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몸을 얼얼하게 만드는 어떤 종류의 욕망이 있음을 예감했다. 지저분한 몰골의 젊은이를 올려다보며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구, 저 사람이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 감색 작업복은 하반신의 윤곽을 명료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부드럽게 움직이며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 같았다.
지극히 감각적인 의미에서 '비극적인 것'을 나는 그의 직업에서 느꼈다. '온몸을 바치고 있다'고 할 만한 어떤 느낌, 혹은 자포자기적인 느낌, 혹은 위험에 대한 친근한 느낌, 허무와 활력의 어지러운 혼합이라고 할 느낌
내 관능이 그것을 원하지만 내게는 영원히 거부된 어떤 장소에서, 나와는 관계없이 이어지는 생활이나 사건, 그런 사람들, 이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비극적인 것’의 정의였다. 거기에서 내가 영원히 거부되리라는 비애감이 (-) 하나의 꿈이 되어서, 가까스로 나는 나 자신의 비애를 통해 그곳에 끼어들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느꼈던 ‘비극적인 것’이란, 내가 그곳에서 거부당하리라는 데 대한 재빠른 예감이 몰고 온 비애의 투영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얼굴에는 뭔가 번들거리는, 마주 바라보기 두려운 피로가 있었다. 만지면 손끝에 은가루를 남기는 크리스마스 가면처럼, 그들의 얼굴에 손을 댄다면 한밤의 도회지가 그들에게 색칠한 그림물감의 색깔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새파랗게 질려 넋이 나간 듯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스륵 시선을 내려뜨렸다.
나는 깨달았다. 눈물이 번졌다.
그 순간 나는 무엇을 이해했고, 혹은 이해하도록 추궁당했던 것일까? (-) 사랑의 시선 아래 놓였을 때 고독이 얼마나 꼴사납게 보이는가
옛날이야기들을 섭렵하면서도 나는 왕녀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왕자만을 사랑했다. 살해당하는 왕자들, 죽음의 운명에 놓인 왕자들을 더욱 사랑했다. 살해되는 젊은 남자들이라면 모조리 사랑했다.
(-)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왕자들의 타이즈 차림과 그들의 잔혹한 죽음을 연결 지어 공상하는 일이 어째서 그토록 즐거운지
그곳에서는 나도 한 명의 ‘사내아이’이기를 요구했다. 내가 일곱 살 되던 이른 봄, (-) 그때까지 나는 생선이라면 넙치나 가자미, 도미 같은 흰살 생선밖에 알지 못했고, 감자는 으깨서 고운체에 거른 것만, 과자도 달콤한 앙금이 든 것은 안 되고 가벼운 비스킷이나 웨하스나 마른 과자뿐이었으며, 과일류는 얇게 썬 사과나 귤 조금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먹어본 등 푸른 생선(-)을 나는 몹시 신이 나서 먹었다. 그 맛은 일단 내게 어른 자격이 한 가지 주어졌다는 의미이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것을 느낄 때마다 반드시 어딘지 불편한 모종의 불안─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의 무게 또한 약간 씁쓸하게 혀끝에 느껴지기도 했다.
곧이어 노랫말이 띄엄띄엄 귀에 들어오는 노동요의 애달픈 곡조가 무질서한 축제의 웅성거림을 뚫고 그저 겉으로만 요란한 이 난장판의 참된 주제라 할 만한 것을 알려왔다. 그것은 인간과 영원의 지극히 비속한 만남, 어떤 경건한 난륜(亂倫)에 의해서밖에 성취되지 않는 만남의 슬픔을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
검정과 황금빛의 장엄한 대(大) 미코시가 다가왔다. 그것은 이미 먼 곳에서부터 꼭대기의 금빛 봉황이 이리저리 떠도는 물결 사이의 새처럼 웅성거림을 따라 눈부시게 뒤흔들리는 모습만으로도 일종의 번뜩이는 불안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그 미코시 주위에만 열대의 공기와도 같은 독한 무풍 상태가 떠돌았다. 그것은 악의를 담은 느릿함으로 젊은이들의 벌거벗은 어깨 위에서 뜨겁게 뒤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홍백의 굵은 밧줄, 검은 칠에 황금빛을 더한 난간, 빈틈없이 꽉 닫힌 금칠의 문짝 속에는 캄캄한 가로세로 넉 자의 어둠이 있어서, 구름 한 점 없는 초여름의 한낮 속에 끊임없이 상하좌우로 요동치며 도약하는 정사각의 텅 빈 밤이 공공연히 군림하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감했다. 노예의 체구와 왕자의 용모를 지닌 이 젊은이는 그저 스쳐 지나갈 나그네로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이 엔디미온은 양을 이끄는 목자라는 것을. 그는 어떤 목장보다 녹음 짙은 목장의 목자로서 선택된 자라는 것을.
