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
루이제 린저 지음, 전혜린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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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누구든지 의욕을 갖기를 그치면 늙기 시작하는 거야. 얼마 전까지도 나는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침마다 일어났어. 나는 마치 아침마다 문간에 서서 코를 바람 속에서 벌름거리면서 사냥에의 욕망으로 떠는 사냥개와도 같았어. 그런데 지금은 나는 이미 나 자신에게 있어서 조금도 의외의 무엇을 갖고 있지 않아. 그리고 인생은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네 개의 벽이 있는 공간이야.

 

 

  나는 니나가 내 옆에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다가앉아서 한숨을, 기쁨과 해방의 한숨을 내쉬던 순간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달려가던 시골을 뒤덮고 있던 광선, 늦가을의 갈색과 보랏빛이 섞인 광선, 이 달콤하고 죽음에 중독돼 있는 광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행복했다. 이 시간, 이 한 시간 동안은 행복했다. 그리고 갑자기 미친 듯한 멋있는 유혹이 나를 엄습해 왔다. 왜 우리는 이 시간에 둘이 다 기쁨에 충만하여 딴생각은 없이 행복할 때 살기를 그칠 수 없는 것일까? 이날처럼 조화된 날은 다시는 안 올 것이고 매일은 다만 손실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니나는 때때로 특히 대답의 끝 무렵에 퉁명한 자존심의 막을 뚫고 한줄기 호의와 따스함을 보였다. 내가 이 호의를 과대평가하거나 또는 오해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을 나는 처음에는 스스로 금하고 있었다. 어쩌면 니나의 성격은 최근에 일반적으로 더 따뜻하고 부드러워진 것이고 이 따뜻함은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한테 해당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우선 나는 마치 몇 달이나 계속된 가뭄 뒤에 첫 번째 빗방울이 죽은 줄 알았던 싹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본 농부의 아직 의심스러운 긴장된 환희와도 비슷한 나의 기쁨 속에 잠겨 있고 싶다. 너무나 오랜, 희망 없었던 기다림 위에 딱딱하게 떨어진 아픈 기쁨이었다.

 

 

  더 강하게 감동되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손해다. 그의 감정이 어디서나 방해가 되어서 그의 정열에 걸려서 넘어지고 패배할 때마다 자기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의 찬스는 번번이 더 적어지고 그의 감정은 그와 반비례되게 커간다.

 

 

  얼마 전에 댁에 찾아갔을 때 나는 얘기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더 가난하고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

 

  나는 자유롭게 있어야만 한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분명히 알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몇백 개의 가능성이 내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모든 것은 나에게 있어서 아직 미정이고 아주 시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무엇에나를 고정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나를 아직 모릅니다. (-) 정말로 모릅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제공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만큼 어리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만 당신을 불행하게 했을 뿐일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경험도 없지만 그것을 알 수 있어요.

  (-) 아주 정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글을 쓰겠다는 욕망 이외에는 아무 욕망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작은 죽은 도시에서 끊임없이 죽어가는 노파 옆에서 소금 포대와 식초통 가운데서의 생활을 견디어나간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내가 이 모든 외적인 것에 완전히 무관심하지 않았던들?

 

 

  독자들! 이라고 니나는 내던지듯이 말했다. 독자는 오락을 요구하고 있어. 작가는 따라가기 쉬운 안이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거야. 처음에는 이것이 일어나고 다음에는 저것, 그러고는 그것. 그렇게 해서 맨 끝에는 행복하건 불행하건 관계없이 하여간 둥근 결말이 있어야 해.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가야 돼.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고 있어. 인생에서는 어떤 계산도 들어맞는 법이 없고 아무런 결말을 갖고 있지 않는데도. 결혼도 아니고 죽음도 다만 외관상 결말에 불과해.

  생은 계속해서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그렇게도 혼란하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고 모든 게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그런데 사람은 거기서 작은 조각을 끌어내서 현실에는 있을 수 없고 모든 생의 복잡성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인 조그마한 알뜰스러운 설계도에 따라서 건축하고 있어. 모두가 다 꾸며진 사진에 불과해. 내 소설도 마찬가지야.

