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Punk 異般 - 레즈비언, 게이, 퀴어 영화비평의 이해
바바라 해머 외 지음, 주진숙 외 엮고 옮김 / 큰사람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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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 양 만이 나오는 한 장면은 꿈 시퀀스이다. 로비와 스티브라는 두 학생이 라커룸에 앉아 있다. 로비가 사부인 그렉에 대한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면서 초록색으로 피어나는 연기로 약호화된 꿈 시퀀스로 커팅된다. 로비는 글씨로 추정되는 검은색 표시가 찍힌 빨간색 머리띠를 하고 있다(그들이 정말로 아시아 언어권에 속한다 해도 흔히 생각하듯 일본인이나 중국인은 아닐 것이다). (-) 검은색 닌자 가면을 쓴 사람이 들어와서 난차쿠를 휘두른다. 로비가 서술한다. "나는 이 사악한 사무라이가 날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가면을 쓴 인물이 로비의 성기 아래쪽을 향해 난차쿠 사슬을 위협적으로 휘두를 때 그렉 사부가 등장해서 그를 처치한다. 로비는 라커룸에서 스티브에게 설명한다. "그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고 어떤 식으로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한참 동안 말을 중단하고 있다가) 그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말이 중단된 사이에 우리는 꿈으로 돌아간다. 더 짙은 연기 속에서 그렉은 팔에 한 남자를 안은 채로 마루바닥에 몸을 굽힌다. 그렉의 등이 카메라를 향해 있지만 우리는 빨간색 머리띠를 한 사람이 로비임을 알 수 있다. 그렉이 그를 눕히는 순간 우리는 그가 "일본인으로 변해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숨 양 만이다.

그렉이 계속 엎드려 있는 숨 양 만과 성교한다. 이 장면은 아시아인이 된 로비에 대한 항문성교를 쾌락이 아니라 복종의 행위로서 구축한다. 이 테입에 나오는 다른 항문성교 신과는 달리, 예를 들어 여기에서는 "아....더 세게..."와 같은 대사는 더빙되지 않았고 애매한 신음소리만이 들린다. 사정하지 않은 채로 그렉은 떠난다. 일본인 복장을 한 (백인) 남성들이 마루에 원 모양으로 서 있고 아시아인이 된 로비, 즉 '동양남자'(그의 이름은 영화 마지막 크레딧에 나온다)는 누워 있다. 그는 누군가의 페니스를 빨고 고환을 핥는다. 다른 남자들이 그의 몸 위에 사정하고 그도 사정한다. (-)


(-) 아시아인 배우가 백인을 흉내내지도 않고 상징적인 타자로 등장하지도 않는 순간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국제적 피부>에는 성기에서 육체를 애무하는 손으로 초점이 옮겨가는 순간이 몇 번 있는데 이때 나는 더 '진실함'을 느낀다. 이것이 아시아인의 본질적인 섹슈얼리티라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연극을 중단하는 순간이 포착된다는 뜻이다. 그는 연기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백인 포르노 스타로 가장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다.


_바바라 해머_ 호모 Punk 異般 - 레즈비언 게이 퀴어 영화비평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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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와 기독교 신앙 - 교회들을 위한 양심의 질문들 무지개신학 시리즈 1
월터 윙크 엮음, 한성수 옮김 / 무지개신학연구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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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한 논쟁은 절호의 기회다. (-) 특별히 예리한 방식으로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진짜 문제는 단순히 동성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경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대해 알려주는가 하는 문제다.

