨우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요동쳐오기 시작했다. 나는 노래 불렀다.
나는 정미소를 나섰다. 나는 빗속에서 악을 썼다.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나는 노래 불렀다. (-) 비를 맞으며 천천히, 뚜벅뚜벅, 명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