 

  (-) 고쳐야겠어. 나는 내 소설을 전부 세 번이나 네 번 다시 써. 나는 소재가 자기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맷돌에 갈고 또 갈아. 그렇지만 난 지금은 시간이 없어. 아니면 마음의 안정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있는 거야. 시간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아.

 

  한나는 톱밥을 태웠다, 로 끝내겠어. 그게 옳아. (-) 그 이하의 문장은 우리 같은 사람들 머리에 곧잘 떠오르는 예의 결말에 불과해. 결말을 짓는 커다란 제스처, 독자 앞에서의 우아한 인사야. 자, 인제는 박수하거라, 끝났으니까. 우리는 모두 허영심이 있어. 그렇지만 난 허영심을 갖고 싶지 않아.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섭게 조심해야 돼. 이런 값싼 효과를 자신에 허용할 때 우리는 빨리 타락해버리는 거야. (-)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다만 때때로 영웅 노릇을 해볼 뿐이지. 우리는 모두 약간 비겁하고 계산 빠르고 이기적이고 위대함에서는 먼 존재야. 그리고 나는 바로 그걸 그리고 싶었어. 우리가 동시에 선량하고 또 악하고 영웅적이고도 비겁하고 인색하고도 관대하다는 것, 모든 것이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어서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에게 나쁜 짓이든 좋은 짓이건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싶었어. (-)

 

 

  자정이다. 나는 굉장히 부드러운 피곤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여태까지 몰랐던 놀라운 긴장의 회복이고, 내 사지와 감각의 달콤한 해체와도 같은 피곤이다. 그럼 인간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나는 앞으로도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인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나는 내 생명을 니나의 손에서 받아들인다.

 

 

 

 

  1933년 10월 28일

  -우리의 짧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너무나 아름다운, 완전한 날들을 겪었기 때문에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다. (-) 이러한 날들에 반복이나 지속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경험과 생의 원칙에 위반되는 생각이라는 (-) 전율을 느낀다. (-)

  니나는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 산엔 첫눈이 덮여 있었으나 골짜기는 낮에는 따뜻해서 뜰에서 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너무 익은 마지막 산딸기를 따기 위해서 산허리를 종종 돌아다녔다. 이것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지 않은 일이었던가? (-) 나는 산다. 나는 산다. 백 배나 더.

 

 

 

  (-) 오늘 오후는 이별을 용이하게 만들어주었다. 진부한 맛이 내 혀 위에 얼마 동안 남아 있다가는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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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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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이 두 가지 특성이 몸에 밴 채로는 성공할 턱이 없다, 아니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내면적인 성공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내면의 성공이 무슨 소용인가? 내면에서 이룩한 것들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기라도 하는가? 나는 정말이지 부자가 되고 싶다.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돈을 물 쓰듯 써보고 싶다. (-)

 

 

이곳 벤야멘타 학원에서는 상실감을 느끼는 법과 견디는 법을 배운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능력,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유능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저 덩치 큰 아기, 칭얼대기만 하는 울보로 남을 것이다. 우리 훈련생들은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삶의 희망들을 가슴속에 품는 것이 우리에게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느긋하고 밝다. (-)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들은 많다. 그것은 우리가 대체로 매우 열성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감을 잃게 되거나 모욕을 당하게 될 때 위태롭다. 자의식에 찬 사람들은 의식에 적대적인 무언가를 끊임없이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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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2 - 히말라야의 여신
현경 지음 / 열림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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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어떤 기독교인들도 공공장소에서 나에게 이렇게 인사하지 않을 뿐더러 나 또한 이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렇게 인사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내 앞에 나타난 남자는 내가 아는 마르고, 예민하고, 불타는 눈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가 아니었다. 5년 동안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뚱뚱하고, 부흥사 아저씨들의 갈라진 목소리를 가진, 평범해 보이는 보수적인 목사였다. 이 더운 날 까만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에, 까만 넥타이까지 맨 남자. 그 앞에 앉아 있는 목이 깊이 파인 복숭아색 여름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는 너무나 '종류가 다른' 거룩한 목사님이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마주 앉아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무슨 비극적 희극의 한 장면 같았다. (-)