동성애와 관련되었다고 주장된 어떤 본문은 사실은 그 문제와 관계가 없다. 소돔에서 시도되었다는 집단 강간(gang rape, 창세기 19:1-20)이 바로 그런 것이다. (-) 그들의 잔인한 행동은, 동일한 성적 지향의 성인들끼리 서로 동의하여 표현된 진정한 사랑이 합법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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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입장의 근본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성경 본문들은 달리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동성애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은 처형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성경의 명백한 명령이다. 그 의미는 분명하다: 자기의 믿음을 구약성경의 증언에 근거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동성애 행위를 한 모든 사람에게 사형이란 처벌을 요구하도록 완전히 일관되어야 한다. (그건 좀 지나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렇게 강조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있다. 그러나 비록 성경이 그렇게 명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의 법정이나 종교 단체에서 동성애자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단죄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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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약성경 율법은 월경 기간 7일 동안에는 성교를 엄격히 금지해서(레위기 18:19; 15:19-24), 이를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박멸" 혹은 "사람들로부터 끊어버림"을 당해야 했다(kareth, 레위기 18:2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을 생각도 하지 않고, 때로는 월경기간 중에서 성교를 한다. 그들을 박멸시켜야 할까? 성경은 박멸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2. 간통에 대한 처벌은 남녀 모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지만 (신명기 22:22), 여기서 간통은 여자가 결혼한 상태인 것으로 정의된다. 구약성경에는, 남자가 자기 아내에 대해서는 간통을 범할 수 없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만 간통을 범하는데, 이는 그의 아내를 성적으로 이용해서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처녀가 아닌 것으로 발각된 신부는 돌로 쳐서 죽이지만(신명기 22:13-21), 그러나 남자가 결혼할 때 총각이었느냐 여부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훨씬 더 많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간통이 동성 간의 성적인 관계들보다 좀 덜한 "죄악"으로 여겨지는 현상은 오늘날 성에 대한 논쟁에서 흥미로운 것들 중 하나다. 아마도 이는 우리 교회들 안에서 (동성애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간통자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분명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기로는, 간통자들에 대해 돌로 쳐 죽이도록 요청한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간통자들에게도 목사 안수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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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중결혼(polygamy, 일부다처)과 첩(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사는 여자)을 두는 일은 구약성경 안에서 흔히 실행되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도 비난 받은 일이 없다(디모데전서 3:2, 12. 그리고 디도서 1:6의 의심스러운 예외들을 제외하고). (-) 한 남자는 성교를 통해서 한 명 이상의 여자와 "한 몸"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유태교의 자료들을 통해 이스라엘에서는 신약성경 시대 이후에도 수세기 동안 유태교 안에서 다중결혼이 계속 실행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만일 성경에서 다중결혼과 첩 제도를 인정하였다면, 왜 우리는 하지 않는가?

5. 일련의 다중결혼의 형태의 하나가 형사취수혼(levirate marriage)이다. 결혼한 남자가 자녀들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면, 그의 과부 아내는 그의 가장 나이 많은 형제와 성교를 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상속자를 얻지 못하고 죽으면, 그녀는 다음 형제의 차지가 되고, 필요하면 계속해서 그 다음 아우가 차지한다. 예수는 비판 없이 이 관습을 언급한다(마가 12:18-27). 유태인들은 예수 시대에 이르러서는 실질적으로 이 관습을 중단하고, (-) 여자를 그 의무에서 해방시켰다. 이런 명백한 성경의 명령에 어느 기독교인이 복종했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런 율법들을 무시하는 반면에 동성애 행위에 관한 율법들은 유지하며 강조하는가?

6. 구약성경에는 여자의 경제적 가치(신부 값)가 손상되지 않는 한, 결혼을 하지 않은 성인 남녀가 서로 승낙하는 성적인 관계들을 명백히 금지한 곳이 어디에도 없다. (유태인 소녀는 열두 살 반에 성인이 되고, 그 이후엔 그녀의 성에 대한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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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간통, 근친상간, 강간(성폭행), 그리고 매매춘에 대한 사회적 규정들이 구약성경 시대에는 주로 여자들에 대한 남자의 재산권의 관점에서 결정되었다. 매매춘은 신부들의 처녀성과 남편의 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해 상당히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창세기 38:12-19; 여호수아 2:1-7). 후대의 유태인 본문들에서는, 비록 창녀(혹은 남자하인) 자신은 죄인으로 여겨졌지만, 창녀를 방문한 남자는 죄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 오늘날 우리는 큰 사회적 소란과 그리고 필요하지만 높은 대가를 치르면서, 여자들이 더 이상 남자들의 소유물로 여겨지지 않는 보다 평등하고, 가부장적이 아닌 사회 제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중적 기준을 넘어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 그러나 우리는 아직 매매춘에 대한 이중적 기준을 바꾸는 데 별로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 (-) 성경에 있는 가부장주의는 어찌할 것인가?

10.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통 동족 내 결혼을 했다. 즉, 이스라엘 12 부족 안에서 결혼했다. (-) 최근까지 미국 남부에서도 타인종 간의 결혼(miscegeneration)에 반대하는 법에 따라 동족 내 결혼이 성행했다.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생전에, 타인종간 결혼에 반대한 주의 법들을 폐지하려는 비폭력적 투쟁과 타인종간 관계들을 향한 사회적 태도의 점진적 변화를 목격했다. (-)

11. 모세 율법은 이혼을 허락했다(신명기 24:1-4). 예수는 정언명령으로 이혼을 금지한다(마가 10:1-12; 마태 19:9은 그 강도가 약하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예수의 명령을 위반하고, 이혼을 해왔다. 그러면 왜 바로 이런 이혼자들이 자신은 세례, 교회입교, 성찬식, 그리고 목사안수 등에 법적으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성애자들은 배척하는가? 특히 예수는 동성애를 언급한 적이 없지만 명백히 이혼은 정죄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무엇이 한 죄(동성애)는 다른 죄(이혼)보다 훨씬 더 크다고 만들었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혼한 사람들을 목사 안수도 하고, 재혼도 하게 한다. 도대체 왜 동성애자들은 목사 안수나 결혼을 해선 안 되는가?