눈은 거리 풍경의 상처를 감추는 지저분한 붕대처럼 보였다. 거리의 아름다움은 상처의 아름다움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학교 앞 역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아직 자리가 많이 빈 전차 창문 너머로 공장이 늘어선 거리 건너편에 느릿느릿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풍경은 기쁜 빛으로 가득 찼다. 불길하게 솟아오른 굴뚝들의 종렬(縱列), 단조로운 슬레이트 지붕의 어두운 기복이 아침 해를 받은 눈의 가면이 요란하게 깔깔거리는 웃음의 그늘에서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 눈에 빛이 반사되어 창백해진 얼굴의 행인들도 어쩐지 가담자들처럼 느껴졌다.
특유의 친밀함의 표현인 험상궂게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준 것이다! 그 웃는 얼굴을, 그 싱그러운 하얀 치아를 나는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 그의 웃음이 ‘들켜버렸다’는 약점을 얼버무리기 위한 웃음이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아니, 내가 그려왔던 그의 영상에 큰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나는 눈 위에 그려진 거대한 그의 이름 OMI를 본 순간, 그의 고독을 구석구석까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해했다. 그가 이렇게 아침 일찍 학교에 나온 이유, 그 자신도 자세히는 알지 못할 본질적인 그 동기까지도 이해했다.
거기 있는 것은 한 벌의 야만스러운 영혼의 의상이었다. 어느 누가 그에게서 ‘내면’을 기대할 것인가. 그에게 기대할 것은 우리가 먼 과거에 놓아두고 온 알 수 없는 완전성의 모형뿐이었다.
(-) 그가 서적 따위에 흥미를 갖는 것, 그러다가 어떤 어설픈 구석을 내보이는 것, 그가 자신의 무의식적인 완전성을 싫어하게 되는 것, 그런 갖가지 예측이 나로서는 괴로웠기 때문이다.
수업중에도, 운동장에서도 끊임없이 그의 모습을 훔쳐보는 동안 나는 그의 완전무결한 환영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 나는 다른 무수히 많은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거기에 있는 무한한 다양성과 미묘한 뉘앙스였다. 즉 나는 그에게서 이런 것들을 찾아냈다. 생명력의 완전함에 대한 정의를, 그의 눈썹을, 그의 이마를, 그의 눈을, 그의 코를, 그의 귀를, 그의 볼을, 그의 광대뼈를, 그의 입술을, 그의 턱을, 그의 목울대를, 그의 목구멍을, 그의 혈색을, 그의 피부색을, 그의 힘을, 그의 가슴을, 그의 손을, 그밖의 무수한 것들을.
“내가 할 거야.”
나는 자신이 그렇게 말해버리는 순간을, 차츰 커져가는 가슴의 고동으로 정확히 짚어냈다. 내가 욕망에 패하고 마는 순간은 항상 그랬다. 내가 그곳에 나가 통나무에 올라가 서리라는 것이, 나로서는 피하기 힘든 행동이라기보다는 예정된 행동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오미는 멋진 몸의 주인이 곧잘 내보이는 불손하고 짐짓 느리터분한 몸짓으로 모래 위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 그 위로는 언뜻 그림자를 떨어뜨린 5월의 구름이며 푸른 하늘이 싸늘한 모멸 뒤에 깃들어 있었다. (-)
“와아!”
급우들의 탄성이 둔중하게 떠돌았다. 그의 힘찬 철봉 기술에 대한 탄성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가슴을 쳤다. 그것은 젊음에 대한, 생명에 대한, 우월에 대한 탄성이었다.
생명력, 단지 생명력의 무익한 엄청남이 소년들을 압도하고 굴복시킨 것이다. 생명 속에 내재된 어떤 과도한 느낌, 폭력적인, 완전히 생명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무목적의 느낌, 이 일종의 불쾌하고도 낯선 충일이 그들을 압도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달랐다. (-) 내 마음을 점령한 것은 순진무구한 환희만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싶어 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을 텐데 그것을 본 충격이 도리어 생각지도 못한,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발굴해낸 것이었다.