 

 

 

  (-) 그는 메뉴를 내밀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시키라고 했다. 유니언 신학교 교수가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저녁을 살 테니까 편하게 주문하라고 했다. 그는 내게 항상 이렇게 너그럽게 주고 또 주는 남자였다. 해군장교 첫 월급을 몽땅 털어 이화여대 앞에서 정장 한 벌 없는 가난한 여학생이었던 내게 예쁜 정장을 맞추어주던 일이 생각났다. 잠깐 동안 눈앞이 흐려진다. 울면 안 된다. 태연한 척하며 음식을 주문하고, 그 동안 서로에게 일어났던 '공식적인' 변화들에 대해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무르익고 저녁식사가 끝날 때쯤 되자 그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했다.

 

  "저 보고 싶지 않았어요?"

 

  갑자기 말문이 꽉 막혔다. 보고 싶지 않았냐고? 그와 별거를 시작한 89년부터 너무나 그를 그리워했다. 그 다음 몇 년 간 울며 다녔다. 젊은 연인들만 보면 눈물이 맺혔고,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가는 부부들을 보면 아무 데서나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수많은 외로운 밤에 그를 안고 싶어서, 그가 너무 그리워 팔이 끊어지듯 아팠었다. 이혼을 한 후,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려고 전 세계로 남편감을 찾아다닐 때, 새로운 남자와 데이트를 시작하면 한동안 항상 그가 생각났다. 어떤 남자도 그처럼 순수하지 않았고, 그처럼 일편단심이지 않았고, 그처럼 나를 '여신'같이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남자도 그처럼 여자를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과감하게 던지지 않았다. 그는 나의 사랑의 '입맛'을 버리게 만들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와 헤어진 게 아니었다. 그와 함께 살 수 없어서 헤어진 것이다. 우리가 계속 같이 있다가는 우리 중에 한 사람이 꼭 죽어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부부로서의 인연은 끝났다. 전 남편과 만나서 무드 잡고 싶지 않았다. (-)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다. 항상 퇴근길에 꽃을 사 오던 남자. 꽃을 들고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던 남자. 자다가도 "여보, 사랑해!"하고 잠꼬대를 하던 남자. 나도 어떨 땐 이 외롭고 힘든 독신 생활을 청산하고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다. 천둥 치고 비 오는 날 놀라서 잠을 깨도 항상 나를 품에 안고 있던 남자.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나를 한없이 바라보던 남자. 그의 시선에 눈을 뜨면 "당신이 너무 예뻐서. 당신은 작품이야."하고 말해주던 남자. 나도 그 따뜻하고 포근한 부부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는 이제 건널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가 있다. 그와 나는 더 이상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같은 정신적 우주에서 살지 않는다. (-)

 

 

 

  시간이 늦어 이제 집에 가야 할 것 같다고 그에게 말했다. 택시를 타고 가겠다는 나를 그가 굳이 데려다주겠다고 우겼다. 그의 차를 타고 뉴욕의 거리를 달린다. 침묵이 흘렀다. 항상 차 속에서 새들처럼 재잘거리던 우리였다. 긴 침묵 속에서 집 앞에까지 달려왔다. 갑자기 이제 보면 다시는 이 남자를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울면서 그에게 두서 없이 이말 저말을 했다.

 

  난 당신을 정말 사랑했었다고. 그리고 당신은 너무나 좋은 애인이고 남편이었다고. 이제는 당신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고. 당신을 지금도 사랑하지만 우리는 같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더 이상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당신 가슴을 뛰게 하지 않고, 당신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고. 나는 당신의 보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에너지의 장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생존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속으로 매일 죽어갈 거라고. 이제 제발 나를 잊고 혼인하라고. (-)

 

  그에게 횡설수설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잘 알았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눈물로 온통 젖은 얼굴과 몸으로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God bless you!" 그의 차에서 내려 차가 안 보일 때까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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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다닐 하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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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무슨 노래인가 부르려고 했을 때,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엄마는 놀라서 벌떡 뛰쳐일어나 분명히 누군가 밖에서 창문을 들여다보는 것을 봤다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파트는 삼층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인이나 골리앗이라면 몰라도, 보통 사람이 밖에서 창문 안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

"누군가 창 밖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겠어." 엄마가 소리쳤다.

