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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감정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1800년 9월 23일, 밀라노에 도착한 지 약 석 달 후, 그때까지 카사 보바라 자치체 당국의 프랑스 대사관에서 서기로 근무하던 앙리 벨은 제6경기병 연대의 소위로 임명된다. 격식에 어울리는 복장을 구입하느라 갑자기 돈이 든다. 사슴가죽 바지, 목덜미부터 정수리까지 손질한 말털로 덮인 헬멧, 군화, 박차, 버클 달린 혁대, 가슴띠, 견장, 단추와 계급장을 마련하는 비용은 생계유지비를 훌쩍 뛰어넘는다. 물론 이제 벨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확 탈바꿈한 자신의 외모가 밀라노 여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믿는다. 타고난 땅딸막한 체격에서 탈피하는 데 마침내 성공한 것만 같고, 고상하게 수놓은 스탠드칼라가 그의 짧은 목을 실제로 늘려준 것 같다. (-)
(-)벨은 (-) 바로 그날, 정복한 날짜와 시간, 9월 21일 오전 열한시 삼십분을 바지 멜빵에 기록해두는 것을 잊지 않고,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밀라노를 뒤로하고 떠난다. 어딘가를 끝없이 떠돌며 여행하는 자인 그는 또다시 마차에 앉아 아름다운 풍광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방금 쟁취한 것과 같은 승리의 환희는 그 어떤 다른 일에서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잠긴다. 밤이 다가오자 어느새 그에게 친숙해진 감정인 우울, 죄책감과 열등감과 흡사한 형태의 우울이 그를 사로잡는다. (-) 그 여름 내내 그는 마렝고 전투의 승리로 인한 황홀경으로 날아갈 듯한 기분에 들떠 있었다. 그는 식자들을 대상으로 한 신문에 실린 북이탈리아 정치 캠페인 연재기사들을 굉장히 매혹당한 채 읽었다. (-) 처음으로 군복을 걸치게 되어서야, 그는 자신의 삶이 확고하게 완성된, 혹은 완성을 추구하는 체계 안으로 영구히 편입되었다는 느낌을, 그리고 그 체계 내에서는 아름다움과 공포가 정확히 서로 짝을 이루는 관계라는 인상을 받았다. (-)
한 세기가 시작되는 것을 기념하여 벨은 스칼라 극장에서 다시 한번 <비밀결혼>을 보았으나, 무대장치의 완벽함과 카롤리네 역을 맡은 여배우의 뛰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브레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주인공들과 동일시할 정도의 깊은 감동은 얻지 못했다. 동일시하기는커녕 이번에는 음악이 도리어 그의 심장을 말 그대로 부서뜨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공연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페라가 끝난 후 극장을 가득채우며 터져나온 박수 소리는 마치 파괴의 완결편인 듯 거대한 화재로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처럼 들렸으므로, 그는 한동안 마비되어 꼼짝도 않은 채 타오르는 불길이 자신의 몸마저 집어삼켜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늦게 겉옷 보관소를 빠져나오던 그는, 곁눈으로 슬쩍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시선을 주었는데, 이때 최초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작가는 무엇으로 몰락하는가?─이 이후 수십 년 동안 고통스럽게 그를 따라다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