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웃사이더 ㅣ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1931년 영국 레이세스터에서 노동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주당 3펜스를 버는 구두 수선공이었다. 이것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기가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이 20세기의 현 시점에서는 불합리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노동자 계층의 가족들-특히 공장 노동자들-은 오블로모프가 산업의 악마라고 여겼던 이상한 냉담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나의 가족은 내가 주일마다 월급 봉투를 집에 가져오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16세에 학교를 중단했다(나의 동생은 14세에 중단했다).
그 후 8년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일-주로 비숙련노동-에 종사하면서 계속해서 자료를 수집했다. 나는 또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나는 부피가 큰 일지 한 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24세가 되었을 때는 수백만 단어에 달했다. 그것은 매우 고되고 재미 없는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나의 관심과 같은 관심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19세에 결혼했으므로 아내와 어린애들이 이 문제에 덧붙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도 어떤 격려도 기대하지 않고 완전히 혼자서 전부의 작업을 하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 천재적 재능에 대한 어떤 신념-즉 적어도 자기가 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과 다른 어떤 인간도 이러한 확신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그것은 상관없다는 믿음-이 없이는 작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소외에 대한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도 나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훌륭히 절제할 수 있는 유쾌한 성격을 항상 지녀왔다. 그래서 나는 다른 어떤 작가나 사상가와도 접촉하지 않고 완전히 고독의 공간 속에서 읽고 쓰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의 일생을 공장에서 노동하는 데 썩이고 나의 작품은 빛을 보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한 생각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블레이크나 니체도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일할 수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감내해내기도 했다. (-)
'아웃사이더'의 근본문제는 일상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며, 그 일상의 세계가 무언가 지루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데 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이 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이라고 믿으면서 먹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인류의 시인이나 사상가들은 이 감정을 그들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데, 악셀의 표현에 의하면 이 감정은 삶 그 자체가 평범하게 되풀이되는 노역이며 종들에게만 알맞다는 느낌이다. (-)
20세기에 낭만주의는 다른 이름으로 재생되었다. 소위 '실존주의'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문은 여전했다. 지고하고 신과 같이 초연하며 권능 있는 세계와, 우리가 희생적이고 절망적이며 '일시적'이라고 느끼는 세계 중 어느 세계가 실제적인가? 자유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육체나 세상에 속박되어 있는 노예의 경험 중 어느 것이 진실한가?
(-) 나는 현대문학에 매우 널리 스며들어 있는 우울증이나 패배의 경향에 참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패배하거나 죽음을 당할 의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모든 문제는 무의미하며 우리는 우리들의 감정의 한계를 좋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이어 교수가 이끄는 게으르고 지적으로 우둔한 영국 철학자들의 학파에도 나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문제들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하거나 가장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어야 한다.
해결의 길은 반드시 발견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나의 타고난 낙관주의가 나의 이점이다. (-) 만약 문제가 패배된 채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 문제에 충분히 공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해서 '성네옷의 한계'라는 문제를 깨닫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1954년의 어느 더운 여름날, 나는 지치고 '생명의 평가절하'의 상태로 북방의 큰 길에서 피터버로로 가는 무료 자동차를 불렀다. 나는 피터버로에 가고 싶지는 않았으며-그것은 진저리쳐지는 의무의 요구였다-또한 내가 무미건조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했고 주인과 싸워야 했던 런던에 특별히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나는 너무 의기소침해 있었기 때문에 트럭이 마침내 내 앞에서 멈췄을 때에 고마운 느낌도 가질 수 없었다. 1마일쯤 갔을 때 자동차의 변속기에서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운전수가 자동차 수리 공장에 가서 수리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자동차를 내려 다시 차를 불렀다. 두번째의 트럭이 내 앞에서 멎었다.
이번에도 나는 고마움도 마음의 위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약 10분 정도 갔을 때 불합리하고도 우연한 일치가 일어났다. 자동차 변속기에서 역시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마치 "나는 다음 차고에서 너를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날 처음으로 '아!' 하는 적극적 감정이 일었다. 어쨌든 그는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그가 시속 20마일 미만으로 차를 몰자 그 소리가 그쳤다. 이렇게 1시간 반쯤 간 후에-우리 둘 다 긴장하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는 "만약 우리가 이 속도대로 계속해서 간다면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위안과 기쁨에 압도당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그의 불합리함에 주의했다. (-)나는 나의 이러한 인식을 서투르기는 하지만 다음의 말로 공식화했다. 즉, "고통이나 불편함에 의하여 자극될 수 있는 인간의 마음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에는 무관심하다"고, 그리고 그때 우리가 성네옷의 거리를 지나고 있어서 나는 그것을 '성네옷의 한계'라고 이름붙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잊지 못한다.
우리가 취급하고 있는 문제가 진보의 문제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점차로 분명해졌다. 이 책에서 나는 아웃사이더들을 쉽게 탈선하는 급행 열차에 비교했다. 비행기와 소리의 장애 문제가 더 적절한 비교일지도 모른다. 비행기가 소리의 속도에 가까운 속력으로 비행하게 되면, 공기는(-) 일종의 콘크리트 장벽과 같은 것을 형성한다. 제트 비행의 초기에는 비행기가 이렇게 콘크리트와 같은 공기의 장벽에 부딪쳐 파열되곤 했었다. 그러나 발명가들이 초음속 폭음을 거뜬히 통과하는 비행기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을 때에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비행기는 항상 급강하했다. (-) 그런데 어느 날 특별히 배치된 시험 비행사가 불합리한 짓을 시도했다. 그는 조종간을 광포하게 뒤로 젖히는 대신에 앞으로 당기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평소보다 훨씬 급강하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비행기는 똑바로 나아갔다. 즉 초음속에서는 평상시의 많은 법칙적인 특성이 뒤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는 <아웃사이더> 문제의 청사진처럼 보였다.
어떤 사람은, 진보란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여행할 능력이 있는 인간을 창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것은 평균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는 완전히 낯선 진지함과 정신적인 강도의 능력이다. 19세기에는 성공하지 못한 경험들의 잔해로 뒤덮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풀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성네옷의 한계'라는 나의 개념 속에 반 이상의 해답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주된 불행은 초음속 여행의 낯선 법칙에 대한 우리의 무지다.
_콜린 윌슨_아웃사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