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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이미지 - 사고의 그늘 말들의 그림자
강수미 지음 / 글항아리 / 2013년 11월
평점 :
내가 이 책을 쓰는 것은, 관심이 가는 주제에 대해 내가 무엇을 생각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쓰는 동안, 그 책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바꿔놓지요. (…) 나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씁니다.
─푸코와 트롬바도리Duccio Trombadori의 대담.
말하자면 나는 생각이 미리 결정돼 있어서, 글로 써야 할 지식이 이미 완결돼서, 확고부동하고 결정적...인 나만의 것이 있어서 책을 써온 것이 아니다.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알기 위해, 그 무지에 대한 앎이 나를 변화로 이끌고 이전과 다르게 만들도록,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책들을 써왔던 것이다. (-) 하지만 그런 이유와 방식으로 책을 쓴다는 것이 과연 어디 가서 밝힐 만한 것인가, (-) 사람들의 고정관념 속에 책은 여전히 '안다고 가정된 주체'의 복사물 같은 것이니까. (-)
행복을 감정이나 느낌으로 한정하지 말고 어떤 형식, 어떤 존재, 어떤 조건의 충족이나 완전성의 정도로 생각한다면 저자와 독자는 물론 비평 자체에서도 행복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 '밀로의 비너스'처럼, '우주'처럼, '100퍼센트'처럼 아름답고 총체적이고 충만한 어떤 존재로서의 비평이라면, 또는 블랑쇼가 "작품의 고독"이라고 명명한 바를 따라, 우리가 '글쓰기'를 (-) '비인칭의 존재'라고 상정한다면. 그 존재 스스로의 행복을 논하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아 보인다.
내가 이 책에서 쓰고자 했고,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비평의 풍경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풍경'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단어로 정의한다. 이유는 내가 쓴 것들이 총체적이고 완결된 글들의 스펙트럼이 아니라, 현상에 부합하는 단어를 찾아 헤맨 '사고의 그늘'이거나 지각의 모호한 양상을 가시적이며 가독성 있는 상태로 번역하려 하면서 풀어낸 '말들의 그림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칠레 출신 미술가 알프레도 자르의 '실제 사진들'이라는 설치작품이 있다. '르완다 프로젝트'로 잘 알려진 이 작품은 1994년 4월에서 7월까지 르완다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백만여 명의 양민이 집단 학살된 사건 이후의 현장을 탐사한 작가의 수천 장 사진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관객은 그 많은 사진 중 단 하나도 볼 수 없다. 실상을 찍은 사진은 검은 상자에 밀봉된 채, 그 안의 사진에서 언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설명한 문구만 작품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병실에 서 있는 40세의 르완다 의사, 이노센트의 초상이다"같은 내용의 글이 사진을 담은 박스 겉면에 쓰여 있는 것이다.
강수미_말과 이미지의 판도라 상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10/h201310110330438192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