(-)

아빠는 당혹스러워 양팔을 벌렸다.

"여기 봐." 창문으로 다가가 양쪽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아빠가 엄마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칼라가 달린 더러운 옷을 입고 손에 식칼을 들고 창을 통해 안으로 기어들어 오려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아빠는 서둘러 쾅 하고 창문을 닫았다. "아무도 없잖아."

그러나 칼라가 달린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창 밖에 서 있다가 방을 들여다보고, 마침내 창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했다.

엄마는 너무나 흥분했다. 그녀는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켜 꽈당 하고 넘어졌지만, 아빠가 가져다 준 술을 좀 마시고 버섯을 좀 먹고 나서 진정했다.

아빠는 곧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다시 모두 식탁에 앉아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

갑자기 아빠가 화가 나 낯을 시뻘겋게 붉히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뭐! 뭐라구! 너희는 나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너희는 나를 인생 낙오자 보듯이 하고 있어! 나는 너희들 밥이나 축내는 식충이가 아니야! 너희들이야 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야!" 아빠가 소리쳤다.

(-)

그리고 아빠는 식당에 앉아 큰소리로 욕을 퍼붓다가, 아침이 되자 서류뭉치를 챙겨들고 하얀 모자를 쓰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일터로 갔다. <1929년 5월 31일)

 


지금 나는 졸리지만 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이야기를 쓸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느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제 이미 다 생각해 놓았다. 이것은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는 우리 시대에 사는, 기적을 행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를 아파트에서 쫓아낸다. 손가락 하나만 흔들면, 그 아파트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아파트에서 고분고분 떠나 교외에 있는 헛간에서 지낸다. 그는 이 낡은 헛간을 아름다운 벽돌집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헛간에서 살다가, 평생 동안 단 한 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은 채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어느 날 오를로프는 으깬 완두콩을 너무 많이 먹어서 죽었다. 이 사실을 안 끄를로프도 역시 죽었다. 쓰삐리도노프는 저절로 죽었다. 스삐리도노프의 부인은 찬장에서 떨어져 역시 죽었다. 스삐리도노프의 아이들은 연못 속에 빠져 죽었다. 쓰삐리도노프의 할머니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 길을 떠났다.

 


한 노파가 지나친 호기심 때문에 창문에서 굴러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다른 노파가 창에서 몸을 쑥 내밀고 산산조각난 노파가 있는 아래를 보기 시작했는데, 지나친 호기심 때문에 역시 창문에서 굴러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 노파가 창문에서 떨어졌고, 네 번째, 또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노파가 떨어졌을 때, 나는 그들을 쳐다보는 데 싫증이 나서, 말쩹스키 장터에서 누군가 어떤 장님에게 털실로 짠 목도리를 주었다고들 하기에 그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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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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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몸을 얼얼하게 만드는 어떤 종류의 욕망이 있음을 예감했다. 지저분한 몰골의 젊은이를 올려다보며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구, 저 사람이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 감색 작업복은 하반신의 윤곽을 명료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부드럽게 움직이며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 같았다.

 


지극히 감각적인 의미에서 '비극적인 것'을 나는 그의 직업에서 느꼈다. '온몸을 바치고 있다'고 할 만한 어떤 느낌, 혹은 자포자기적인 느낌, 혹은 위험에 대한 친근한 느낌, 허무와 활력의 어지러운 혼합이라고 할 느낌


내 관능이 그것을 원하지만 내게는 영원히 거부된 어떤 장소에서, 나와는 관계없이 이어지는 생활이나 사건, 그런 사람들, 이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비극적인 것’의 정의였다. 거기에서 내가 영원히 거부되리라는 비애감이 (-) 하나의 꿈이 되어서, 가까스로 나는 나 자신의 비애를 통해 그곳에 끼어들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느꼈던 ‘비극적인 것’이란, 내가 그곳에서 거부당하리라는 데 대한 재빠른 예감이 몰고 온 비애의 투영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얼굴에는 뭔가 번들거리는, 마주 바라보기 두려운 피로가 있었다. 만지면 손끝에 은가루를 남기는 크리스마스 가면처럼, 그들의 얼굴에 손을 댄다면 한밤의 도회지가 그들에게 색칠한 그림물감의 색깔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새파랗게 질려 넋이 나간 듯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스륵 시선을 내려뜨렸다.