12. 구약성경은 독신을 비정상이라고 여겼고, 그리고 디모데전서 4:1-3는 강제적 독신을 이단(heresy)이라고 부른다. 다른 신약성경 본문들은 이를 옹호하는 것 같다(마태 19:10-12; 고린도전서 7; 계시록 14:3-4; 사도행전 21:9; 그리고 예수 자신의 모범). 카톨릭교회는 사제들과 수녀들의 독신을 의무로 만들었다. 어떤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동성애자들이 독신을 위한 사명감을 가졌든 안 가졌든, 그들에게 독신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독신을 법으로 정했기 때문이지, 신의 소명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하느님이 남자들과 여자들을 서로를 위하여 열매를 맺고 번성하도록 만들었기에, 동성애자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의도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기를 낳지 못한 부부들, 독신인 사람들, 사제들, 수녀들도 그들의 창조에 하느님이 의도하신 바를 위반하는 것이란 뜻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왜 사도 바울이 결혼한 적이 없었는지 설명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가 독신으로 남았던 것에 대해 하느님의 뜻을 위반한 것으로 비난할 준비가 되었는가? 확실히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성적 관계들은 정상적인(normal)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남녀 사이의 성적 관계들이 규범적인(normative)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결혼한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고 독신인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축복하실 수 있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결혼을 모든 사람의 결혼에로 일반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고린도전서 7:7에서 바울은 결혼을 "charisma(성령의 은사)" 혹은 신의 선물이라고 불러서, 모든 사람이 결혼의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처럼-결혼하지 않고-남아 있기를 원했다. 인구과잉의 시대에는 동성 간의 지향이 특별히 생태학적으로 건강하다!

13. 우리는 다른 많은 방식에서, 성경에 명백히 정해진 것들과는 다른 규범들을 발전시켜왔다. 예를 들면, "두 남자가 싸울 때에, 한쪽 남자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음낭을 잡거든, 당신들은 그 여인의 손을 자르십시오. 조금도 동정심을 가지지 마십시오"(신명기 25:11-12)라는 명령과는 반대로, 우리는 그녀가 남편의 생명을 구하려고 한 것에 대해 아마도 당연히 그녀에게 박수를 칠 것이다.

14.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 노예제도를 정상적인 것으로 여겼고, 어디에서도 그것을 정언명령으로 금지한 곳이 없다. 물려받은 전통의 일부는 여자 노예들과 포로들을 그 남자 소유주들이 성적인 대상들, 첩들, 혹은 비자발적인 아내로 만든 것이었는데, 이는 사무엘하 5:13, 판관기 19-21장, 그리고 민수기 31:18에서 인가하였다-그리고 약 150여 년 전에 많은 미국의 노예 소유주들이 이런 본문들과 다른 성경 말씀들을 자신들의 정당화를 위해 인용하면서, 똑같은 짓을 했다.

요점은 이스라엘의 성적인 관습을 비웃자는 것이 아니다. 성의 문제를 두고서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유태인들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해석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왔다. 미국의 유태인 그룹들(개혁파, 보수파, 그리고 재건파) 대다수가 남자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정책들을 갖고 있으며, 또한 동성애, 자위행위, 생식을 위한 것이 아닌 성교 등등에 대해 똑같은 종류의 논쟁들을 벌여왔다. 중요한 것은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 모두가 물려받은 전통을 재해석해서 그것이 오늘날 신자들에게 말하도록 허락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성적인 문제들은 성경의 권위에 대해 우리가 갖는 태도와 연관된다. 그런 문제들은 기독교인들이 무시한 것들, 가령 갑각류 물고기를 먹는 것이나 두 가지 서로 다른 천들로 만든 옷을 입는 것처럼, 성결법전(the Holiness Code)에서 제의적으로 금지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성적인 행위에 관한 규정들로서, 성경의 도덕적 명령들에 속한다. 명백히 우리는 어떤 규정들은, 특히 구약성경 속에 있는 것들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는다고 여기지 않는다. 신약성경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구약성경 속에 있는 법령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구속력을 갖는다고 여기는 다른 것들도 있다. 여기서 우리의 선택의 원칙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거의 모든 현대의 독자들이 다음 것들을 거부하는 데는 성경에 동의할 것이다:

*근친상간

*강간

*간통

*동물과의 성교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다른 성적인 관습들에 대해선 성경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다음과 같은 행위들을 성경은 비난한다:

*월경 중에 하는 성교

*독신주의(어떤 본문들)

*타인종과 결혼(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배우자와 결혼)

*성기들의 명칭을 말하기

*나체(어떤 조건들 아래에서)

*자위(어떤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이것을 비난함)

*산아제한(일부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이를 금지함)


그리고 성경은 정액과 월경의 피를 불결하다고 여기는데,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비난하거나 중지한 행위들을 허용한다:

*매매춘

*다중결혼

*형사취수제도(죽은 형의 아내를 다른 형제들이 차례로 결혼)

*노예들과의 성교

*첩 제도

*여자를 재산의 일부로 여기기

*매우 어려서 하는 결혼(소녀들, 연령 11-13세)


그리고 구약성경은 이혼을 허용하지만, 예수는 이를 금지했다. 간단히 말해서, 여기서 언급한 성적인 관습들 가운데, 우리는 오직 네 가지만 동의하고 그 나머지 열여섯 가지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는다.

