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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맥주 한 모금
필립 들레름 지음, 정택영 그림, 김정란 옮김 / 장락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물이 들어 있는 기념품 유리 구슬 속은 언제나 겨울이다. 유리 구슬을 손으로 흔들어 본다. 땅으로부터 태어난 소용돌이 속에서 눈은 천천히 떠돈다. 처음에는 불투명하고 흐릿하게. 그 다음에 눈송이는 점점 더 뜸해진다. 그리고 터키 블루색 하늘이 다시 멜랑콜리크하게 고정된다. 마지막 종이 새 몇 마리가 몇 초 동안 떠 있다가 떨어져 내린다. 솜 같은 게으름 때문에 새들은 다시 땅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구슬을 다시 내려놓는다. 무엇인가 달라졌다. 구슬 속에 들어 있는 풍경은 여전히 똑같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때부터 어떤 부름 소리 같은 것을 듣는다. 기념품 유리구슬들 안에는 늘 고만고만한 것들이 들어 있다. 해초와 물고기들이 헤엄 치는 깊은 바다, 에펠 탑, 맨해튼, 앵무새, 산 풍경, 생 미셀의 추억. 눈이 춤을 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춤을 멈춘다. 흩어지고, 꺼져 버린다. 겨울 무도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다. 그 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위에 눈송이 하나가 머물러 있다. 일상의 물로 지워지지 않는, 그러나 만질 수 없는 추억. 이곳에서 땅은 추억의 가벼운 꽃받침 위에 새처럼 앉아 있다.
(-) 이제 우리는 4월의 푸른 하늘을 이고 서 있는 에펠탑과, 움직이지 않는 바다를 질주하는 쾌속 범선을 본다. 모든 것은 무거운 명징함을 갖게 된다. 내벽 뒤쪽, 투명한 수면이 탑 위쪽에서 물결 치고 있다. 높은 고독의 왕국들, 장중한 골목, 물결치는 침묵 속에 숨어 있는 알아차릴 수 없는 미세한 움직임. 바탕은 천정까지, 하늘까지, 표면까지 우윳빛 나는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다. 인공적인 푸른빛. 존재하지 않는 색. 그 색의 지순한 행복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낮잠과 부재로 으깨진 오후가 시작될 무렵, 우리가 운명의 함정을 예감하는 것처럼. 우리는 손안에 세계를 들고 있다. 구슬은 아주 빨리 따스해진다. 펑펑 내리는 눈송이들이 나날의 삶 속에 숨어 있는 고뇌를 단번에 지워 버린다.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눈이 내린다. 다다를 수 없는 겨울, 가벼움이 무거움을 압도해 버리는 겨울에 내리는 눈. 물 밑바닥에 있는 눈은 부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