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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 아시아 여성신학의 현재와 미래 ㅣ 아시아 신학 총서 7
정현경 외 지음 / 분도출판사 / 1994년 5월
평점 :
나는(-)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목격하고 빨리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화가와 같은 심정으로 아시아 여성들의 이야기와 시, 신학적인 글들을 모았다. 하지만 그 폭발이 너무나 급박하고 변화무쌍해서 아주 굵고 빠른 선으로 화산의 윤곽밖에 그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내 그림이 폭발의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했다고는 생각한다.
(-) 지도교수였던 제임스 콘(James Cone)은 “내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는 문제”에 대해 학위 논문을 쓰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는 “뭔가 심오한 것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아시아 여성들의 신학적인 지혜를 신뢰하고, 그것을 쉽고 단순하게 기술하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가난한 자들의 소리를 전하고 싶다면 제대로 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 베버리 해리슨(Beverly Harrison)과 그의 글들, 특히 「사랑의 일을 하는 데서 분노가 가지는 힘」(The Power of Anger for the Work of Love) 때문에 나는 유니온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니온 시절 그의 존재는 나의 분노를 진지하게 여겨야 하며, 그것을 나 자신에게 향하게 할 것이 아니라 “정의를 향한 열정”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늘 일깨워 주었다. (-)
신학을 한다는 것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행위이다. 한국 여성으로서 내가 신학을 하는 것은 통전성을 향한 나 자신의 투쟁과 자유를 향한 우리 민족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투쟁 속에서 완전한 인간됨의 의미를 추구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 한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분별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는 물론이고 나 자신의 해방 과정에 힘을 불어넣고 싶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고통과 기쁨, 투쟁과 해방의 이야기들은 늘 우리의 사회-정치적·종교-문화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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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나온 나의 신학 수업을 돌아보면 유럽과 북미의 백인 신학이 지닌 식민주의적·신식민주의적 요소를 파헤치고, 거기에 대해 반응하는 데 나의 신학 교육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백인들의 학문적 장에서는 나 자신의 신학을 세우는 데 시간과 정력을 쏟기가 어려웠다. 억압적 체제에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해방의 현실을 건설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새로운 해방의 현실을 발견하고 건설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 나의 민족의 힘과 역사와 계속 접해야 한다는 힘든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실존적인 신학 작업이 해체 작업에서 건설 작업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나를 낳아 준 어머니를 발견한 사건이었다. 내 어머니는 한국판 대리모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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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낳은 분은 전라도 광주에서 아들 하나와 함께 살고 있던 가난한 미혼모였다. 그는 일제시대에 연인을 잃었다. 나를 낳은 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기쁨이면서 동시에 슬픔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와 새로 내 어머니가 될 여자에게 나를 넘겨 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내 첫돌날 친어머니에게서 나를 데려갔다고 한다. 그는 나를 보내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의 양어머니에 대항해서 싸울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힘이 있었지만 나를 낳아 준 어머니는 아무 힘도 없었다. 나를 낳은 어머니는 나를 떠나보낸 32년 전 어느 비오던 봄날 기차역에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얼마 안 가서 그는 나를 잃은 슬픔 때문에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 당시 십대였던 그의 유일한 아들은 어머니의 고통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유교적인 윤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에서는 결혼의 틀을 벗어나서 아이를 낳은 여성들을 철저하게 배척한다. 어떠한 법이나 관습, 집단도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그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이런 여자들은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이다. 이들이 겪는 사회적 소외는 당대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진다. (-)나의 친어머니는 사회적인 질시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완전히 지워 버리고, 마치 내가 자신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함으로써 나를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부류의 아이들에 속하게 하고 싶어했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에게서 역사상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현경아, 너는 11년 이상 신학 공부를 해 왔다. 하지만 누구를 위해서 지금까지 신학을 해 왔니? 왜 신학을 공부하려고 했니? 너는 늘 네 나라의 억눌린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신학을 한다고 생각했지. 자, 봐라! 정말로 네 신학을 발전시키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생각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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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의 만남은 나의 신학적 관심들을 분명히 할 수 있게 해주었고,(-) 어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이 외롭고 험한 세상 속에서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이야기—나는 그가 살아 온 “침묵의 문화”에 분노하곤 했다. 그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침묵시키려고 했다. 생산적이고 공적인 인간이 될 어떠한 체계적인 도움도 없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침묵은 결코 그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졌고, 가난에 내몰려졌으며, 한동안은 정신이상까지 되었었다.
(-) 유럽과 미국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훌륭하고” “전문적인” 신학자가 될수록 내 어머니 같은 사람들과는 멀어져만 갔다. 더 이상 유럽의 특권층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이른바 “종합적인” 신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제 내게 아주 분명해졌다. 나는 내 어머니 같은 사람들과 연대하는 신학, 그들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신학을 하고 싶다. 그래서 백인과 자본주의, 남성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역사의 밑바닥 중에서도 더 밑바닥에” 속하는—내 어머니 같은—희생당한 사람들, 특히 아시아 여성들의 상처와 고통에 소리를 불어넣고, 그들을 부활시키고 싶다.
아시아의 짓밟힌 여성들을 나의 신학의 일차적인 맥락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그들의 경험에 대해 책임이 있는 신학을 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서구 남성 지식인들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신학적 언어와 패러다임, 질문들은 아시아 여성신학의 자원이 될 수 없다. (-) 자원은 아시아 여성들 자신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아시아 여성들이 자신들의 구체적인 매일매일의 삶의 경험들이 스스로를 위한 종교적인 의미 구조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는 강요된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 아시아 여성들은 스스로의 느낌과 판단을 신뢰하고, 그것들을 사용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규정하는 기존의 규범 체계에 도전해야 한다. 우리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매일매일의 삶의 경험들이 우리의 신학을 최종적으로 검증하는 시험대가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