오늘날 형사취수제도를 부활시킬 것을 추천할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성적인 행동들에 대해 성경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자유롭게 느끼는데, 도대체 왜 동성애 경우만은 성경 본문들을 증거 본문으로 내세우면서 단죄하는가? 명백히 이런 문제들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많은 것들은 멋대로 독단적인 것이다. (-)

바울이 상기시켜 주듯이, 만일 우리가 옛 율법 아래 머물고자 고집한다면, 우리는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지킬 의무가 있다(갈라디아 5:3).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의 마지막이요(로마서 10:4), 우리가 섬기기 위해서 율법에서 풀려나서, 옛날의 문자로 쓰여진 율법 조항 아래에 있지 않고 성령의 새로운 생명 속에 있다면(로마서 7:6), 성경의 이 모든 성적인 관습들은 성령의 권위 아래 놓이게 된다. (-)


문제의 핵심은, 성경에는 성 윤리(sexual ethic)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 대신에, 성경은 여러 가지 다양한 성에 대한 관습을 보여주는데, 그 중 일부는 수천 년 성경 역사에 걸쳐서 변화되었다. 관습이란 어느 특정한 공동체가 받아들인 성찰되지 않은 습관들이다. 성경이 금지하고 있는 많은 관행들을 우리는 허용하고, 성경이 허용하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금지한다. 성경은 오직 사랑의 윤리(love ethic)만 알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문화, 혹은 기간에 지배적인 성적인 관습들에 영향을 주도록, 항상 그 사랑의 윤리를 끌어들인다.

"성 윤리(sex ethic)"라는 개념 자체가, 현대적 삶의 물질주의와 분열을 반영하는 것이라서, 그 안에서 우리는 점차적으로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을 정의한다. 삶에서는 성과 그 밖의 나머지로 분리할 수가 없다. 사람의 삶의 나머지 것들, 문화의 형태들, 당면한 특수 환경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윤리적인" 성적인 행동이란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단지 성적인 관습인데, 이는 때로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고, 당황스러운 딜레마를 만들어 낸다. 단지 한 사람의 일생 기간에도, 결혼할 때까지 처녀성(동정)을 보존하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여긴 것에서부터, 결혼하기 전에 몇 해 동안 함께 사는 남녀들(쌍)로 바뀌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과거의 위선적인 것들을  단지 그리워만 할 뿐이다.

나는 규정들과 규범들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게 바로 성적인 관습이다. 그러나 규정들과 규범들도 또한 지배체제에 봉사하도록 강조되고, 그래서 인간의 잠재력을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을 통제하는 하나의 형태로 이바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모범을 보인 사랑의 윤리(love ethic)로, 어느 시대와 나라의 성적인 관습을 비판해야 한다. 그런 사랑의 윤리는 착취하지 않는다(그래서 어린이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없고, 타인들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그런 윤리는 지배하지 않는다(그래서 여자들을 소유물로 여기는 가부장적 취급이 없다). 그것은 책임적이고, 상호적이며, 돌보고, 사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이런 사랑의 윤리를 그의 영감 어린 구절,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라"에서 다루었다.

그러면 우리의 도덕적 과제는 특정한 문화에서 널리 행해지는 어떤 성적인 관습에도 예수의 사랑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이든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어린 십대들에게 말할 때, 범하면 죄가 되는 율법과 계명으로가 아니라, 그보다는 우리들 자신의 너무도 많은 자녀들이 너무 일찍 성적인 친숙함에 압도되고, 그래서 자발적으로 독신이나 심지어 데이트하는 것조차 거절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슬픈 경험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공허하고 설득력이 없는 명령들이 아니라, 합리적인 이유들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동성애자들과 이성애자들 모두에게, 사랑에 비추어 자신들의 행동들을 성찰하고, 또한 성실성, 정직성, 책임성, 그리고 타인들과 사회 전체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진정한 관심의 필요성 안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도록 도전할 수 있다.

