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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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모든 연령대의 개인들에게 외모와 능력, 출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경쟁'의 무기로 '관리'되고 단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에 대해 혼자 져야 하는 책임의 부담은 엄청나게 커졌다. (-) 개인들은 늘 '합리적'으로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살은 특히 지지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막연하거나 구체적인 자살생각을 할 때, 혹은 자살행동의 심리적 원인이 되는 '고립감'에 휩싸여 있을 때, 그것을 제어하고 '위로'해줄 타인과의 '관계'가 곧 지지다. 자살생각과 자살행동은 지지에 의해 결정적으로 제어될 수 있으며, 반대로 자살행동에 이르게 하는 것도 곤경에 처한 관계와 그에 대한 주체의 평가다. 그래서 (-) 토머스 조이너Thomas Joiner라는 심리학자는 "타인에게 짐이 된다는 느낌"과 "좌절된 소속감"을 가장 중요한 자살의 주관적 요인이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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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 2 - 제1부 외장, 개정판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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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젓 사려, 조개젓 사려. 초봄에 담는 쌀새우는 세하젓이요, 이월 오사리는 오(五)젓이요, 오뉴월에 담는 육(六)젓이요, 가을에 담는 취[秋]젓이요, 겨울의 산 새우는 동백하(冬白蝦)젓, 전라도 법성포 중하(中蝦)젓 사시오. 어리굴젓·홍합젓·소라젓·꼴뚜기젓·황새기젓·밴댕이젓·권댕이젓·곤쟁이젓·오징어젓·멸치젓·갈치 창자젓, 입맛나는 젓이요, 세월 따라 담근 젓, 오뉴월 배추쌈에는 달고 한겨울 김칫국에도 좋은 어리굴젓이요, 새우젓이오.”

금방 고샅길 안에 있는 주막 어름에서, 트레머리에 녹의홍상(綠衣紅裳) 떨쳐입은 계집 하나가 삽짝 밖으로 쭈르르 달려나왔다. 길소개를 보고 어서 들어오라는 손짓인데, 눈 밑에 푸릇푸릇한 납독 자국이 있는 걸 보니 색주가(色酒家)짜리가 분명했다.
“젓 사려우?”
고쟁이가 발등에까지 처진 계집에게 길소개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내가 공연히 수작하는 줄 알았수?”
계집을 따라 삽짝 안으로 들어서니 썰렁한 초장 술청에 도포짜리 책상물림 서넛이 목판에 둘러앉아 있었다.
“지게 내리시우. 맛깔이나 봅시다요.”
지게를 내리자, 계집이 독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밴댕이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맛보시오. 맛보는 데 품 달라는 소린 않을 테니.”
계집이 눈시울을 한번 짝 감았다가 손을 고쟁이에다 닦더니,
“밴댕이젓이 어찌 쌉싸고리하오?”
“허, 그런 소리 하지 마슈. 밴댕이젓으로 말하면 젓 중에는 알천이오. 우리 집 논이 서울 흥인문 밖에 있는데 씻나락 한 말을 뿌리면 석섬을 먹소. 우리 집에 크기가 낙산(駱山) 봉우리만한 농우소가 두 필이오. 이삼월에 살이 풀리고 얼음이 녹아 쪽빛 냇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두 필 소에 쟁기를 지워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하여서 물을 댑니다. 한 필지에 보통 열다섯 두(斗)를 파종하는 논이 여러 자리외다. 팔월이 되어 초승달 같은 낫으로 올벼를 베어다가 타작을 하고 방아를 찧어 키질을 해서 노구솥에 넣고 불을 지펴 밥을 지을라치면 기름이 밥술에 자르르 흐르고 구수한 냄새가 혀끝을 감치지요. 남새밭도 또 좀 기름지고 걸다구요. 배추와 상추가 얼마나 잘되는지 삼사월에 갈아엎고 거름을 넉넉히 주면 이슬을 머금고 비를 맞아서 잎이 담뱃잎처럼 너푼너푼 자라서 연하고 싱그러운 양이라니, 그걸 올이 성깃성깃한 죽바구니에 넘치도록 누르지 말고 담는단 말씀이오. 양지바른 곳에다 바랜 장독에 장을 담그면 그 달기가 꿀맛은 저리 가라지요. 제물포 안산(安山) 바다에서 그물로 곱게 올린 밴댕이란 것이 장에 나오면 그놈을 사다가 석쇠에 구울 제 기름간장을 바르면 냄새가 삼이웃에 진동하것다요. 그러면 상추의 물기를 탈탈 털고는 손바닥 위에 쩍 벌려 눕히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올벼 쌀밥 한 숟갈을 사정 두지 말고 듬뿍 떠서 담고 벌꿀 같은 된장을 얹은 뒤에 구워진 밴댕이나 밴댕이젓갈을 올려 정들여 쌈을 싼단 말씀이오. 그러구선 혜임령(惠任嶺) 황아장수 짐 들어올리듯 두 손으로 들어올려 입을 쩍 벌리고 숨을 푹 내쉰 다음에 입안으로 밀어넣는데, 그때 옆에 앉았던 책상물림이 같이 따라 입을 벌리다가 짧은 갓끈이 뚝 떨어졌다는 것이 이 밴댕이젓쌈 때문이란 것을 아시겠소?”
“그게 정말이오?”
“이 아낙이 되 사람과 겸상을 먹었나, 웬 의심이 그리 많수? 그럼, 내가 없는 소릴 반죽 좋게 씨부렸단 말이우?”
“아유, 난 그 밴댕이젓보다는 젓장수 입이나 한번 쩍 맞췄으면 좋겠소.”
“여러 말 말고 젓이나 들여다가 기둥서방 별반에다 올려보시오. 아낙의 궁둥이에다 쩍 하고 입을 맞춰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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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의 협력일기 - 어느 친일 지식인의 독백
박지향 지음 / 이숲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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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가 사용하는 개념적 표현 가운데 ‘후손들의 오만함’이라는 말이 있다. 현재의 잣대를 과거에 들이대고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선대 사람들을 꾸짖고 비난하는 태도를 이른다.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조상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익과 손해를 복잡하게 계산”한 결과, “대단히 복잡하고 힘든” 결정을 내려야 했던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측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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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이미지 - 사고의 그늘 말들의 그림자
강수미 지음 / 글항아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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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쓰는 것은, 관심이 가는 주제에 대해 내가 무엇을 생각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쓰는 동안, 그 책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바꿔놓지요. (…) 나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씁니다.