그것은 질투였다─
목욕을 할 때 나는 오랫동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은 내 벗은 몸을 무뚝뚝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마치 나중에 자라면 백조가 될 거라고 믿는 새끼오리와도 같았다. 이것은 그 영웅적인 동화의 주제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내 어깨가 언젠가는 오미의 어깨를 닮고 내 가슴이 언젠가 오미의 가슴과 비슷해지리라는 기대를, (-) 억지로 찾아보는 동안에, 엷은 얼음장 같은 불안은 여전히 내 마음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그것은 불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자학적인 확신, ‘나는 절대로 오미를 닮을 수 없다’는 신탁과도 같은 확신이었다.
사랑의 아주 깊은 내면에는 한 치의 다름도 없이 상대를 닮고 싶다는 불가능한 열망이 흐르는 게 아닐까. 이 열망이 인간을 몰아세워서,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반대의 극점으로부터 가능하게 만들려고 무익한 몸부림을 치는 저 비극적인 이반(離反)으로 인도하는 게 아닐까.
여름 한낮의 태양이 바다 표면에 끊임없이 따귀를 내리치고 있었다. 해안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현기증이었다. 바다 끝에는 저 여름 구름이 웅장하고 위대한, 슬픔에 잠기게 하는 예언자와도 같은 모습을 반쯤 바다에 담근 채 묵묵히 머물러 있었다. 구름의 근육은 설화석고처럼 창백했다.
기하 시간에 나는 교사들 중에서 가장 젊은 기하 교사 A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수영 선생을 한 적도 있다는 그는 바닷가의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어부와도 같은 굵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
(-) 그가 왼손에 든 칠판닦이로 칠판을 지우며 오른손에 든 분필로 방정식을 써내려가면, 나는 그의 등에 생기는 옷의 주름으로부터 <활을 당기는 헤라클레스>의 꿈틀거리는 등근육을 보았다.
나는 ‘여자’라는 단어에서 연필이라든가 자동차, 빗자루 같은 단어에서 받는 것 이상의 특별한 인상을 감각적으로는 일절 받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느꼈다. 그렇지 않은가. 여행 준비로 정신이 없을 때만큼 우리가 여행을 구석구석까지 완전하게 소유하는 때는 없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그저 이 소유를 망가뜨리는 작업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이 여행이라는 저 완벽한 헛소동인 것이다.
나는 어떤 달콤한 기대로 죽음을 기다려 마지않았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내게는 미래가 너무나 버거웠던 것이다. 인생은 처음부터 의무관념으로 나를 조여왔다. 내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면서도 인생은 나를 의무 불이행이라는 이유로 마구 힐책하는 것이었다. 이런 인생을 죽음으로 골탕 먹인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구사노의 입대가 바로 목전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에, 그의 귀에 울리는 것은 아마도 단지 옆방의 피아노 소리가 아니라 그가 앞으로 이별해야 할 ‘일상적인 것’에 대한 모종의 볼품없고 안타까운 아름다움이었다. 그 피아노의 음색에는 요리책을 보며 서투르게 만든 과자처럼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구석이 있어서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순간 나에게로 다가오는 소노코를 바라보는 사이 내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덮쳐들었다. 전에 없던 감정이었다. 내 존재의 가장 밑바닥까지 뒤흔들리는 듯한 슬픔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거짓된 육감의 인공적인 합금으로 이루어진 감정으로만 여자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두세 마디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쾌활하게 행동하려 했고 온 힘을 다해 기지 넘치는 청년이 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러는 나를 증오했다.
열차가 떠나갈 때마다 내 뺨에 되살아나는 햇볕의 평화로움에 나는 전율했다. 이토록 넘치게 은혜로운 햇볕이 내 위에 있고, 이토록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시간이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은 어떤 불길한 조짐, 이를테면 몇 분 뒤에 돌연 공습이 시작돼 우리가 선 자리에서 그대로 폭사한다든지 하는 일이 기다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는 한 줌의 행복조차 은총이라 생각하는 악습에 젖어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미소에서는 줄리엣의 두 볼을 물들인 저 ‘외설스러운 피’가 느껴졌다. (-) 내 마음이 문득 행복에 취하는 것은 이런 순간이었다. (-) 그것은 지금 나를 쓸쓸한 집요함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소노코를 심연(深淵)처럼 느꼈다.