결국 기독교 도덕은, 충동을 억제하는 쇠로 만들어진 정조대가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과의 관계의 성실성을 표시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의 방식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이성애자들에게나 마찬가지로, 동성애 지향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도덕적이라는 것은 그들 자신과 타인들의 성실성을 위반하는 성적인 관습을 거부하고, 예수의 사랑의 윤리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폴 에거트슨(Paul Egertson)과 모튼 켈시(Morton Kelsey) 두 사람 모두 동성애 지향이 도덕과 아무 상관이 없음은 왼손잡이가 도덕성과 상관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방식이다. (-)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관점에서 접근해보면, 동성애 문제는 즉시 바뀔 것이다. 이제는 질문이 "무엇이 허용되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동성애자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로 된다. 행위가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질문은 "성적인 영역에서 신의 율법을 범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 대신에 "우주적인 사랑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 앞에서 무엇이 성실함인가?"가 된다. 기독교 율법주의 관점보다는 성령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질문은 "성경은 무엇을 명령하는가?" 대신에, "성경, 전통, 신학, 그리고 확실히 심리학, 유전학, 인류학, 생물학의 빛에 비추어, 지금 교회들에 성령이 하는 말씀은 무엇인가?"로 된다. 우리는 나쁜 과학에 근거해서 윤리학을 계속 세워나갈 수는 없다.

(-)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너희는 옳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라고 하셨다(누가 12:57). 그런 자주적인 자유는 많은 기독교인들 가슴 속에 테러를 일으킨다. 그들은 차라리 율법 아래에 있기를 원하며, 무엇이 옳은지를 말해주기를 바란다. (-) 바울은 결코 사람들이 그 자신의 윤리적 권면을 돌판에 새긴 새로운 계명으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 자신도 "옳은 것을 그 자신이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

어쨌든 성경이 동성애 행위를 언급한 곳에선, 분명히 성경은 그것을 비난한다. 나는 그 점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다. 문제는 정확히 성경적인 판단이 옳으냐 하는 것이다. 성경은 노예제도를 승인했고, 어디에서도 그것을 불의하다고 공격한 곳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노예제도가 성경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할 준비가 되었는가? 150년 전에, 노예 문제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을 때, 성경은 분명히 노예소유주들의 편을 들었던 것으로 보였다. 노예폐지론자들은 성경적인 근거에 의해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가 매우 힘겨웠다. 그러나 오늘날 만일 당신이 남부의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이 노예제도를 승인했는가 여부를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부터 50년 뒤, 사람들이 뒤돌아볼 때, 동성애에 관하여 성령이 우리들 가운데서 행한 새로운 것에 대해 교회들이 그토록 둔감했고 또한 그토록 저항했다는 것에 대해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노예제도 문제에서(-) 교회들이 마침내 성경의 율법적인 방침을 넘어서 심지어 더욱 깊은 방침에로 뚫고 들어가도록 내몰렸던 것이다. (-) 예수가 창녀들, 세리들, 병자들, 불구자들, 버림받은 자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함 속에 숭고하게 구체화되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힘없는 자들의 편을 드신 것이다. 하느님은 억압당한 자들을 해방시키신다. 하느님은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며, 만물의 화해를 위해 신음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길에서 용서를 선포하고, 출생, 혹은 생물학, 혹은 경제적 궁핍 탓에 "죄인들"로 간주된 사람들을 모든 면에서 사회 속으로 다시 복귀시키도록 하였다. 그런 고매한 자비심의 빛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무엇이든, 사랑하고, 돌보고, 그들의 고통들에 함께 하라는 복음의 명령은 틀림없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여자들은 우리들에게 성경 속에 널리 스며들어 있고, 교회로부터 그토록 많은 여자들을 소외시킨 성차별주의(sexism)와 가부장주의(patriarchalism)를 인정하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는 길은 성경 속의 성차별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계시된 빛에서 심지어 성경조차도 비판하는 해석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준 것은 모든 형태들의 지배를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자체를 비판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은 그 자체를 수정하는 원칙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성경을 우상화하는 것(biblioarty), 성경을 숭배하는 것에서 해방되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증언으로서, 그 제자리에 회복된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의 책이 아니라, 한 사람이다.

(-)

우리는 몇 걸음만 뒤로 물러서서, 우리 자신들에게 정직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글에서 내가 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깊이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그게 완전무결하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주장들 속에서 취약점들을 발견하듯이, 당신은 내 말 속의 취약점을 발견할 수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낙태나 동성애, 그 어느 영역에서도, 우리에겐 명확한 안내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 자신들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내가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나는 어떻게 아는가?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