─푸코와 트롬바도리Duccio Trombadori의 대담.


말하자면 나는 생각이 미리 결정돼 있어서, 글로 써야 할 지식이 이미 완결돼서, 확고부동하고 결정적...인 나만의 것이 있어서 책을 써온 것이 아니다.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알기 위해, 그 무지에 대한 앎이 나를 변화로 이끌고 이전과 다르게 만들도록,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책들을 써왔던 것이다. (-) 하지만 그런 이유와 방식으로 책을 쓴다는 것이 과연 어디 가서 밝힐 만한 것인가, (-) 사람들의 고정관념 속에 책은 여전히 '안다고 가정된 주체'의 복사물 같은 것이니까. (-)


행복을 감정이나 느낌으로 한정하지 말고 어떤 형식, 어떤 존재, 어떤 조건의 충족이나 완전성의 정도로 생각한다면 저자와 독자는 물론 비평 자체에서도 행복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 '밀로의 비너스'처럼, '우주'처럼, '100퍼센트'처럼 아름답고 총체적이고 충만한 어떤 존재로서의 비평이라면, 또는 블랑쇼가 "작품의 고독"이라고 명명한 바를 따라, 우리가 '글쓰기'를 (-) '비인칭의 존재'라고 상정한다면. 그 존재 스스로의 행복을 논하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아 보인다.


내가 이 책에서 쓰고자 했고,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비평의 풍경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풍경'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단어로 정의한다. 이유는 내가 쓴 것들이 총체적이고 완결된 글들의 스펙트럼이 아니라, 현상에 부합하는 단어를 찾아 헤맨 '사고의 그늘'이거나 지각의 모호한 양상을 가시적이며 가독성 있는 상태로 번역하려 하면서 풀어낸 '말들의 그림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칠레 출신 미술가 알프레도 자르의 '실제 사진들'이라는 설치작품이 있다. '르완다 프로젝트'로 잘 알려진 이 작품은 1994년 4월에서 7월까지 르완다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백만여 명의 양민이 집단 학살된 사건 이후의 현장을 탐사한 작가의 수천 장 사진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관객은 그 많은 사진 중 단 하나도 볼 수 없다. 실상을 찍은 사진은 검은 상자에 밀봉된 채, 그 안의 사진에서 언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설명한 문구만 작품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병실에 서 있는 40세의 르완다 의사, 이노센트의 초상이다"같은 내용의 글이 사진을 담은 박스 겉면에 쓰여 있는 것이다.