나는 깨달았다. 눈물이 번졌다.

그 순간 나는 무엇을 이해했고, 혹은 이해하도록 추궁당했던 것일까? (-) 사랑의 시선 아래 놓였을 때 고독이 얼마나 꼴사납게 보이는가


옛날이야기들을 섭렵하면서도 나는 왕녀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왕자만을 사랑했다. 살해당하는 왕자들, 죽음의 운명에 놓인 왕자들을 더욱 사랑했다. 살해되는 젊은 남자들이라면 모조리 사랑했다.

(-)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왕자들의 타이즈 차림과 그들의 잔혹한 죽음을 연결 지어 공상하는 일이 어째서 그토록 즐거운지

 

그곳에서는 나도 한 명의 ‘사내아이’이기를 요구했다. 내가 일곱 살 되던 이른 봄, (-) 그때까지 나는 생선이라면 넙치나 가자미, 도미 같은 흰살 생선밖에 알지 못했고, 감자는 으깨서 고운체에 거른 것만, 과자도 달콤한 앙금이 든 것은 안 되고 가벼운 비스킷이나 웨하스나 마른 과자뿐이었으며, 과일류는 얇게 썬 사과나 귤 조금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먹어본 등 푸른 생선(-)을 나는 몹시 신이 나서 먹었다. 그 맛은 일단 내게 어른 자격이 한 가지 주어졌다는 의미이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것을 느낄 때마다 반드시 어딘지 불편한 모종의 불안─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의 무게 또한 약간 씁쓸하게 혀끝에 느껴지기도 했다.


곧이어 노랫말이 띄엄띄엄 귀에 들어오는 노동요의 애달픈 곡조가 무질서한 축제의 웅성거림을 뚫고 그저 겉으로만 요란한 이 난장판의 참된 주제라 할 만한 것을 알려왔다. 그것은 인간과 영원의 지극히 비속한 만남, 어떤 경건한 난륜(亂倫)에 의해서밖에 성취되지 않는 만남의 슬픔을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

검정과 황금빛의 장엄한 대(大) 미코시가 다가왔다. 그것은 이미 먼 곳에서부터 꼭대기의 금빛 봉황이 이리저리 떠도는 물결 사이의 새처럼 웅성거림을 따라 눈부시게 뒤흔들리는 모습만으로도 일종의 번뜩이는 불안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그 미코시 주위에만 열대의 공기와도 같은 독한 무풍 상태가 떠돌았다. 그것은 악의를 담은 느릿함으로 젊은이들의 벌거벗은 어깨 위에서 뜨겁게 뒤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홍백의 굵은 밧줄, 검은 칠에 황금빛을 더한 난간, 빈틈없이 꽉 닫힌 금칠의 문짝 속에는 캄캄한 가로세로 넉 자의 어둠이 있어서, 구름 한 점 없는 초여름의 한낮 속에 끊임없이 상하좌우로 요동치며 도약하는 정사각의 텅 빈 밤이 공공연히 군림하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감했다. 노예의 체구와 왕자의 용모를 지닌 이 젊은이는 그저 스쳐 지나갈 나그네로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이 엔디미온은 양을 이끄는 목자라는 것을. 그는 어떤 목장보다 녹음 짙은 목장의 목자로서 선택된 자라는 것을.