(-)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누가 옳은지에 대해 전체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라고 명령을 받고 있다. 교회 안에서, 인정하든 안 하든, 종종 우리 곁에 앉는 동성애자 형제자매들뿐만 아니라, 이런 논쟁에 포함된 우리 모두를 그대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고통스럽지만 서로 인정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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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 4
이자혜 지음 / 현실문화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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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분을 읽을 때와 지금의 나는 달라졌다고 느꼈다. 예전에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장면을 작품에서 보았을 때, 나도 고통 속에 있고 이 사실이 누구에게도 전달이 안 된다는 생각에 그 폭력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건강해졌는데도 누군가를 계속 원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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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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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 이 소설을 두고 심사장에서는 작가의 전작들과 다르다는 얘기, '정영수답지 않은 소설'이라는 얘기가 오갔다. 나도 동조했으나, 뒤돌아서자마자 급체한 것처럼 '~다움'이라는 말이 명치에 콱 박혔다. 막 소설집 한 권을 세상에 내놓았을 뿐인 젊은 작가의 '~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누가 정의할 수 있나? 이 작가가 부디 더 '답지 않은' 방식으로 멀리 가기를 바란다. _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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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무법자 - 남자, 여자 그리고 우리에 관하여
케이트 본스타인 지음, 조은혜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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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트랜스젠더들이 쓰고 출판할 수 있는 건 자서전,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 이야기나 여자 몸속에서 야위어 가는 남자 이야기뿐이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출판할 수 있는 건 그런 것이었다. 트랜스젠더는 오랫동안 고통받은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하지만 결코 지배적 관념에 도전하지는 않는 낭만적 저작들. 게다가 우리에 대해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속셈이 있거나, 뭔가 증명하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상처를 받아서 비난할 누군가가 필요한 것 같다. 



(-) 우리는 정확한 표현을 피하면서 가볍게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할 뿐 이 성별은 무엇이고 저 성별은 대체 무엇인지 거의 혹은 아예 질문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을 남자 아니면 여자로 범주화하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확신한 탓에 스스로에게 매우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을 게을리한다. 남자란 무엇인가? 그리고 여자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우리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어야 하는가?


(-)


대체로 남성이란, 어떤 형태이든 페니스가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또 여성은 어떤 형태이든 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난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페니스가 있는 여자를 여럿 알고 있다. 내 인생의 멋진 남자들은 다수가 질이 있었다. 그리고 성기 모양이 페니스와 질 사이의 무엇인 사람도 꽤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

당신은 염색체가 XY이기 때문에 남자인가? 염색체가 XX라서 여자인가? 젠더 재현의 영역에서 의심받아 본 운동선수가 아닌 이상, 당신은 성별을 결정하기 위해 염색체 검사를 받아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 검사를 받은 적이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자신의 성별을 알고, 또한 당신의 낭만적인 혹은 성적인 파트너의 성별을 아는가? 흔히 나타나는 XX와 XY 이외에도 XXY, XXX, YYY, XYY 그리고 XO 등의 성염색체 쌍이 있다. 그러면 이것은 젠더가 둘보다 많다는 뜻인가?

계속 살펴보자. 사람을 남자로 만드는 게 무엇인가? 테스토스테론인가? 사람을 여자로 만드는 건 또 무엇인가? 에스트로겐인가? 그렇다면, 젠더는 어느 약국 진열대에서나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고 배웠다. 그리고 테스토스테론은 종을 막론하고 남자의 성호르몬 밸런스를 지배한다고도 배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 예로, 암컷 하이에나는 본래 수컷보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다. 하이에나 암컷의 음핵은 아주 긴 페니스처럼 생겼다. 하이에나 암컷은 수컷을 뒤에서 올라탄 다음 교미를 한다. (-)

당신은 아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여자인가? 매달 하혈을 해서 여자인가? 많은 여자가 임신 가능성이 없는 몸으로 태어나고, 갱년기 이후에는 모든 여자가 임신 가능성이 없다. 이 여자들이 여자이기를 그만둔 것일까? 건강상의 이유로 자궁 절제술을 받았다면 이 수술은 성전환인가?

당신은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어서 남자인가? 만일 당신의 정자 수가 적어서 임신이 어렵다면 어떨까? 당신이 방사능 피폭으로 임신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당신은 여자가 되는 것인가?

당신은 출생신고서에 여성이라고 올라 있어서 여자인가? 출생신고서가 남성이라고 하니 남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했는가? 어떤 의사가 당신이 태어나자 당신의 가랑이 사이를 내려다본다. 의사는 당신의 외부 성기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따라 당신이 이 젠더가 될지 저 젠더가 될지 정한다. 그 모든 선언 중에서 가장 되돌릴 수 없는 이 선언에 당신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문화에서라면, 당신은 앞으로도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다 가진 인터섹스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외과의사가 당신을 “고쳤”을 것이다. 당신의 동의 없이. 부모의 인종이나 경제적 상태에 따라 부모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동의도 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당신은 고쳐졌을 것이다. 젠더에 들어맞도록 고쳐졌다. 남들과 다르거나 이례적인 성기로 태어나는 것은 꽤 흔한 경험이지만, 현대 서구 의학은 인터섹스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친”다.

