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오, 몹시 괴롭습니다."

"불쌍한 사람, 내 탓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내 이마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아닙니다. 그렇지만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일종의 망상이 되었습니다. 당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더구나 당신을 정말로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밤낮으로 저를 괴롭힙니다."

(-) 반다 (-) 의 눈빛은 떨고 있었고 촉촉하면서도 기진맥진해 보였다, 예전에 나를 황홀하게 했던 그 눈빛이었다. 그다음 그녀는 일어서서 작고 연약한 손으로 푸른 아네모네 화관을 비너스의 흰 곱슬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거의 내 의지와는 반대로 나는 그녀를 껴안았다. 

"저는 더 이상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대 아름다운 여인이여." 내가 말했다. "믿어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은 꼭 믿어주세요. 미사여구도 아니고 환상도 아닙니다. 마음속 깊이 저와 당신의 삶이 결합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당신과 헤어진다면, 저는 쇠약해지고, 파멸할 겁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절대로 없을 거예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이봐요." 그녀는 내 턱을 살짝 쳤다. "어리석은 사람!"

"진정으로 생각해보면" 하고 반다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당신의 모든 광기는 악마적이며 충족되지 못한 감각일 뿐이에요. 자연법칙에 어긋난 기질을 가진 자는 그런 병을 얻게 마련이죠. 당신이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이 된다면, 오히려 완전히 이성적인 사람이 될 거예요."

"자, 저를 이성적으로 만들어주십시오." 나는 중얼거렸다. 나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모피 속을 더듬었다. 마치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물결처럼 모피가 내 정신을 혼미하게 하면서 그녀의 솟은 젖가슴 위로 출렁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아니, 그녀가 나에게 키스를 했다. 아주 거칠게, 아주 무자비하게, 키스로 나를 삼켜버릴 듯이. 나는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성을 잃었고, 마침내 더 이상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무슨 일이에요?" 반다가 물었다.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스럽다고요?" 그녀는 요란스럽고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넘길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신음 소리를 냈다. "당신이 느끼지 못한다면."

그녀는 갑자기 진지해졌고 손으로 내 머리를 세우더니, 아주 세차게 나를 자기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 "당신은 나를 더 알아야 해요."

"반다!"

"결심해요. 복종할 거예요? 무조건?"

"제가 만약 거절한다면요?"

"그렇다면."

그녀는 냉정하게 비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악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 내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정말로 내 상상의 폭군이었고 그 모습은 가혹해 보였다. (-)

"당신은 잔인한 여자입니다. 당신은 저를 때릴 겁니다." 내가 말했다.

"오, 아니요!"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당신을 보내줄 거예요. 당신은 자유예요. 당신을 붙잡지 않겠어요."

"반다,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저를 말입니까?"

"그래요, 당신을, 나를 숭배하는 당신을." 그녀는 경멸적인 어조로 외쳤다. "한데 당신은 겁쟁이이고 거짓말쟁이이며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죠. 당장 떠나세요." 그녀는 경멸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반다!"

"불쌍한 인간 같으니!"

내 피가 심장까지 솟구쳤다. 나는 그녀의 발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또 눈물바람이로군!"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오! 이 웃음은 무시무시했다. "가세요. 더 이상 당신을 보지 않을 거예요."

"제발!" 나는 얼떨결에 소리쳤다. "당신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당신이 마음대로 다루는 물건이 되겠습니다. 저를 버리지만 말아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파멸할 겁니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나는 그녀의 무릎을 감싸 안고 손에 키스를 퍼부었다.

(-) "이제야 당신을 알겠군요. 짓밟힐 때 숭배하고 심하게 학대를 당할수록 더욱더 숭배하는 당신의 개 같은 본성을. 이제 나는 당신을 알지만 당신은 지금부터 나를 알아야 해요."

그녀가 성큼성큼 좌우로 걸어다니는 동안, 나는 절망하여 무릎을 꿇고서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이리 와요." 반다가 안락의자에 앉으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녀의 손짓에 따라 그녀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나를 슬프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마치 몸속에서부터 불이 켜지듯 갑자기 그녀의 시선이 환해졌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고 내 눈물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 반다는 기분이 좋아서 사탕을 내 입에 물려주기도 하고, 내 머리를 다듬어주었으며, 내 목도리를 풀어서 멋있게 작은 리본으로 매주었다. 또 모피 숄을 내 무릎에 얹어놓고서 내 손가락을 살짝 누르기도 했다. 유대인 마부가 앞에서 잠깐 동안 꾸벅꾸벅 졸 때면 심지어 내게 키스도 했다. 그럴 때 그녀의 차가운 입술에서는 가을에 앙상한 줄기와 누런 잎 사이에 외로이 피어나, 첫 서리 때면 꽃받침에 작고 단단한 다이아몬드들이 맺히는 저 어린 장미의 신선하고도 쌀쌀한 향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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