눈은 거리 풍경의 상처를 감추는 지저분한 붕대처럼 보였다. 거리의 아름다움은 상처의 아름다움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학교 앞 역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아직 자리가 많이 빈 전차 창문 너머로 공장이 늘어선 거리 건너편에 느릿느릿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풍경은 기쁜 빛으로 가득 찼다. 불길하게 솟아오른 굴뚝들의 종렬(縱列), 단조로운 슬레이트 지붕의 어두운 기복이 아침 해를 받은 눈의 가면이 요란하게 깔깔거리는 웃음의 그늘에서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 눈에 빛이 반사되어 창백해진 얼굴의 행인들도 어쩐지 가담자들처럼 느껴졌다.


특유의 친밀함의 표현인 험상궂게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준 것이다! 그 웃는 얼굴을, 그 싱그러운 하얀 치아를 나는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 그의 웃음이 ‘들켜버렸다’는 약점을 얼버무리기 위한 웃음이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아니, 내가 그려왔던 그의 영상에 큰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나는 눈 위에 그려진 거대한 그의 이름 OMI를 본 순간, 그의 고독을 구석구석까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해했다. 그가 이렇게 아침 일찍 학교에 나온 이유, 그 자신도 자세히는 알지 못할 본질적인 그 동기까지도 이해했다.


거기 있는 것은 한 벌의 야만스러운 영혼의 의상이었다. 어느 누가 그에게서 ‘내면’을 기대할 것인가. 그에게 기대할 것은 우리가 먼 과거에 놓아두고 온 알 수 없는 완전성의 모형뿐이었다.

(-) 그가 서적 따위에 흥미를 갖는 것, 그러다가 어떤 어설픈 구석을 내보이는 것, 그가 자신의 무의식적인 완전성을 싫어하게 되는 것, 그런 갖가지 예측이 나로서는 괴로웠기 때문이다.

수업중에도, 운동장에서도 끊임없이 그의 모습을 훔쳐보는 동안 나는 그의 완전무결한 환영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 나는 다른 무수히 많은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거기에 있는 무한한 다양성과 미묘한 뉘앙스였다. 즉 나는 그에게서 이런 것들을 찾아냈다. 생명력의 완전함에 대한 정의를, 그의 눈썹을, 그의 이마를, 그의 눈을, 그의 코를, 그의 귀를, 그의 볼을, 그의 광대뼈를, 그의 입술을, 그의 턱을, 그의 목울대를, 그의 목구멍을, 그의 혈색을, 그의 피부색을, 그의 힘을, 그의 가슴을, 그의 손을, 그밖의 무수한 것들을.

“내가 할 거야.”

나는 자신이 그렇게 말해버리는 순간을, 차츰 커져가는 가슴의 고동으로 정확히 짚어냈다. 내가 욕망에 패하고 마는 순간은 항상 그랬다. 내가 그곳에 나가 통나무에 올라가 서리라는 것이, 나로서는 피하기 힘든 행동이라기보다는 예정된 행동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오미는 멋진 몸의 주인이 곧잘 내보이는 불손하고 짐짓 느리터분한 몸짓으로 모래 위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 그 위로는 언뜻 그림자를 떨어뜨린 5월의 구름이며 푸른 하늘이 싸늘한 모멸 뒤에 깃들어 있었다. (-)

“와아!”

급우들의 탄성이 둔중하게 떠돌았다. 그의 힘찬 철봉 기술에 대한 탄성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가슴을 쳤다. 그것은 젊음에 대한, 생명에 대한, 우월에 대한 탄성이었다.

생명력, 단지 생명력의 무익한 엄청남이 소년들을 압도하고 굴복시킨 것이다. 생명 속에 내재된 어떤 과도한 느낌, 폭력적인, 완전히 생명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무목적의 느낌, 이 일종의 불쾌하고도 낯선 충일이 그들을 압도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달랐다. (-) 내 마음을 점령한 것은 순진무구한 환희만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싶어 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을 텐데 그것을 본 충격이 도리어 생각지도 못한,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발굴해낸 것이었다.

그것은 질투였다─


목욕을 할 때 나는 오랫동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은 내 벗은 몸을 무뚝뚝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마치 나중에 자라면 백조가 될 거라고 믿는 새끼오리와도 같았다. 이것은 그 영웅적인 동화의 주제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내 어깨가 언젠가는 오미의 어깨를 닮고 내 가슴이 언젠가 오미의 가슴과 비슷해지리라는 기대를, (-) 억지로 찾아보는 동안에, 엷은 얼음장 같은 불안은 여전히 내 마음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그것은 불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자학적인 확신, ‘나는 절대로 오미를 닮을 수 없다’는 신탁과도 같은 확신이었다.