다시 출생신고서로 돌아가자. 당신은 법이 그렇다고 하기 때문에 여자 혹은 남자인가? 법은 절대 변하지 않을까? 우린 매일 우리 주의, 나라의, 문화의 법을 바꾸기 위해 새 법을 제정하지 않는가? 정치 영역에선 이것이 일종의 게임이 아니었는가? 다른 법은 어떤가? 예를 들어서, 종교법은 어떤가? 종교는 남자와 여자의 권리와 적절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좌우할 수 있지만, 그 어떤 종교도 정말 무엇이 남자이고 무엇이 여자인지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안다고 지레짐작한다. 우리 문화의 지레짐작이 이렇게 심하다.

나는 평생을 가장 근원적인 여자의 정의, 의문의 여지 없이 확고한 남자의 정의를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어떤 무리나 개인이 자기네 목적을 위해서 붙들고 있는 변덕스런 정의밖에 찾은 게 없다.


(-)


시, 연극, 춤, 음악, 조각, 회화, TV드라마, 영화 등 당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예술에는 모호하게 혹은 다르게 젠더화된 사람들의 초상이 늘 존재해왔다. 그건 우리가 아닌 사람들이 그린 것, 우리가 아닌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지배문화는 소수자를 전형화해서 식민화하고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를 농담거리 삼으면 우리의 분노가 위험하지 않게 되고, 우리가 들고일어나 한 목소리로 항의하는 것을 겁내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조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변하고 있다.


(-)


우리 영혼에는 가능성이 가득한데도,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도록 자신을 사회적으로 처방된 이름과 범주에 묶어 둔다. 우리는 누구라도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정체성을 취한다. 아마 그것이 우리가 남자와 여자가 되고 그렇게 남는 이유일 것이다.


(-)


많은 사람이 수술 전 트랜스젠더의 삶을 이렇게 설명한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잘못된 몸에 갇힌 사람입니다.’는 설명은 트랜스젠더 감정(transgendered feelings)을 정직하게 반영한 말이 아니라, 문화의 기대에 순응한 불행한 비유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트랜스젠더는 빗대어 설명할 대상이 부족한 사람들, 비유할 대상이 없는 사람들이다. 뭔가에 빗대어 설명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하면, 우리는 다른 방식의 설명을 더 찾지 않는다.

이제 트랜스젠더들이 새로운 비유를 찾아보아야 할 시간이 왔다. 지배적 관념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젠더화된 사람들에게 우리 삶을 설명할 다른 방법을 말이다.



(-)



“난 진짜 괴물인데 넌 가면을 써야만 괴물이 될 수 있으니까 날 질투하는 거지!” -펭귄맨

“그럴지도.” - 배트맨

_팀 버튼(Tim Burton), <배트맨 리턴즈(Batman Returns)>


배에 주먹이 꽂히는 걸로 화가 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굴 때에도 화가 난다.

그들이 매일매일 당신을 어떻게 쳐다보는지 알아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들은 당신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실눈을 뜬다.

마치 그러면 당신을 더 잘 확인할 수 있다는 듯.

만일 당신이 군중 속에 있다면, 그들 중 누구는 눈을 돌린다.

자신이 당신을 바라보는 걸 친구들이 모르도록, 정말 교묘하게. 

당신은 히죽거림 뒤에 숨겨진 공포,

역겨움 너머 증오도 읽을 수 있다.

이 모든 게 당신의 망상일까 봐 걱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이 모든 게 망상이길 바란다.

(자신감이 있어야 패싱이 잘된다고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들 중 하나는

욕망을 담아 당신을 바라본다.

그런 시선이 가장 두렵다.

젠더가 뒤섞인 몸에 대한 갈망을 받아들이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젠더를 위반하는 사람만 곤경을 겪는 것이 아니다. 젠더 체제는 결국 모두를 좌절시킨다. 규칙을 따르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도 우리는 때때로 상처를 입는다. 진짜 남성이거나 진짜 여성이라는 이유로도 심하게 상처를 입을 수 있다.


(-)


(-) 트크쇼 진행 중에 한 방청객이 내게 “그 질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때 난 내가 괴물이 확실하다는 걸, 하지만 딱 내가 침묵을 지키는 만큼만 괴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말을 하자 나는 교육할 기회를 얻었고, 역설적으로 덜 괴물이 되었다.


우리는 마땅히 웃음거리가 되어야 할 존재도 아니고, 뚫어져라 바라볼 만하거나 배에 주먹이 꽂혀도 싼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억압에 맞서 분노할 자격을 갖고 있다. 그 분노는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이어야 하고 무언가 바꿀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억압과 폭력에 저항한다. 우리를 웃음거리로 보는 이 문화의 경향에 저항한다.