소노코는 몹시 활기차 보였다. (-) 소설에 나오는 사랑에 빠진 여인, 바로 그 모습 자체였다. 그녀의 그런 한결같은 여성스러움을 직접 마주하자, 나는 아무리 명랑함을 가장하려 해도 그 아름다운 영혼을 포옹할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너무도 명료하게 느껴져 말마저 더듬거릴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 응시(凝視)에서 수렴된 고통이 갑작스럽게 내게 찾아왔다. 고통은 이렇게 고하는 것이었다. ‘너는 인간이 아니다. 너는 남과 섞일 수 없는 몸이다. 너는 인간이 될 수 없는 기묘하고 서글픈 생물이다.’
밀회의 미묘한 긴장과 정결한 견제 같은 것이 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쳐서, 참으로 부서지기 쉬우나 대단히 투명한 질서를 내 삶에 몰고 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지탱하고 있지만, 그 무언가는 있다고 믿으면 있고 없다고 믿으면 잃어버릴 듯한, 일종의 기체와도 같은 물질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찰나에 그때까지 꾸었던 즐거운 꿈을 잃기 싫어 다시 자보려고 애쓰지만, 그 애타는 노력 때문에 오히려 더 말똥말똥해져서 결국 꿈을 잃고 말았을 때의 기분, 그 빤하게 가르고 들어오는 각성의 불안, 그 깨어나는 순간에 느끼는 꿈의 허망한 열락, 그런 것들이 우리 마음속을 질 나쁜 병균처럼 파먹고 있음을 나는 간파했다.
이 고통은 회한조차도 아니고, 어딘가 이상하게 명석한, 이른바 창문을 통해 거리를 구획하는 강렬한 여름 햇빛을 한없이 내려다보라는 명령을 받기라도 한 듯한 고통이었다.
보이가 다가와 물을 닦아냈다. 젖은 식탁보가 닦여나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우리를 비참한 기분으로 몰아넣었다. (-) 여름 거리가 짜증스럽게 붐볐다. 가슴을 활짝 편 당당한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지나갔다. 나는 온갖 것에서 모욕감을 느꼈다. 모욕은 여름의 쨍쨍한 햇볕처럼 나를 지글지글 태우는 것이었다.
젊은 사내에게로 내 눈길이 가 닿았다. 스물두세 살의 거칠기 짝이 없지만 거무스레한 빛으로 정돈된 얼굴의 젊은이였다. 그는 반라의 모습으로 땀에 젖어 엷은 쥐색을 띠는 빛바랜 하라마키를 풀어 다시 배에 두르는 중이었다. 쉴새없이 친구의 말에 참견하고 함께 시시덕거리며 그는 일부러 느릿느릿 하라마키를 배에 감아나갔다. 벗은 가슴은 충실하고 탄탄한 근육으로 불룩거리고, 깊고 입체적인 근육이 만들어내는 움푹 팬 도랑이 가슴팍 한가운데서부터 배 쪽으로 흘러갔다. 옆구리에는 굵은 밧줄 같은 근육의 사슬이 양쪽에서 조여들어 엉켜 있었다. 부드럽고 뜨겁고 질량감 넘치는 몸통을 그는 더럽고 빛바랜 하라마키를 팽팽히 당겨가며 단단히 감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어깨는 기름칠을 한 듯 번들거렸다.
“이제 오 분 남았네요.”
소노코의 높고 애절한 목소리가 내 귀를 찔렀다. 나는 흠칫 놀라 그제야 새삼스럽게 소노코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잔혹한 힘에 의해 두 쪽으로 갈라졌다. 번개가 떨어져 생나무가 쪼개지듯이. 내가 지금까지 온 영혼을 기울여 쌓아올린 건축물이 참혹하게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나라는 존재가 뭔가 무시무시한 ‘부재(不在)’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을 본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아주 짧은 순간에 내 가면으로 다시 돌아와, 얼어붙을 듯한 의무관념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나갈 시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한번 해가 들이치는 의자 쪽을 훔쳐보았다. 그새 그들은 춤추러 나갔는지 텅 빈 의자만 내리쬐는 햇빛 아래 덩그러니 놓였고, 탁자 위에 흘러내린 음료수가 번쩍번쩍 무시무시한 반사광을 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