사랑의 아주 깊은 내면에는 한 치의 다름도 없이 상대를 닮고 싶다는 불가능한 열망이 흐르는 게 아닐까. 이 열망이 인간을 몰아세워서,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반대의 극점으로부터 가능하게 만들려고 무익한 몸부림을 치는 저 비극적인 이반(離反)으로 인도하는 게 아닐까.


여름 한낮의 태양이 바다 표면에 끊임없이 따귀를 내리치고 있었다. 해안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현기증이었다. 바다 끝에는 저 여름 구름이 웅장하고 위대한, 슬픔에 잠기게 하는 예언자와도 같은 모습을 반쯤 바다에 담근 채 묵묵히 머물러 있었다. 구름의 근육은 설화석고처럼 창백했다.


기하 시간에 나는 교사들 중에서 가장 젊은 기하 교사 A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수영 선생을 한 적도 있다는 그는 바닷가의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어부와도 같은 굵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

(-) 그가 왼손에 든 칠판닦이로 칠판을 지우며 오른손에 든 분필로 방정식을 써내려가면, 나는 그의 등에 생기는 옷의 주름으로부터 <활을 당기는 헤라클레스>의 꿈틀거리는 등근육을 보았다.

나는 ‘여자’라는 단어에서 연필이라든가 자동차, 빗자루 같은 단어에서 받는 것 이상의 특별한 인상을 감각적으로는 일절 받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느꼈다. 그렇지 않은가. 여행 준비로 정신이 없을 때만큼 우리가 여행을 구석구석까지 완전하게 소유하는 때는 없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그저 이 소유를 망가뜨리는 작업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이 여행이라는 저 완벽한 헛소동인 것이다.

나는 어떤 달콤한 기대로 죽음을 기다려 마지않았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내게는 미래가 너무나 버거웠던 것이다. 인생은 처음부터 의무관념으로 나를 조여왔다. 내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면서도 인생은 나를 의무 불이행이라는 이유로 마구 힐책하는 것이었다. 이런 인생을 죽음으로 골탕 먹인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구사노의 입대가 바로 목전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에, 그의 귀에 울리는 것은 아마도 단지 옆방의 피아노 소리가 아니라 그가 앞으로 이별해야 할 ‘일상적인 것’에 대한 모종의 볼품없고 안타까운 아름다움이었다. 그 피아노의 음색에는 요리책을 보며 서투르게 만든 과자처럼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구석이 있어서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순간 나에게로 다가오는 소노코를 바라보는 사이 내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덮쳐들었다. 전에 없던 감정이었다. 내 존재의 가장 밑바닥까지 뒤흔들리는 듯한 슬픔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거짓된 육감의 인공적인 합금으로 이루어진 감정으로만 여자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두세 마디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쾌활하게 행동하려 했고 온 힘을 다해 기지 넘치는 청년이 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러는 나를 증오했다.


열차가 떠나갈 때마다 내 뺨에 되살아나는 햇볕의 평화로움에 나는 전율했다. 이토록 넘치게 은혜로운 햇볕이 내 위에 있고, 이토록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시간이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은 어떤 불길한 조짐, 이를테면 몇 분 뒤에 돌연 공습이 시작돼 우리가 선 자리에서 그대로 폭사한다든지 하는 일이 기다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는 한 줌의 행복조차 은총이라 생각하는 악습에 젖어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미소에서는 줄리엣의 두 볼을 물들인 저 ‘외설스러운 피’가 느껴졌다. (-) 내 마음이 문득 행복에 취하는 것은 이런 순간이었다. (-) 그것은 지금 나를 쓸쓸한 집요함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소노코를 심연(深淵)처럼 느꼈다.