(-)


전환한 지 얼마 안 된 트랜스젠더를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혹은 그녀의 동작을 보는 것이다. 그 혹은 그녀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느리게 움직인다. 예전의 동작을 지우고 새로운 동작을 고르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보통 속도로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비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다. 고등학생에게서 손가락질을 받고 야유 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에 스치는 역겨움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섞여 들어가는 법을 배운다. 그것을 “패싱”이라고 한다.


(-)


모욕은 젠더 수호자가 쥔 채찍 중 하나다. 모욕은 사실상 문화의 모든 층위에서 승인된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를 비웃을 수 있다. 그러나 젠더 연기(portrayal of gender) 때문에 모욕을 당하리라는 두려움이 전혀 없을 때, 문화가 통제권을 휘두를 기회는 줄어든다.


(-)


우리는 모욕에 신경 쓰라고 배운다. 왜냐하면 모욕은 문화의 다른 채찍인 폭력으로도 집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폭력 때문에 모욕의 공포로부터 초연하기란 마음먹은 것 이상으로 어렵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잘 숨던가, 얻어맞던가 둘 중 하나다. 자살을 시도할 수도 있다. 아니면 웃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사실 웃을 기회는 꽤 있다. 공포가 그 기회를 가렸을 뿐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모욕의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사람은 광대, 바보, 익살꾼 그리고 마술사들이었다. (-)


아인슈타인처럼 위대한 바보는 상식과 보통 사람들이 외경하는 잣대를 의심한다. 이 의심으로 인해 그들은 우주와 시간에 대한 혁명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대한 바보는 일상의 쳇바퀴 바깥에 머무르며 매 순간의 경이로움에 열려 있다. 현재의 지식에 만족하는 우리야말로 멍청한 이들이다. 우리는 기적 같은 창조의 율동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바보는 계속해서 처음 순간을 본다. 위대한 바보의 폭로는 자주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준다.


바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들은 대부분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비웃어 버림으로써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 또한 농담거리로 삼을 수 있게 한다.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바꿔 치는 그들의 장난에 불안감과 불신이 생기고 이것이 문화에 각인된 거짓을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바보는 단순하고 순수한 지혜를 갖고 있다. 이는 귀중한 것으로, 이 문제투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용하다.



(-)


수술실에 들어가자 마취 간호사가 주사를 한 방 더 놓더니 100부터 거꾸로 세어 보라고 했다. 난 96까지 세었고 그다음 죽었다.

수술 도중에 한 번 깼다. 한때는 내 왼쪽 고환이던 데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마취약이 더 투여되고, 난 다시 죽었다.

아주 어렸을 땐 매일 밤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자애가 돼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 끝에 “전 이제 잠자리에 눕겠습니다...”를 덧붙이곤 했다. 병원 침대에서 죽음에서 깨어나면서 어린 시절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난 타로 덱에서 무작위로 카드 한 장을 뽑았다. 성배(Ace of Cup). 행복을 뜻한다.


순간적이기도 하고 영원하기도 한 시간 동안 죽음과 재탄생을 오가면서, 샤먼은 신성한 영혼이 준 진실의 일부를 이 세상으로 가져온다. 그것은 광대한 우주적 진리의 바다에서 가져온 모래 한 알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샤먼이 다른 이들에게 진실을 말해 줄 때만 진실의 모래를 간직할 수 있다. 만일 샤먼이 그 진실의 모래를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데 실패하면, 영혼에 의해 미쳐버릴 것이다.

별 것 없는 내 삶에 이런 이야기가 잘 들어맞는다는 걸 깨닫기 전에는 이런 얘기들이 꽤 아리송하게 들렸다. 나는 수술대에서뿐 아니라 내 정체성의 핵심적인 부분에서도 죽음이나 다름없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범위의 경계를 벗어난 곳에 틈새 공간(in-between place)이 존재한다는 것이 내가 그 경험에서 깨달은 진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침묵해야 하는, 트랜스섹슈얼이라는 걸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진실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세상에 태어났다. 이런 세상은 치료를 빙자해 우리를 침묵시키고 거짓말하게 한다. 그로 인해 결국 우리는 미치게 될 것이다. 숨기고, 패싱하고, 침묵한 채로 있느라 미쳐 버린다. 실로 침묵은 곧 죽음이다. 이 원칙은 문화가 침묵해야 한다고 명령한 모든 상황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죽음/재탄생의 상황에 있는 모든 샤먼의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


다시 태어난 샤먼이 세계로 들어가 진실의 일부를 말하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


이 세상이 진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들 방법을 알아내는 건 샤먼이 할 일이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만큼이나 진실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말했듯이, 어떤 매체를 선택하는지가 메시지 그 자체만큼이나 메시지를 전달한다. 따라서 형식은 내용만큼 중요하다. 문화 자체가 받아들이기 쉬운 진실의 공연(performance)이거나 배우기 쉬운 진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문화를 이해한다. 샤먼은 문화가 자신의 진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문화와 소통하며 문화를 상대로 진실을 공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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