강수미_말과 이미지의 판도라 상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10/h20131011033043819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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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지음 / 황금부엉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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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이면 나는 또다시 마당을 쓴다.
나는 불을 피우고 아이는 조그만 꽃삽으로 열심히 낙엽을 모아 와 쌓인 재 위에 덮어 연기를 피운다. (-)
그러나 내 눈이 더 많이 머무는 것은 기분 좋은 소리로 타들어가는 나뭇잎이나 연기보다, 신기해하는 빛으로 불꽃을 열심히 지켜보는 아이의 얼굴이다. 아주 훗날 어른이 된 그 애에게 어느 순간,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때 문득 엄마와 함께 마른 잎을 태우던 저녁의 연기, 타버린 재 속에 숨어 있던 불씨의 추억이 떠올라 그에게 따스한 위안으로 작용하기를, 그를 낳은 부모들 또한 조그만 일에 행복해하고 괴로워하기도 하면서 삶의 순간들을 살아갔음을 깨닫게 되고 그 앎이 그의 생에 대한 용기와 사랑, 부드러움을 일깨울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로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는 물론 자기 자신이 쓰기의 일차적 질료가 된다고 할 때 내가 사는 세상이, 내 안과 밖의 모든 것들이 다 읽은 책처럼, 다 마셔버린 술병처럼 확연하고 투명하기만 하다면 그 친밀함과 무감각과 익숙한 것의 감옥에서, 상투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글쓰기가 사라진 생활을 상상할 수 없었건만 그런대로 삶은 관성의 법칙과 타성에 의해,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소소한 기쁨과 자잘한 근심 걱정으로 무늬를 짜 넣으며 무탈하게 흘러갔다. 글을 쓸 수 없는 삶이란 곧 죽음이라는 비장함을 지녔던 지나간 한 시절이 젊음의 열정과 치기로 미소 속에 돌아보아지기도 했다. 규범과 관습, 질서에 충실한 생활에는 단정하고 평범한 삶의 미덕과 평안함이 있었다. 오랜 방황과 괴로움 끝에 찾아온 생과의, 세상과의 화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열망하는 자의 몫이라거나 내게 오는 모든 것들을 순하게 받아들이겠노라는 마음가짐에도 불구하고, 괜찮다, 그런대로 다 괜찮다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마음의 속삭임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 보다 높은, 또 다른 세상의 출구를 향한 갈망과 열정에 몸이 뜨거워지며 거친 격정으로 울기도 하였다.
음악방송으로 다이얼을 고정시킨 라디오에서는 가벼운 고전음악이 흘러나오고 창밖 저만치 먼 곳에서는 이 도시로 들어오거나 떠나는 기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적막하다면 적막하고 덤덤하다면 덤덤한 상황이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똑같이 되풀이되는 평범한 저녁이었다. 쌀을 안치고 바삐 찬거리를 손질하던 나는 문득 일손을 멈추고 거실과 주방의 트인 공간을 일별하였다. 어두워지는 시각, 넓지 않은 한 공간에서 말없이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정황이 연극 무대 위의 한 장면이거나 오래된 흑백영화 화면 한 컷처럼 아득히 보이며 그와 함께 어떤 예상치 못했던 감정 즉 언젠가 훗날, 이 저녁의 정경이 나를 가슴 에이게 하고 울게 만들 것이라는 돌연하고 확실한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 나 자신 이미 이승을 떠난 혼이 되어 떠돌며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았던 집으로 돌아와 안타깝고 그립고 정답게 안을 엿보는 듯한, 비현실감과 쓸쓸함이기도 했다. 우리 둘 중 누군가 먼저 세상을 떠나 다시 만나거나 함께할 수 없을 때 남겨진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워하고 돌이키고 싶어 하게 되는 것은 뛸 듯이 기뻤던 일도 어떤 성취의 만족감도 아닌, 이러한 사소한 일상의 풍경들이 아닐까. (-) 그 평범한 저녁은 오래전, 어쩌면 태어나기 이전의 기억과도 같았고 이 순간을 얻기 위해 허덕허덕 그 먼 길을 함께 걸어왔는가 하는 탄식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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