소노코는 몹시 활기차 보였다. (-) 소설에 나오는 사랑에 빠진 여인, 바로 그 모습 자체였다. 그녀의 그런 한결같은 여성스러움을 직접 마주하자, 나는 아무리 명랑함을 가장하려 해도 그 아름다운 영혼을 포옹할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너무도 명료하게 느껴져 말마저 더듬거릴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 응시(凝視)에서 수렴된 고통이 갑작스럽게 내게 찾아왔다. 고통은 이렇게 고하는 것이었다. ‘너는 인간이 아니다. 너는 남과 섞일 수 없는 몸이다. 너는 인간이 될 수 없는 기묘하고 서글픈 생물이다.’

 

 

밀회의 미묘한 긴장과 정결한 견제 같은 것이 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쳐서, 참으로 부서지기 쉬우나 대단히 투명한 질서를 내 삶에 몰고 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지탱하고 있지만, 그 무언가는 있다고 믿으면 있고 없다고 믿으면 잃어버릴 듯한, 일종의 기체와도 같은 물질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찰나에 그때까지 꾸었던 즐거운 꿈을 잃기 싫어 다시 자보려고 애쓰지만, 그 애타는 노력 때문에 오히려 더 말똥말똥해져서 결국 꿈을 잃고 말았을 때의 기분, 그 빤하게 가르고 들어오는 각성의 불안, 그 깨어나는 순간에 느끼는 꿈의 허망한 열락, 그런 것들이 우리 마음속을 질 나쁜 병균처럼 파먹고 있음을 나는 간파했다.


이 고통은 회한조차도 아니고, 어딘가 이상하게 명석한, 이른바 창문을 통해 거리를 구획하는 강렬한 여름 햇빛을 한없이 내려다보라는 명령을 받기라도 한 듯한 고통이었다.

보이가 다가와 물을 닦아냈다. 젖은 식탁보가 닦여나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우리를 비참한 기분으로 몰아넣었다. (-) 여름 거리가 짜증스럽게 붐볐다. 가슴을 활짝 편 당당한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지나갔다. 나는 온갖 것에서 모욕감을 느꼈다. 모욕은 여름의 쨍쨍한 햇볕처럼 나를 지글지글 태우는 것이었다.


젊은 사내에게로 내 눈길이 가 닿았다. 스물두세 살의 거칠기 짝이 없지만 거무스레한 빛으로 정돈된 얼굴의 젊은이였다. 그는 반라의 모습으로 땀에 젖어 엷은 쥐색을 띠는 빛바랜 하라마키를 풀어 다시 배에 두르는 중이었다. 쉴새없이 친구의 말에 참견하고 함께 시시덕거리며 그는 일부러 느릿느릿 하라마키를 배에 감아나갔다. 벗은 가슴은 충실하고 탄탄한 근육으로 불룩거리고, 깊고 입체적인 근육이 만들어내는 움푹 팬 도랑이 가슴팍 한가운데서부터 배 쪽으로 흘러갔다. 옆구리에는 굵은 밧줄 같은 근육의 사슬이 양쪽에서 조여들어 엉켜 있었다. 부드럽고 뜨겁고 질량감 넘치는 몸통을 그는 더럽고 빛바랜 하라마키를 팽팽히 당겨가며 단단히 감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어깨는 기름칠을 한 듯 번들거렸다.

“이제 오 분 남았네요.”

소노코의 높고 애절한 목소리가 내 귀를 찔렀다. 나는 흠칫 놀라 그제야 새삼스럽게 소노코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잔혹한 힘에 의해 두 쪽으로 갈라졌다. 번개가 떨어져 생나무가 쪼개지듯이. 내가 지금까지 온 영혼을 기울여 쌓아올린 건축물이 참혹하게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나라는 존재가 뭔가 무시무시한 ‘부재(不在)’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을 본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아주 짧은 순간에 내 가면으로 다시 돌아와, 얼어붙을 듯한 의무관념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나갈 시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한번 해가 들이치는 의자 쪽을 훔쳐보았다. 그새 그들은 춤추러 나갔는지 텅 빈 의자만 내리쬐는 햇빛 아래 덩그러니 놓였고, 탁자 위에 흘러내린 음료수가 번쩍번쩍 무시무시한 반사광을 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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